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저나 다른 후궁들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이런 산중에 갇혀 살아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지만 이제 막 피어나는 마마를 볼 때마다 제 마음이 너무 먹먹합니다. 이제 갓 피어나기 시작하는 꽃 같은 마마께서는 이런 곳에 갇혀 계시면 안 되는데 하고 말입니다.”
강비의 말에 은호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갇힌 신세야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마마는 바깥세상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저는 아들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이런 과자 말고 아들의 얼굴을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저도 아버님을 뵙고 싶어요. 안색도 좋지 않으셨는데…….”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강비의 말에 은호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무척이나 여위어 있던 부친의 얼굴을 떠올렸다.
“보고 싶은 분이 아버님밖에 없으신가요?”
넌지시 떠보는 강비의 목소리에 은호의 가슴이 뜨끔거렸다.
실은, 보고 싶은 사람이 또 있다.
하진이, 그 사내가 보고 싶었지만 그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 같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자신이 이 사찰에 들어온 순간부터 하진과의 인연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진은 자신을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그런 것은 가능하지 않다.
“마마. 젊음은 한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랍니다. 계절에 비유한다면 젊음은 여름과도 같아서 가장 아름다운 날은 순식간에 지나가지요.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런 것이랍니다. 저는 열여덟 살에 선황 폐하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지만 승은은 하룻밤에 지나지 않아서 제 여름날은 고작 하루로 끝이 나 버렸답니다.”
강비가 처마에서 울리는 은은한 풍경 소리에 가끔 귀를 기울여 가며 조용조용한 목소리를 이어 갔다.
위연을 낳은 여인이지만 위연과는 모든 것이 다른 여인이라고 은호는 생각했다.
위연은 시끄러울뿐더러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나고 개구쟁이 소년처럼 행동했지만 강비는 상냥한 반면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는 일생을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았답니다. 언젠가는 폐하께서 저를 기억하실 날이 있겠지 하고 살아왔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만약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저는 그렇게는 살지 않을 겁니다. 황궁의 높은 담을 넘어서 밖으로 달아나 새처럼 훨훨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지도 모르겠어요. 아직 젊을 때 다른 사내를 만나 불같은 사랑도 해 보고…… 다정한 품에 안겨 뜨거운 사랑도 받아 보고…….”
강비가 은호를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늙은이의 주책이랍니다.”
“아직도 아름다우세요.”
“어머나. 그런 말씀을 해 주시다니…….”
생긋 웃으며 강비가 은호의 손목을 살며시 잡아끌었다.
“마마. 과자와 함께 위연이 비단과 노리개도 보내왔답니다. 그 아이도 우스운 것이 이런 사찰에서 비단 옷을 입을 일이 뭐고 노리개를 찰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런 것을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늙은 제가 입기에는 너무 화려한 색의 비단이라 마마께서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마마께 드리고 싶으니 저와 함께 가세요.”
“아니,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마마. 제 성의를 거절하지 마세요.”
강비의 온화한 웃음에 은호가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넓은 사찰에 후궁들의 처소는 모두 각각 떨어져 있어 보통은 한 처소를 두 명의 후궁이 사용했지만 황제의 아들을 낳은 후궁의 경우에는 혼자 처소를 사용할 수가 있었다.
선황과의 혼인 자체가 무효가 되어 버린 은호의 경우는 조 미인이라는 후궁과 같은 처소를 사용하고 있다.
조 미인은 선황의 후궁이지만 승은은 하룻밤에 끝났고 자식도 낳지 못해서 그저 후궁의 첩지만 받았을 뿐 가문도 한미하고 존재감도 미미한 여인이었다.
강비의 손에 이끌려 은호가 결국에는 그녀의 처소까지 발걸음을 했다.
강비의 처소는 은호가 조 미인과 함께 사용하는 처소보다 두 배는 더 넓었다.
그리고 처소 안에는 온갖 선물이 담긴 궤짝들이 쌓여 있었다.
“자, 자. 들어오세요.”
은호를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강비가 작은 상자를 꺼내 그 안에 담긴 노리개를 은호에게 보여 주었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으면 전부 가지세요.”
“예쁜 것들이지만…….”
은호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노리개는 전부 고운 것들이지만 이런 산중에서 이렇게 화려한 노리개를 차고 다닐 일은 없다.
지금 은호는 수수한 차림새를 하고 있고 그것이 옳다고 여기고 있었다.
짙은 분화장도, 화려한 비단옷도, 값비싼 노리개도 이런 곳에서는 필요가 없다.
그렇게 치장을 하고 누구에게 보여 준단 말인가.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상대는 여기에 없는데.
곱게 차려입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상대가 있다.
그의 눈에 자신이 아름답게 보였으면, 하는 사내가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없다.
상자 안의 노리개를 보자 은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짧았던 황궁에서의 시간들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지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며칠밖에 되지 않았던 시간들이다.
그런데 이제 그 시간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고, 가장 뜨거웠으며,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 되었다.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 되어 버렸다.
다시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무서웠고 위태로운 시간들이었지만, 그럴지라도 뜨겁고 행복했던 시간이기도 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나날이다.
“동자승에게 부탁해서 차라도 준비해 달라 하고 오겠으니 마마는 천천히 보고 계세요.”
강비가 자리를 피해 줬다.
자신의 눈에 눈물이 고인 탓에 어색해진 강비가 자리를 피한 것이라고 은호가 생각했다.
강비는 자신과는 달리 황궁에서 오래 살아 눈치가 빠르니 아마 지금 자신이 서글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울면 안 되는데…….’
여기서 울어 버리면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했던 강비에게 미안해진다.
울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어쩔 수 없이 눈가로 스며 나오는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닦아 낼 때였다.
끼익―
밖으로 나갔던 강비가 그새 돌아왔는지 문이 열렸다.
서둘러 눈물을 닦은 은호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는 노리개는 필요 없을…….”
고개를 드는 순간 은호가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대로 멈춰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산중에서 길을 잃어버려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산중의 여우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어째서 저 사내가 지금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일까.
“길을 잃었는데 잠시 들어가도 되는 것이냐?”
저를 향해 웃고 있는 사내가 꿈인지 헛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 은호는 그 사내의 물음에 대답도 못 했다.
“주은호.”
사내가 제 이름을 불렀어도 은호는 아직 이게 실제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너무 그리워해서, 너무 보고 싶어 했던 나머지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모른다.
변덕스러운 바람이 그리운 사내의 모습을 바람결에 실어 와서 잠시 동안 보여 주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냐. 너무 늦게 와서 화가 난 것이냐?”
사내의 손이 아직 젖어 있는 제 눈가에 닿는 순간, 은호는 이것이 꿈도, 헛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 눈가에 와 닿는 이 온기는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정말 그 사내였다.
하진의 손길이었다.
하진의 목소리였고, 그의 미소였다.
그가 지금 제 앞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젖은 눈가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그녀의 목을 끌어당기며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나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삼키고 뜨거운 혀가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밀려 들어왔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뜨겁게 저를 탐하는 입술에 은호가 눈을 감고 저를 엉망으로 휘젓는 혀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치열을 훑은 혀가 입천장을 휘젓고 그녀의 혀를 휘감았다.
끊어 버릴 것처럼 세차게 빨아 올리며 숨결까지 삼켜 버렸다.
제 입 안을 가득 채운 사내의 숨결, 사내의 타액에 은호가 숨을 헐떡였다.
그보다 더 세차게 뛰는 것은 그녀의 심장이었다.
등을 꽉 누르고 있는 사내의 손이 저를 태워 버릴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점점 더 깊숙하게 입술을 맞물려 오는 사내의 지독한 입맞춤에 은호의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다.
이대로 이 사내에게 삼켜진 채로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별이 없이 이대로, 이 사내와 입을 맞추며 죽음이 찾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지독한 열기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그 허전함을 자신은 견딜 수 있을까.
“하아…… 하아…….”
마침내 사내가 입술을 놓아주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은호가 숨을 헐떡이며 그를 바라봤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나운 짐승의 눈동자가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전부 담고 있었다.
“폐, 폐하…….”
“내가 보고 싶었다고 말하거라.”
“폐하, 저는…….”
“내가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고 말하거라.”
사내의 이마가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사내에게 떠밀려 뒤로 물러나던 은호의 몸이 벽에 부딪쳤다.
더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겨우 숨만 헐떡이고 있는 은호의 입술에 다시 사내가 입술을 포갰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조금 덜 사납고, 조금 덜 거친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길게, 그리고 조금 더 다정하게 스며드는 입맞춤에 은호가 손을 들어 사내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가 어깨를 붙잡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사내가 그녀를 쓰러뜨렸다.
찰그랑―
상자 안에서 노리개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쓰러뜨린 은호의 위에 올라탄 채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사내의 손이 제 허벅지에 닿는 순간, 은호가 강비를 떠올렸다.
‘일부러…….’
그녀는 전부 알고 일부러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것이다.
조 미인과 함께 쓰는 방으로 이 사내를 들일 수 없어서 그녀 자신의 방으로 자신을 데려온 것이다.
그녀는 위연의 생모이고, 위연은 이 사내의 측근이었다.
모든 것은 이 사내가 꾸민 것이리라.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