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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47화 (47/108)

47.

하진이 돌아간 것은 밤이 꽤나 깊어진 다음이었다.

어둠 속으로 하진이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려던 은호가 때마침 돌아오는 강비와 마주치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강비가 자신이 하진과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는 생각에 은호는 그녀 앞에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하진과 자신이 한 짓은 패륜적인 행위다.

충분히 손가락질받을 수 있고, 또 비난받아야 하는 행위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자신은 아직 하진과 어떤 식으로든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관계다.

외부적으로 자신과 하진은 계모와 아들일 뿐이다.

비록 자신이 혼인 무효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잠시라도 선황의 황후였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흔적은 평생 낙인처럼 자신과 하진을 따라다닐 것이라는 걸 은호도 알고 있다.

하진은 그 낙인을 기꺼이 짊어지려는 것이고, 이제 자신도 그것을 짊어질 수밖에 없다.

“폐하께서는 돌아가셨나 봅니다.”

“네, 마마.”

“고개 숙이지 마세요. 이제 곧 다시 귀하게 되실 분이.”

다시 귀하게 되실 분.

역시 강비도 뭔가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위연의 생모라서 위연에게 전해 들은 것일까?

아니면 하진이 위연을 통해서 강비를 포섭한 것일까.

그 자세한 사정까지는 은호가 알 길이 없다.

‘내게 잘해 준 것도 하진 님께서 그리 시켜서 그런 것일까?’

황궁에서는 일면식도 없었던 강비가 이곳 강인사에 온 이후로 자신을 잘 챙겨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던 행동들의 뒤에 하진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은호의 마음이 씁쓸해졌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는 것일까.

은호는 사람의 착한 마음을 믿고 싶다.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돌아오는 이득이 없어도 사람은 사람에게 충분히 친절해질 수 있고 호의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보면 그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마마.”

강비가 은호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황궁으로 돌아가시게 되면 저를 잊지 말아 주세요.”

“네?”

강비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은호가 얼굴을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강인사로 내보내진 선황의 후궁들은 일생을 이곳에서 마쳐야 하지만 예외는 있답니다. 황후마마께서 강인사의 후궁들 중 한 명을 지명해서 곁에 두시겠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원래는 선황 폐하의 붕어 후에 태후께서 후궁들 중 한 명을 지목하는 것이지만 지금 황궁은 태후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내명부의 수장은 당연히 황후마마가 되실 겁니다. 황후마마께서 강인사의 누구를 지목하시면 그 지명을 받은 이는 이곳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제가 황후가 된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

은호의 가슴에 돌덩이처럼 누르고 있는 불안은 이것이다.

그러나 이 불안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다.

자신을 위해 어떤 희생이든 감수할 준비가 된 하진에게 이런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고 누군지도 모르는 후궁들을 붙들고 이런 말을 하겠는가.

부친이 곁에 있다 하더라도 이런 불안을 부친에게는 털어놓지 못할 것이다.

강비에게 이런 불안을 내비칠 수 있는 것은 강비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준다 하더라도, 지금 자신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여인은 강비 외에는 없다.

황궁에서 오래 살았고, 황궁의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며 침착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강비는.

“마마. 선황 폐하를 생각해 보세요. 선황께서도 손가락질받을 만한 일을 많이 하셨고, 아니 그분의 생애 전체가 온통 비난받을 만한 일로 얼룩이 졌지만 그분의 생전에 누구 한 명 그분께 손가락질을 하거나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나요?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그분께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제라는 절대적인 힘 말입니다. 마마와 폐하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으로는 마마와 폐하 사이의 일을 패륜이다, 부정이다, 짐승 같은 짓을 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지만 누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겠습니까. 힘이 있는 쪽은 폐하와 마마이신걸요.”

“힘…….”

“네, 마마. 그러니까 힘을 가지셔야 합니다.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을 지킬 수 있고,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는 법입니다. 힘이 없으면 전부 빼앗길 뿐이고, 힘이 없으면 빼앗기고도 하소연 하나 못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제 곧 마마께서 황궁으로 돌아가시면 마마, 힘을 가지셔야 합니다.”

“어떤 힘 말인가요?”

“마마. 마마는 후궁으로 입궁하실 겁니다. 다른 후궁들과 함께요.”

“알고 있습니다.”

“물론 페하께서 마마를 지켜 주시겠지만 후궁들의 암투란 사내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지요.”

강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후궁의 꽃은 독을 머금은 가시를 품고 있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습니까? 후궁들은 모두 폐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그녀들의 최종 목표는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는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후궁들 속에서 우리 마마는 어찌 견뎌 내실까요. 더군다나 선황의 황후였다는 약점까지 가지신 마마께서 후궁들과의 싸움에서 이기시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힘입니다, 마마. 그리고 후궁의 힘은 황제 폐하의 총애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마마, 입궁하시면 더는 주눅 들지 마십시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마마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셔야만 합니다. 마마께서 폐하의 사랑을 얼마나 어떤 식으로 독점하고 있는지, 폐하께서 마마께 얼마나 빠져 계시는지 후궁의 모두가 알게 해야 합니다. 총애를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그 총애를 과시하세요. 총애는 곧 힘입니다.”

은호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은 강비가 그 손으로 은호의 턱을 잡아 올렸다.

“이렇게, 지금처럼 이렇게 당당하게 얼굴을 드시고, 오만하게 턱을 당기세요. 절대 올려다보지 마시고 도도하게 내려다보세요. 하찮은 말에 일일이 대답하지 마시고 말이 아닌 것은 무시해 버리세요. 잊지 마십시오. 마마는 폐하의 총애를 받는 유일한 여인인 동시에 주 승상의 무남독녀입니다. 양손에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마께서 쥐고 계신 칼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셔야지요. 그래야 마마 자신도, 그리고 마마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모든 것도 지켜 낼 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비가 제 머리에 꽂혀 있던 머리꽂이를 빼내 그것을 은호의 머리에 꽂아 줬다.

“마음을 강하게 먹으셔야 합니다. 황궁에는 마물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 마음의 어둠에 숨어 사는 마물은 언제든지 약해진 마음을 집어삼키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마마, 마음을 강하게 먹으셔야 합니다.”

“이것을 왜 제게…….”

강비가 꽂아 준 머리꽂이를 은호가 손을 들어 살며시 만져 봤다.

“마마. 그 머리 장식은 이십 년 전에 돌아가신 호련 황후께서 제게 주신 것입니다.”

“호련 황후라면…….”

은호도 알고 있는 이름이다.

호련 황후.

선황의 첫 번째 황후.

하진의 생모.

병으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황후. 그것이 은호가 알고 있는 전부다.

“호련 황후님은 무척이나 상냥하고 다정하신 분이셨지만 마음이 약한 분이셨습니다. 결국 그 약한 마음이 그분을 돌아가시게 만든 것입니다. 마마, 저는 상냥하고 다정한 또 한 분의 황후마마를 저 무서운 황궁에서 잃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마음을 강하게 하세요. 마마께서 해를 입으시면 폐하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

강비가 왜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인지 은호는 아직도 강비의 진심을 모른다.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강비의 말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호련 황후의 이야기를 꺼내며 하진의 눈물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전해졌다.

강비는 적어도 자신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하진은 걱정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진을 위해서 자신도 걱정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십 년 전 호련 황후께서 그리 돌아가시고 그때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폐하께서는 서러운 눈물을 흘리셔야만 했습니다. 소중한 이를 잃고 흘리는 눈물처럼 서럽고 아픈 것은 없습니다. 그런 눈물이 다시 폐하의 눈에서 흐르게 하지 말아 주세요. 만약 마마를 잃게 된다면 폐하는 분명 또다시 그리 아파하실 테니까요. 폐하를 위해 강해지세요, 마마.”

하진을 위해서.

은호는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한 번도 강해져 본 적이 없다.

쉽게 절망하고, 쉽게 아파하고, 또 쉽게 흔들렸다.

강함은 자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강함은.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그 사내를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고 강비는 말하고 있다.

강해져야 지킬 수 있다고.

‘내가 하진 님을 지킬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그 사내가 자신을 지켜 주었다.

그 사내에게는 힘이 있으니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사내는 자신을 지켜야 하고, 자신은 그 보호 안에만 있고.

은호가 선황에게 칼을 휘둘렀던 때를 떠올렸다.

그건 그녀가 생전 처음으로 용기를 냈던 순간이었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다시 칼을 휘두를 것이다.

그건 하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지켜 드리자…… 그분을…….’

칼을 휘둘러서 그 사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젠 황궁에서 스스로를 지켜 내는 것으로 그 사내의 마음을 지키자.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 그 사내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면, 강비의 말대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자.

하진의 사랑을, 자신에게 주는 그의 총애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하는 은호의 눈동자에 조용한 결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주이염의 딸, 선황의 황후였던 주은호가 머물던 강인사를 떠나 황궁으로 되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약 열흘이 지난 후였다.

새 황제의 후궁으로 간택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묘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는 파격적인 간택이었다.

선황의 황후였던 여인이 선황의 아들인, 새 황제의 후궁으로 간택받는 것.

전무후무한 일이 동묘에 일어나고 있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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