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날이 저물었습니다. 제가 여기에 이러고 있으면 강비마마께도 누가 될 겁니다.”
이미 밖은 해가 저물었다.
그런데도 하진은 돌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지금 은호와 하진이 있는 이 처소는 은호의 처소가 아닌 강비의 처소다.
자신들이 여기에 있는 이상 강비는 밖을 서성거려야 할 것이다.
그건 얼마나 폐를 끼치는 일일까.
이미 의복을 단정하게 고쳐 입은 은호와는 달리 사내는 여전히 벗은 채로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사내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은호가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너는 아직 내가 무서우냐?”
그만 돌아가야 하지 않겠냐는 물음에 사내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말해 보아라. 아직도 내가 무서우냐.”
무섭냐고 물어본다면, 이미 무섭지 않게 된 것이 꽤 한참 전이지만 그렇게 말하면 이 사내는 뭐라고 할까.
참 그 마음이 쉽게도 바뀐다고 할까.
“아직도 내가 무서운가 보구나.”
자기가 묻고 자기가 결론을 내린다.
은호가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사내의 얼굴을 살며시 곁눈으로 훔쳐봤다.
차마 눈이 마주칠까 똑바로 보지는 못했다.
아직도 은호는 이 사내의 눈을 똑바로 보는 것이 부담스럽다.
자신이 너무 겁이 많은 것일까.
알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겁이 많고, 또 얼마나 눈물도 많은지 알고 있다.
남들의 절반만큼이나 용기가 있고, 남들의 절반만큼이나 강했더라면 자신과 이 사내의 관계는 조금은 달라졌을까.
‘내가 조금만 더 용감할 수 있다면…….’
“그러면 질문을 달리 해 보마. 내가 그리웠더냐?”
사내의 눈빛이 여간 짓궂지가 않다.
“어서 일어나셔서 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면서 너를 보쌈해서 데리고 갈까?”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저는 이 강인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법도?”
사내가 낮게 웃었다.
조금은 유쾌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강인사에서 내게 다리를 벌리는 것은 법도에 맞는 것이고, 나와 함께 강인사를 나가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런 것이냐?”
“그건…….”
“황궁에서 황후의 신분으로 태자와 정을 통하는 것은 법도에 맞는 것이고, 나와 함께 황궁으로 가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다?”
“폐하, 저는…….”
“한 번 선을 넘었는데 두 번은 못 넘겠으며 세 번은 못 넘겠느냐.”
왜 이 사내는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굳이 이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괜히 은호의 가슴이 불안해졌다.
[곧 데리러 가마.]
사내가 그 말을 했을 때부터 사실 은호는 불안했었다.
이 사내는, 은호가 알고 있는 이 사내는 하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그런 사내다.
가지고자 마음먹은 것은 기어이 가지고, 이루고자 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루고야 마는 그런 사내.
그런 사내의 입에서 데리러 오겠다고 말을 했으니 이 사내는 자신을 기어이 이곳에서 끌어내려 할 것이다.
법도와 관습, 천륜을 무시하고서라도 이 사내는 기어이 그의 바람을 이룰 것이다. 그런 사내니까.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알고 있다.
이 사내가 자신을 데려갈 곳은 한 곳뿐이다.
황궁.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
대체 무슨 명분으로 자신을 황궁으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비록 자신이 선황과의 혼인 무효를 선고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잠깐 동안이라도 선황의 황후였던 사실이 없던 것이 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은 여전히 선황의 황후였던 여자다.
그런 자신이 황궁으로, 더군다나 새 황제의 여자로 환궁하게 된다면 모두 불가를 외칠 것이 뻔하다.
그렇게 되면 이 사내가 사면초가에 몰리지 않을까.
‘나 때문에 어려운 길을 가지는 마세요…….’
은호가 이 사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자신 때문에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될 부담을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지 않아도 되는 힘겨운 길을 자신 때문에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려는 것일까.
고작 이런 자신을 위해서 왜.
이 사내가 무섭냐고?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사내가 무서울 리가 있을까.
정말 무서운 것은 자신을 이렇게 사랑하는 이 사내의 마음이 자신으로 인해 다치는 것이다.
이 사내가 자신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는 것이 그저 두렵다.
다른 두려운 것은 없다.
“저는 여기가 좋으니 그러지 마세요…….”
“거짓말도 할 줄 아는구나. 영 거짓말 따위는 못 하는 줄 알았더니. 어디서 거짓말을 배웠느냐?”
하진의 말에 은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나쁜 것은 잘도 배우는 법이지. 이곳에서 후궁들 따위와 어울리더니 거짓말부터 배운 것이냐?”
“그게 아니라…….”
“거짓말 다음에는 투기와 모사도 배우겠구나.”
“아니, 그런…….”
아니다.
절대 아니다.
투기라니, 모사라니.
새빨개진 채로 대답을 못 하는 은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하진이 손을 올렸다.
그의 손이 은호의 뺨을 잡더니 끌어 내렸다.
“투기도 좀 해 보고, 모사도 좀 꾸며 보려무나.”
“폐하…….”
“네가 나 때문에 다른 년들에게 투기하는 것을 보고 싶은데. 너무 과한 바램이냐?”
투기라니.
투기를 할 이유도 없고, 하진의 주위에 다른 여인들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무슨 투기를 하겠는가.
“후궁들을 들일 것이다.”
곧 이어진 하진의 말에 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이 사내가 뭐라고 한 것일까.
“황제의 힘은 귀족들과 지방 호족들의 지지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귀족들과 지방 호족들이 등을 돌리면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해지는 법. 힘을 위해서는 귀족들의 딸들과 호족들의 딸들을 후궁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그러……셔야지요…….”
이것이 당연한 것이다.
후궁이 없는 황제는 없다.
황후가 없는 황제도 없다.
하진은 이제 황후도 맞이해야 하고 후궁들도 맞이해야 한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것인데 왜 가슴이 아픈 것일까.
왜 이 사내의 곁에 여인은 자신 하나뿐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한 걸까.
이 마음은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일까.
“곧 귀족들이 자기 딸들을 황궁에 입궁시킬 거다. 연환궁이 후궁들로 가득 차겠지. 그리고 그 후궁들 중에서 황후를 간택할 생각이다.”
“부디 아름다운 분이 폐하의 곁을…….”
“투기하는 표정도 볼만 하구나.”
“네?”
하진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은호가 볼 수 있었다.
자신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동자는 불안에 흔들리고 있는 이것이, 투기일까.
“네 투기하는 얼굴을 보는 재미도 좋겠지만.”
“아앗…….”
끌어당기는 하진의 손에 은호의 몸이 쓰러졌다.
제게 무릎을 내어주고 있던 은호를 제 곁으로 쓰러뜨린 사내가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속삭였다.
“네가 투기할 일은 없을 것이다.”
“폐하…….”
“투기 따위 할 시간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하진이 은호의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그의 숨결에 젖은 은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너를 입궁시킬 것이다.”
“폐하…… 그건…….”
하진의 말에 은호의 숨이 멎었다.
입궁.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사내는 그것을 정말 실행에 옮기려는 것이다.
어떤 위험과 압박을 감수하더라도 기어이, 자신을 위해. 그 마음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는 사내의 마음이 은호의 안에 차고 넘쳤다.
그 마음이 저를 뒤덮어 그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았다.
“너는 후궁으로 입궁해서 황후가 될 것이다.”
무슨 자격으로.
하지만 그런 말 따위는 이 사내의 의지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는 걸 은호도 알고 있다.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내다.”
그건 누구보다 은호가 잘 알고 있다.
이 사내는 약속을 지키는 사내다.
데리러 온다고 하면 데리러 오고, 지켜 준다고 하면 지켜 주는 그런 사내다.
이제 이 사내를 더는 의심하지 않는다.
“주은호. 네가 내 황후가 되는 거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쏟아지는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이 은호는 벌써부터 눈에 선하게 보였다.
자신을 기어이 황후로 만들기 위해 이 사내가 짊어져야 할 그 압박감은 또 얼마나 이 사내를 짓누를까.
그 모든 압박감을 등에 지고 이 사내는 자신을 사랑하려는 것이다.
그런 사내의 사랑에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개 숙이고 이 사내의 품에서, 이 사내가 화살을 모두 막아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
그런 것은 싫다.
이제, 그런 것은 싫다.
조금은 용기를 내고 싶다.
이 사내가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손가락질을 감당하고 비난의 시선을 감당하면서까지 자신을 위하는 것처럼 자신도 이제는 이 사내를 위하고 싶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서도, 그 누구를 위해서도 내지 못했던 용기라는 것을 이 사내를 위해서 내고 싶다.
용기를 낸다 한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칼을 쥘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혜로 이 사내를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사내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것이 아닐까.
무거운 압박감에 시달리는 이 사내가 적어도 자신에게서 안식을 얻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용기는 이런 것이다.
이 사내의 사랑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 사내가 자신에게 주는 모든 것들을 부끄럽다고 거절하지 않는 것.
이 사내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이 사내에게 그 사랑을 온전히 돌려주는 것.
그것도 용기가 아닐까.
아니, 그것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용기이고,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몸짓이라면 이제는 더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가야 하는 길이 험난한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손을 이 사내가 잡아 주고 있고, 이 사내의 손을 자신이 잡고 있는 한, 괜찮을 것이다.
함께,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내 곁으로 오는 거다. 이제 곧.”
그 속삭임에 은호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이 사내의 곁으로 간다.
황궁으로.
다시 그곳으로.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