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44화 (44/108)

44.

“형님 폐하는?”

금환궁의 현무전 안으로 들어선 위연이 처소의 주인인 하진은 보이지 않고 대신 홍문만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상궁으로 갔더니 이미 정무가 끝나셔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왔는데, 형님 폐하는 어디 가셨나?”

그런데 홍문의 표정이 영 좋지는 않다.

슬쩍 둘러보니 이루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루는 하진의 그림자라 하진이 가는 곳에 바짝 붙어 있기 때문에 하진이 없으니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 왔는데…….”

위연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즉위한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여전히 황궁에는 온갖 업무가 산재해 있어서 위연도 하진을 느긋하게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태자일 때는 더 많은 시간 더 자유롭게 만났지만 막상 황제가 되자 하진의 얼굴 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붕어한 선황을 생각해 보면, 선황의 경우는 태상궁에서 정무를 보는 시간보다 금환궁에서 후궁들을 끼고 사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을 위연은 기억하고 있다.

선황은 탐욕스러웠지만 정작 정사는 신하들, 그중에서도 승상 주이염과 좌우복야들에게 맡겨 놓곤 했었다.

선황은 어떤 의미에서는 교활했다.

특정한 한 명에게 힘을 실어 주면 그 한 명이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좌복야와 우복야에게 골고루 힘을 실어 주고 승상 주이염으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을 견제하게 했던 것이다.

선황은 사람을 이용할 줄 알았고, 그런 선황의 계책들은 대부분 주이염의 머릿속에서 나왔었다.

주이염은 오랜 시간 선황의 눈이었고 혀였으며 손, 발이었다.

특히 선황의 뱀의 혀 같은 존재였었다.

하지만 그런 주이염이 요즘은 조정에서 조용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위연도 들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에 의하면 딸이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난 일로 인해서 새 젊은 황제의 미움을 사서 그의 힘이 위축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선황이 죽음으로써 그도 이젠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혹은 딸을 살려 주는 것을 대가로 새 황제와 거래를 해서 이제 정치의 중심에서 물러나 퇴거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도 그 속에는 섞여 있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 하진이나 홍문은 알지도 모르겠지만 그 두 사람은 정작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는 것을 위연도 알고 있다.

가끔은 그게 서운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이 하진에게 있어서 그만큼 듬직하지 못하다는 뜻이니.

“형님 폐하께서는 언제 돌아오실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대답하는 홍문의 목소리가 앙칼지다.

‘왜 화가 나 있지?’

홍문이 화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적어도 위연이 아는 한은 그렇다.

홍문은 감정을 아주 잘 숨기는 편이라서 화가 나도 화가 난 티를 내지 않고, 좋은 일이 생겨도 기쁜 티를 내지 않는다.

사람들이 괜히 홍문을 가리켜

‘가면을 쓰고 다닌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감정을 잘 감추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데, 지금의 홍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얼굴에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형님께서 안 계시니 꿩 대신 닭이라고, 내가 고민이 있는데 말이다.”

“제가 전하의 고민이나 들어 주는 사람입니까?”

홍문이 쏘아붙이는 말에 위연이 입을 쑥 다물었다.

“제가 조정의 녹을 먹는 관리가 아니라고 해서 할 일도 없이 노닥거리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냐는 겁니다.”

그런 말은 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다.

그냥 홍문이 괜히 예민한 것이다.

‘뭐지? 왜 저렇게 예민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홍문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 화를 내지?

‘관리가 못 된 것이 내 탓인가? 그건 관직에 임명을 해 주지 않은 형님 탓을 해야지. 그런데 왜 홍문은 관직을 받지 않았지?’

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문은 학동 출신이다.

학동이라 함은 태자를 비롯한 어린 왕자들이 교육을 받는 도감원에서 태자와 왕자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소년들을 가리킨다.

모든 왕자들에게는 한 명의 학동이 배정된다.

학동들의 역할은 왕자의 학업 능력을 높이는 것으로 왕자들이 모르는 것을 옆에서 알려 주고 보다 쉽게 배울 수 있게 지도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왕자들이 제대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벌을 받을 일이 생기면 그 벌은 모두 학동들에게 내려졌다.

감히 왕자의 몸에 회초리를 댈 수 없으니 학동이 그 회초리를 대신 맞는 것이다.

홍문은 그런 학동 출신이다.

하진의 학동으로 하진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하진과의 유대감이 더 깊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홍문을 왜 하진은 관직에 앉히지 않은 것일까?

태자 시절에는 관직을 주는 것이 황제의 권한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의 하진은 황제다.

마음만 먹으면 홍문 정도는 관직에 충분히 임명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홍문은 모두가 인정하는 하진의 책사다.

최측근이다.

그런 홍문이 왜 아직까지 정식 관직을 받지 않고 여전히 책사라는 비공식적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리고, 현무전이 전하께서 사사로이 드나들어도 되는 곳입니까? 금환궁은 황제 폐하의 침궁이고 현무전은 그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내전인데 친왕께서 어찌 이렇게 마음대로 드나드시는 겁니까?”

화살이 자신을 향하자 위연이 헉, 하고 뒤로 물러났다.

“아, 안 되는 건가? 이제는 형님 폐하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올 수 있는 것이냐? 나, 나는 몰랐다. 나는 정말 몰랐다.”

“몰랐으면 지금이라도 아십시오.”

홍문이 눈을 흘겼다.

그 흘기는 시선에 겁을 먹은 위연이 얼른 현무전에서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온 위연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층계를 내려가다 문득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런 은밀한 내전에 왜 홍문이 있는 것이지?”

아니, 자신은 안 되고 홍문은 되는 건가?

이건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지만, 홍문 앞에 서면, 아니 홍문의 말을 들으면 그때는 홍문의 말이 다 맞는 것처럼 들린다.

이것이 진정 말발이라는 것일까?

*

“하아…….”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서 위연을 내쫓은 홍문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위연을 내쫓은 것은 순전히 화풀이다.

위연이 화풀이 대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만한 것이 위연밖에 없고 지금 딱 위연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위연을 상대로 잔뜩 퍼부어 버렸다.

진짜 홍문을 화나게 만든 것은 위연이 아니라 하진이다.

“자기 행동에 대한 자각이라는 것이 있는 분이신가?”

물론 하진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 하진을 제 손에 쥐고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잘 이끌어왔다고 생각했다.

하진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어긋난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하지만 그때마다 고비를 잘 넘겨왔고, 어지간한 것은 하진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고집을 꺾어 줬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렇게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하진이 기어이 그곳에 갔다.

“고작 며칠을 참지 못하시고.”

위연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진은 지금 강인사에 갔을 것이다.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렸었다.

강인사는 여승들이 사는 곳이다.

그곳에는 어린 동자승들도 전부 여자 아이들이다.

황제의 사후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이라 엄격하게 관리되는 곳이기도 했다.

일명 금남의 구역이다.

그런 곳에 숨어들었다가 들키면 그 망신을 어쩌자고 그러는 걸까.

“하긴, 망신을 망신으로 아는 분이 아니시니.”

홍문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게, 내 말대로 주은호를 죽은 걸로 꾸몄으면 지금쯤 후궁에 들여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것을 왜 굳이 고집을 부리셔서…….”

원래 계획대로 갔으면 이런 일도 없었다.

예정대로 주은호가 죽은 것으로 하고, 주은호를 다른 귀족의 양녀로 만들어 하진의 후궁으로 들여보냈으면 이런 문제는 없었다.

이미 양녀 입적을 할 시골 귀족도 알아봐 놓은 상태다.

그런데 그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이 하진이다.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 주은호를 죽은 것으로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태후로도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죽은 것으로 만들지 않고, 살인자로도 만들지 않고, 태후로도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주은호를 기어이 제 여인으로 만들겠다는 하진의 생각은 뻔하다.

“패륜이지, 그건.”

지금 하진이 하고자 하는 것은 패륜이다.

하진이 속에 있는 생각을 조정 대신들에게 꺼내는 순간 모든 이들이

‘불가’

를 외칠 것이다.

귀족들은

‘패륜’

이라고 앞을 다퉈 고해 올릴 것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절차상 문제가 없게, 사람들이 패륜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하고도 주은호를 어련히 알아서 입궁시킬 텐데, 나를 못 믿으시는 건지, 아니면 지금 내 인내심을 시험하시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발정이라도 난 것인지.”

주은호가 문제다, 주은호가.

주은호가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하진이 문제인 것인지.

아니면 불이 기름을 만나 미친 듯이 타오르듯 하진이 주은호를 만난 것이 문제인지.

아마 그것이 문제일 것이다.

불이, 기름을 만나 버렸으니 불길이 타오르는 것이다.

어떻게 누를 수가 없는 그런 불길이 말이다.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한숨에 한숨을 더해서 홍문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면서 조금 후회했다.

위연에게 괜히 심한 말을 하고 짜증을 부린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고민이 뭐였을까?’

내일 정도에 물어볼까?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

“아! 하윽!”

새하얀 목을 물어뜯는 단단한 이에 은호가 비명을 지르다 말고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아직 해가 남아 있다.

이곳은 조용한 경내다.

이 조용한 산사에서는 시끄러울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자신의 교성이 새어 나가면 지금 이곳에 사내가 있다는 것을 들켜 버린다.

그것도 보통 사내가 아니라 황제다.

황제가 이곳에서 지금 자신의 음란한 정사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 비난과 손가락질을 어찌할까.

“흐읍……!”

손으로 입을 막은 채로 은호가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여린 목줄기에 이를 박아 넣은 사내가 그녀의 깊숙한 안쪽에 양물을 박아 놓고는 사정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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