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딸랑― 딸랑―
바람이 불자 처마에 매달아 둔 풍경이 맑은 소리를 울렸다.
조용한 산중에 바람이 불 때면 항상 이렇게 풍경은 맑은 소리로 울었다.
은호는 이 산중의 조용함을 좋아한다.
물론 이곳이 항상 조용한 것은 아니다.
“아이고…… 아이고…….”
어린 동자승이 안절부절못하고 달려가는 것이 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확인하지 않아도 조비와 강 귀인이 또 다툼을 시작했을 것이다.
조비와 강 귀인은 거의 앙숙이라 얼굴만 마주치면 그때부터 싸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들이 싸우더라도 그건 은호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녀들 역시 은호에게는 관심이 없다.
이 산중의 사찰에서 은호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강비가 유일하다.
“마마.”
처마 아래에 앉아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를 바라보고 있던 은호에게 다가온 것은 강비였다.
강비는 황자 위연을 낳은 선황의 후궁이다.
이 사찰에 들어온 이후 은호를 가장 많이 도와준 여인이기도 했다.
은호는 사찰에 들어오기 전에는 강비를 만난 적이 없었다.
강비의 소생인 황자 위연과는 제법 친하게 지냈지만 정작 그 어미인 강비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이곳에 들어온 후에야 강비를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묘한 것이다.
이곳은 강인사라는 사찰이다.
역대 황제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기도 하고, 동시에 황제의 사후 출궁한 후궁들이 들어오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일종의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아서 한번 이곳에 들어오면 살아서는 나가지 못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강비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낫다고 말했었다.
예전에는 황제의 사후 황후를 제외한 후궁들은 전부 죽은 황제와 함께 순장을 당했다고 했다.
순장.
말 그대로 살아 있는 후궁들을 황제의 무덤에 함께 파묻는 것이다.
말이 좋아 순장이지 생매장이나 다름없다.
몇 대 전만 하더라도 그런 순장이 공공연히 행해졌지만 그 악습은 다행히 4대 전의 황제 때 사라졌다고 한다.
은호는 알지도 못했던 관행이었다.
순장 대신 황제의 사후 후궁들의 거취는 사찰로 정해졌고, 사찰에서 평생을 죽은 황제를 기리며 살아가게 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물론 그 법에서 황후는 제외였다.
황후는 태후로서 황궁의 어른으로 남아 있을 수가 있고, 후궁들 중에서도 황후가 지명한 경우에 한해서는 황궁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를 쓰고 황후가 되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 황후가 되지 못하여 황후의 눈에 들어 어떻게 해서든 사찰로 오지 않고 황제의 사후에도 황궁에 남아 있으려는 후궁들이 많았다.
황궁에서 후궁들이 황후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쓰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이 사찰은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들어올 수가 없다.
황명이 아니고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의 후궁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도 없었다.
유일하게, 죽어야만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화비의 난’
이후 은호는 이 사찰로 보내졌다, 다른 후궁들과 함께.
후궁이 아닌 황후의 신분이었던 은호가 황궁에 남지 못하고 사찰로 보내진 이유는 무척이나 특별했다.
한 달 전에 황궁에서는 시끄러운 의견 다툼이 있었다.
바로 황후 주은호를 황후로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한 문제였다.
은호는 정식으로 황후로 책봉을 받았고 황제와 초야도 치렀다.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아무런 흠이 없는 황후였다.
그러나 반기는 좌복야 쪽에서 들었다.
좌복야를 따르는 이들은 주은호가 황제와 동침했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며 혼인의 무효를 주장했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혼인의 무효.
조정은 여러 가지 문제를 두고 담론을 펼쳐야만 했다.
첫 번째로 동침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인이 무효화될 수 있는가.
두 번째로 동침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인이 무효화된다면 황후 주은호는 다시 처녀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세 번째로 동침의 여부를 무엇으로 확인하는가.
이 세 가지 문제로 조정은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목소리를 높여 대립각을 세우는 이들로 시끄러웠다.
물론 주은호의 부친인 승상 주이염은 당연히 자신의 딸이 황후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내세웠다.
조정은 주이염을 따르는 승상파와 허연을 따르는 좌복야의 세력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주이염의 세력이 우세했었다.
황제와 황후의 동침의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고, 정식으로 책봉식을 거쳤으니 마땅히 황후로서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지어질 찰나, 젊은 새 황제가 좌복야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그건 누구도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
젊은 황제는 좌복야의 손을 들어 주며 선황의 황후가 자격이 없다고 선포했다.
초야 당시 침전의 당직을 선 상궁들을 증인으로 불러들여 황제와 황후가 동침을 했느냐고 묻는 질문에 상궁들은 교합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고, 교합하기 전에 서북의 반란으로 황제가 침전을 나섰다는 증언이 곁들여졌다.
그것이 명백한 증거가 되어 주은호는 황제와 동침한 적이 없는 처녀로 판명되었고, 실질적인 동침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사실혼이 인정되지 않으며, 그로 인해 황후의 자격을 박탈한다는 최후 결론이 내려졌다.
끝까지 그 판결에 승복하지 않던 주이염이 결국 그것을 받아들인 것은 그가 젊은 황제의 책사와 짧은 만남을 가진 후였다.
황제의 책사와 주이염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직후 주이염은 승복의 의사를 표현했다.
다만 황후의 자리를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이미 입궁을 하였으니 출궁하여 다시 처녀의 신분으로 돌아가 다른 사내의 아내가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주은호에게는 후궁의 신분이 내려졌다.
황후로 입궁했지만 후궁으로 출궁하여 동침도 하지 않은 황제를 위해 평생을 사찰에 갇혀 죽은 황제의 명복을 비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너를 살리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미안하다, 아비가 너를 구해 주지 못해서.]
사찰로 들어오기 전 겨우 만날 수 있었던 부친은 은호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살리려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은호도 알고 있다.
하진이 왜 자신을 굳이 황후의 자리에서 내려가게 한 것인지도 알고 있다.
부친도, 하진도 자신을 살리려고 그런 것이다.
황제가 죽던 그곳에 자신도 함께 있었다.
비록 황제를 죽인 것이 화비로 드러나며 황제 시해의 죄는 화비가 전부 뒤집어썼지만 자신도 황제를 찔렀었다.
황제의 목과 가슴을 찌른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검이고, 그것을 준 이는 하진이다.
화비가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다.
황제가 죽던 그 자리에 자신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이 있다.
병사들, 내관들, 상궁들까지.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입을 열면 의심의 화살은 자신에게로 오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친은 그런 말을 한 것이리라.
‘너를 살리려면.’
황후로 남아 있으면 황궁 안에서 권력을 얻으려는 자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황궁에서 나오게 만들어 이런 곳에서라도 누구의 표적도 되지 않고, 어떤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리라.
그것이 아비의 마음이리라.
‘아버님…… 얼굴이 많이 상하셨던데…….’
마지막으로 본 부친의 얼굴은 부쩍 늙고 부쩍 여위었었다.
그것이 다 못난 딸 걱정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에 은호의 마음이 무겁다.
이제 자신은 여기서 나갈 수 없으니 누가 늙은 부친을 보살펴 줄까.
[너를 그곳에 오래 두지 않을 것이다. 곧 데리러 가마.]
하진은 그렇게 말했었다.
곧 데리러 온다고.
무슨 수로 자신을 데리러 온다 말한 것일까.
은호는 욕심이 없다.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도 바라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부친의 건강과 하진의 안위뿐이다.
아직 황궁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하진이 무사하기를 바라고 있다.
황궁은 무서운 곳이다.
황제도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
죽이기 위해 독을 쓰는 것이 난무하고, 언제 누가 등에 비수를 꽂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그렇게 무서운 곳에 지금 하진은 남아 있다.
물론 그는 강한 사내이니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은호는 그가 걱정이다.
머잖아 새 황제가 황후를 맞이했다는 소문이 이곳 사찰에까지 바람결에 흘러 들어올 것이다.
[우복야가 제 딸을 황후로 삼으려고 난리라던데.]
[우복야뿐이겠어? 딸 없는 자들은 양녀라도 들여서 제 딸을 기어이 황후로 만들려고 하겠지. 황후가 안 되면 후궁으로 밀어 넣든가.]
[젊고 혈기 왕성한 황제가 황궁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제 어린 궁녀들이 여우짓을 하겠구나.]
조비와 강 귀인이 주고받던 말을 은호도 들은 적이 있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하진은 젊다.
그러니 당연히 황후를 맞이해야 하고, 후궁들도 들여야 한다.
그 사내가 다른 여인의 사내가 되는 것이다.
저를 향하던 시선이 이제 다른 여인을 향하고, 저를 안던 그 손이 다른 여인을 안게 된다.
당연한 것인데, 생각하면 서러워지는 것은 왜일까.
자신의 안에 이런 질투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이렇게 질투심이 심한 여인일 줄은 정말 몰랐다.
그 사내의 옆에 다른 여인이 서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자신은 그 사내를 좋아한 것이다.
“마마.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위연이 보낸 것이랍니다.”
은호에게 다가온 강비가 과자 상자를 은호에게 내밀었다.
외부인은 들어올 수 없어도 외부에서 보내는 선물은 들여올 수가 있다.
그런 이유로 자식을 둔 후궁들은 이런 선물을 종종 받았다.
물론 은호도 부친이 보내 주는 것들이 쌓여 있다.
전부 쓸 일이 없어서 결국은 사찰의 동자들에게 나눠 주고 말지만 말이다.
“고마워요.”
강비가 내미는 과자를 받아 든 은호가 살며시 웃었다.
그런 은호를 보며 강비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런, 기묘한 미소였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