소설리스트

금단의 꽃-48화 (48/108)

48.

연환궁은 후궁들을 위해 지어진 아름다운 공간이다.

황궁은 전부 네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제의 침전과 가벼운 정무를 보는 금환궁, 황후가 사용하는 은환궁, 후궁들을 위한 연환궁, 그리고 태자를 비롯한 왕자와 공주들을 위한 주선궁, 이렇게 네 개의 공간으로 내궁이 이루어져 있고, 그 외에 황제가 대신들을 만나 정무를 보는 편전과 황궁을 지키는 금군들이 평소에 거주하는 연무관, 그리고 대신들이 공론을 나눌 수 있는 지관전이 있는 외궁이 황궁의 두 개의 구분된 공간이다.

이 중에서 후궁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외궁이다.

후궁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외궁으로 발걸음을 할 수 없고, 후궁이 외궁으로 갈 수 있는 경우는 황제의 부름이 있을 때뿐이다.

뿐만 아니라 황제가 거하는 금환궁 역시 후궁들이 사사로이 출입을 할 수가 없다.

금환궁이나 외궁의 출입이 허락된 것은 황궁의 내명부 중에서 황후와 태후가 유일했다.

황후와 태후는 황제와 버금가는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의 황궁에는 황후도, 태후도 존재하지 않는다.

황후와 태후가 권세를 가지는 까닭은 황제가 붕어하기 전 고명을 남기지 않고 숨을 거두게 되면 차기 황제의 지명권이 황후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태자가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황제가 붕어하는 순간

‘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준다’

는 고명을 말하지 않으면 차기 황제의 자리는 공중에 뜬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황후의 권한이었다.

황후는 차기 황제를 지목함으로서 태후의 자리를 보장받는 것이다.

전전 대의 황제가 붕어했을 때가 딱 그런 경우였다.

이미 장자가 태자로 책봉되어 있었지만 사냥터에서 낙마 사고로 사경을 헤매던 황제가 고명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황후는 차기 황제로 선황제를 지목했던 것이다.

장자도 아니고 황후의 소생도 아니었던 왕자를 지목한 것에 있어서 야합이 있었다느니 거래가 오갔다느니 별별의 말이 다 있었지만 그렇게 태자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동생에게 황위를 빼앗겨야만 했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황위에 오른 선황은 태자였던 형을 비롯해 다른 모든 형제들을 거의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고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올려 준 태후마저 독살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선황제가 옥좌에 오른 후 두 달을 넘기지 못하고 태후가 어느 날 급사를 한 까닭에 그때 동묘에는 황제가 태후를 죽였다는 소문이 흉흉하도록 시끄럽게 번졌었다.

그런 이유로 누가 황후가 되는가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관심사였다.

황후가 제 몸의 소생을 낳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황후가 되는 것만으로 이미 가장 강력한 권세를 손에 쥐기 때문이다.

선황의 황후였던 주은호는 혼인 무효 선고를 받고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폐위된 까닭에 태후가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사가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일단 입궁을 했기 때문에 사가로 돌아가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여 강인사로 보내졌던 주은호가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자 황궁 안에는 발 없는 소문이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소문의 대부분은 이런 것이었다.

황제의 장인이 되고픈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승상 주이염이 새 황제와의 거래를 통해 딸을 후궁에 넣었다는 소문과 함께 황제가 태자였던 시절부터 주은호가 태자에게 꼬리를 쳐 태자로 하여금 패륜적인 짓을 저지르게 했다는 소문이었다.

전자든 후자든, 어느 쪽의 소문이 진실이건 간에, 주은호가 다른 후궁들에게 결코 곱게 보일 리가 없는 이유들이었다.

“연환궁의 총 책임을 맡은 가연이라 하옵니다.”

연환궁에 처음 들어와 작은 처소로 안내받은 은호에게 첫인사를 올린 것은 은호도 아는 얼굴이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반가운 얼굴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가연이라는 이름의 상궁은 예전에 은호가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그녀의 교육을 맡았던 훈육 상궁이었다.

은환궁의 상궁이기도 했던 그녀를 은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은환궁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기 전이었다.

그날 은환궁의 상궁과 나인들이 전부 다른 이들로 바뀌었고 그 이후로 은호는 훈육 상궁, 즉 가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상궁을 만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 연환궁에서 다시 만난 것이 너무 기쁘고 반가워 은호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말았다.

“마마.”

가연이 살며시 눈을 흘겼다.

엄한 눈매의 그녀가 눈을 흘기자 은호가 얼른 잡았던 손을 놓았다.

‘내가 너무 무례했나?’

반가운 마음에 손을 잡았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는 후궁이고 가연은 연환궁의 책임 상궁이다.

너무 무례하고 경솔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소인도 기쁩니다.”

그러나 눈을 흘긴 것도 잠시 가연의 입술이 곱게 휘어지며 미소가 머금어졌다.

‘아, 이렇게 웃는구나…….’

은호는 가연이 웃는 것을 처음 봤다.

은호의 기억 속 가연은 엄하고 무서운 상궁이었다.

항상 무표정하게 이것저것을 가르쳐 주고, 그건 틀렸다, 그렇게 하면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무섭게 훈계하던 그녀가 지금은 웃고 있는 것을 보며 은호가 적잖게 당황했다.

매서운 눈매를 하고 있는 가연은 웃을 때만큼은 상냥해 보였다.

“저도, 다시 보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마마. 소인에게 저, 라고 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아, 미안해요.”

“앞으로 누구와 말씀을 나누시던 마마의 위치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마마는 이 연환궁에 후궁으로 입궁하신 것이며 이 연환궁의 다른 후궁들과 동등한 입장이옵니다. 지금 이 후궁의 누구도 정식으로 첩지를 받기 전입니다. 후궁들 간의 직계가 결정되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마마께서 스스로를 낮추시면 저들이 마마를 업신여길 것입니다.”

“잘 알겠어요.”

훈육 상궁이자 은환궁의 상궁이었던 가연을 연환궁의 책임 상궁으로 보낸 것은 하진의 배려일까.

혼자 이 연환궁에 남겨져 아무것도 모르고 우왕좌왕 두려워할 자신을 위해서 가연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라면 자신은 하진에게 얼마만큼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첩지를 받지 못한 후궁들의 직계를 결정하는 것은 사가의 힘입니다. 마마의 가문은 그 어떤 후궁의 가문보다 지체 높은 가문. 마마께서 승상의 따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마마.”

가연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은호를 엄한 눈으로 쳐다봤다.

조금 전의 미소는 이미 그녀의 얼굴에서 사라지고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다시 원래의 엄한 표정으로 돌아간 가연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첩지를 받기 전의 후궁은 가문의 권력이 힘이지만, 일단 폐하의 승은을 입고 나면 그때부터는 달라집니다. 승은을 입었느냐 입지 못했느냐로 후궁의 직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연은 웃고 있지 않지만 그 눈은 어쩐지 웃는 것처럼 보였다.

“이 연환궁에서 누가.”

가연이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 다시 은호를 바라보며 그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폐하의 승은을 입겠습니까.”

그 말에 은호의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이 연환궁에서 누가 황제의 승은을 입겠는가.

모든 후궁들은 황제의 승은을 바라며 입궁했겠지만 그녀들에게는 비극적이게도, 황제는 그녀들에게 승은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 가연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후궁은 후궁이되 승은을 입지 못하는 후궁이 될 것이다, 라고.

단 한 명을 제외하고.

황제의 영혼까지 사로잡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머잖아, 은환궁에서 모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마마.”

가연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황후로 다시 책봉될 날을 기다리겠다는 뜻을 밝히는 가연을 보며 은호가 아주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연환궁에서 동쪽으로 시선을 던지면 은환궁의 지붕이 보인다.

은환궁이 연환궁보다 높은 지대에 지어져 연환궁에서는 은환궁이 보인다.

이렇게 궁을 지은 까닭이 있다.

은환궁을 바라보며 그곳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야망을 후궁들에게 심어 주기 위해서다.

후궁들이 단 하나의 자리를 두고 암투를 벌이고 서로를 서로가 물어뜯게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악한 목적으로 은환궁과 연환궁이 지어졌다.

[황궁에는 마물이 살고 있습니다.]

강비의 말에 담긴 뜻 역시 그런 것이다.

단 하나의 자리, 황후가 되기 위해서 서로를 죽이려는 가시 돋친 꽃들이 피는 곳.

지금 자신이 선 연환궁은 그런 곳이다.

‘숨이 막히지만…….’

독기에 숨이 막히는 것 같지만 숨이 막힌다 하여 도망칠 수 없는 것은 이 황궁에 그 사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내 역시 이 독기 가득한 황궁에서 얼마나 숨이 막힐까.

그러니 자신은 도망칠 수 없다.

적어도 그 사내를 위해서,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못 할지라도 함께 힘들어하고, 함께 허덕거려 줄 수는 있다.

함께 아파할 수 있다.

아니, 대신 눈물 흘려 줄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면.

“저는, 아니 나는 고개 숙이지 않을 겁니다.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서 있을 겁니다. 누가 어떤 비난을 하고 손가락질을 해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래야 하는 것이죠?”

“네, 마마.”

은호가 조용히 웃었다.

“많이 부족하지만 옆에서 열심히 혼을 내 주세요. 내가 바르게 갈 수 있도록.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위에서 불어온 바람이 은호의 옷자락을 흩날렸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옷자락을 손으로 누르며 은호가 살며시 뒤를 돌아봤다.

벌써부터 보이지 않는 적의 가득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라는 듯, 살갗이 따끔거렸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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