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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41화 (41/108)

41.

“퍽 오래 잔 것을 아느냐?”

다정한 목소리에 은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귀와 눈을 닫았다 열어도 그 사내가 분명했다.

‘무사하셨구나…….’

하진이 무사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은호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울고 싶지 않은데 눈물이 차올랐다.

생각해 보면 항상 운 것 같아서, 이제 더는 울기 싫지만 저절로 차오르는 눈물을 어찌할까.

“자고 일어나더니 우는 것이냐? 서러운 꿈이라도 꾼 것이냐.”

서러운 꿈.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저 서러운 꿈에 불과했다면.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은호도 안다.

“더 자두어라. 이제 힘들 나날이 이어질 거다.”

힘든 나날.

‘역시 폐하는 돌아가셨을까…….’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황제를 죽였고, 그로 인해 일어날

‘힘든 나날’

을 지금 하진은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은호가 눈을 감았다.

‘됐어…… 이분을 구했으니까 됐어…….’

은호의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마에 따뜻한 입술이 닿았기 때문이다.

하진의 입술이 은호의 이마에 닿아 잠시 동안 머물러 있더니 천천히 미끄러졌다.

콧날을 따라 미끄러진 입술이 그녀의 코끝에서 입술로 내려앉았다.

은호의 윗입술을 살며시 머금었던 하진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지그시 누른 입술이 다시 옆으로 옮아가며 그녀의 뺨과 귓불을 지나 다시 이마에 머물렀다.

단단한 두 팔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그 옷깃이 저를 감싸는 것을 느끼며 은호가 사내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 심장의 소리가 전해졌다.

제 심장의 소리와 사내의 심장 소리가 뒤섞여서 어느 것이 제 것인지, 어느 것이 사내의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 심장이나 사내의 심장이나 동일하게 뛰고 있다는 것이다.

제가 놀란 것처럼 사내도 놀랐고, 제가 안도한 것처럼 사내도 안도하고, 제가 두근거리는 것처럼 사내도 두근거리고.

자신들의 심장이 함께 뛰고 있다는 사실에 은호의 뺨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황제를 시해했다는 죄명으로 이제 목이 달아난다 하더라도 이 심장의 느낌은 가지고 죽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다만 걱정인 것은 이 사내가 너무 오래도록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다.

저가 죽으면 빨리 잊어야 이 사내에게는 편할 것이다.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만 죽은 이를 잊어야 산 자가 살아가는 법.

은호는 부친이 간혹 홀로 앉아 무거운 한숨을 쉬는 것을 종종 본 기억이 있다.

어머니가 생전에 사용하신 방에 홀로 앉아 무거운 한숨을 쉬는 부친의 외로운 등을 기억하고 있다.

죽은 자를 잊지 못하면 산 자는 괴로운 법이다.

하진이 자신의 부친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잊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기를 바라지만, 그 바람은 가슴이 아프다.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하진.

다른 여인을 이렇게 품에 안고 다정하게 위로해 주는 하진.

그런 것은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제 마음이 아파도 하진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 마음은, 역시 사랑인 것이다.

“나는 널 포기하지 않을 거다. 너는 나만 믿고, 나만 보면 된다.”

“전하…….”

은호는 지금 하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포기하지 않는다니.

이건 무슨 뜻일까?

“전하, 저는…….”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건 너를 지키기 위한 일이라는 걸 명심하거라. 흔들리지 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내가 너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기억하거라.”

“전하.”

사내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흔들렸다.

그건 자신의 신변에 무서운 일이 닥칠 것이라는 경고와 비슷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을까.

아니면 자신을 살리기 위해 이 사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전하, 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황제가 죽었다.”

하진의 목소리에 은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하진의 입으로 전해 듣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진의 가슴에 얹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자신이 죽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끔찍한 얼굴, 그리고 선명한 붉은 피가 기억나 은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범인은 화비다.”

“전하?!”

화비?

화비가 황제를 죽였다고?

아니다.

황제를 찌른 것은 자신이다. 화비가 아니다.

지금 하진은 황제를 시해한 죄를 화비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것일까.

“전하, 폐하를 죽인 것은…….”

“네가 죽인 것이 아니다. 화비가 죽였고, 이미 자백을 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런 것이 아니라…….”

“너도 죄가 없다 할 수 없겠지만.”

하진이 몸을 비틀었다.

그 바람에 그의 아래에 깔린 은호의 얼굴 옆으로 그의 팔이 내려앉았다.

그의 팔에 갇힌 채 발갛게 상기된 은호의 얼굴 위로 사내의 더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그녀의 바로 위로 얼굴을 내린 하진이 낮고 묵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죽인 것은 화비다. 내가 네게 준 칼은 칼날이 작아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냐?”

“그런…….”

“시도는 가상했지만, 네 칼이 황제를 죽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가 죽을 뻔했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이냐. 무모하게, 그런 짓을 하다니.”

무모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하진의 눈이 설핏 웃었다.

“나 때문에 용기를 냈다는 것을 안다.”

그 손이 은호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독하지 못한 것이 나 때문에 독한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안다. 그래 봤자 독해지지도 못할 것이.”

독해지지도 못할 것이.

그 말에 은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 사내는 자신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

자신이 몰랐던 부분까지 이 사내는 전부 알고 있다.

그만큼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 사내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알고 싶은 것이 많지만, 아는 것이 없다.

알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랑하게 되었으니 이 사랑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빠져 버리는 것은, 이것 역시도 사랑이기 때문이리라.

자신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고 욕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사랑이다.

자신의 안에서 꽃이 폈다.

하진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어이 꽃을 피웠다.

비록 금단의 꽃이라 하더라도, 이 꽃은 피어 버렸다.

“데리러 가마.”

그녀를 끌어안고 하진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속삭였다.

“반드시 데리러 가마.”

데리러 온다.

어디로?

대체 자신을 어디로 보낼 것이며, 어디로 데리러 온다는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혼란 속에서 은호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저를 끌어안은 사내의 뜨거운 가슴과 세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뿐이었다.

그리고 은호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내의 말을 믿는 것뿐이었다.

“네…….”

아주 작게 대답하며 은호가 저를 안은 사내의 등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제 손으로 다 끌어안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은 등이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내의 등이었다.

*

황궁에서 일어난 변고는

‘화비의 난’

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황제의 후궁 화비 은고가 황제를 독살하기 위해 옹주로 보낸 자객이 황제의 술잔에 독을 탔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화비가 직접 황제의 목에 칼날을 꽂아 살해한 사건이다.

화비 은고가 황제를 시해한 목적은, 첫 번째는 황제를 독살하여 그 아들 진원에게 황제의 자리를 주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아들 진원이 황제가 먹어야 할 독을 먹고 죽음에 이르자 그 원한을 갚기 위해 직접 황제를 살해했다고 스스로 자백을 했다.

화비 은고는 황제의 시해 현장에서 붙잡혔고 회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다.

황제를 살해한 화비 은고는 목이 잘려 죽는 참형에 처해졌다.

다만 이 천인공노할 사건이 아들을 잃은 화비의 단독으로 이루어진 우발적인 짓이라는 것을 참작하여 화비의 친정 가문인 좌복야 허연은 그 관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그 이면에는 아무도 모르는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

[네 가문을 살려 줄 것이니 모든 죄는 네가 뒤집어쓰고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하진이 화비에게 내건 조건이다.

황제의 죽음에 은호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서 내건 조건이기도 했다.

화비의 입에서

‘황제를 죽일 때 이미 황후가 황제를 찌른 직후였다’

는 말이 나오기라도 하면 은호 역시 그 죄에서 자유롭기는 힘들었다.

그런 까닭에 화비와 거래를 한 것이다.

물론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좌복야 허연은 아직 조정에 남아 있어야 했다.

좌복야 허연을 화비의 죄와 함께 추락시키면 새로 부상하고 있는 우복야의 세력을 견제할 길이 없다.

승상 주이염이 있지만 주이염은 더더욱 믿을 수 없는 상대다.

주은호와 주이염은 별개다.

적어도 하진에게는 그랬다.

주이염은 화비와도 손을 잡았고 언제든지 저를 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럴 수 있는 명망도 가지고 있고 세력도 가지고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지금의 조정에는 견제 세력들이 필요하다.

우복야, 좌복야, 그리고 승상 주이염.

누구 하나 이 팽팽한 기 싸움에서 물러나게 해서는 안 된다.

저들끼리 싸움을 붙이고 하진은 그 위에서 제 자리를 굳힐 생각이었다.

그리고 제 자리가 견고해지면, 그때는 세 마리의 투견들을 전부 잡아 죽여도 늦지 않다.

그런 정치적인 계산 속에서 화비 은고는 가문을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황제를 제가 죽였다 시인함으로써 목이 잘려 죽었다.

아들을 잃은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화비전의 궁녀는 말했었다.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가 보낸 독을 제 아들이 마시고 죽었다는 것을 아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독을 보낸 저 자신도, 독을 마시지 않은 황제도, 아마 전부 용서할 수 없어서 황제를 죽였고, 그리고 스스로도 죽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물론 그 진심을 아는 이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지만.

화비 은고가 참형에 처해진 날로부터 사흘 뒤, 태자 하진이 옥좌에 올랐다.

혼란한 시기, 더는 옥좌를 비워 둘 수 없다는 조정 대신들의 주청에 옥좌에 오르고 새 황제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새 황제의 즉위에는 반드시 따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선황의 후궁들의 출궁이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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