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폐하, 목이 달아날 것을 각오하고 한 말씀만 더 올리겠습니다.”
여전히 물러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홍문을 보며 하진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집을 부리는 것이냐?”
“제가 고집이 센 놈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어차피 제 고집이 이런 것을 알면서도 곁에 두신 분이 폐하이시니 저는 기어이 고집을 부려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그게 싫으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제 목을 치시면 됩니다.”
홍문의 얼굴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런 성격이다.
그래서 곁에 둔 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고집이 세고 교활하지만 머리가 좋고 주인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는 그 능력을 높이 샀다.
“폐하. 폐하께서는 황후마마께서 행여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염려하시는 것이겠지만, 폐하. 마마는 이미 충분히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마마를 상처 입히신 분은 다름 아닌 폐하이십니다.”
“네가 정말 죽고 싶은 것이 분명하구나.”
“아시잖습니까? 마마께서 얼마나 심약하신 분인지. 그런 분을 폐하께서 처음에 어떻게 대하셨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그리고 입궁하신 마마께는 또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설마 그런 것들이 전혀 상처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셨던 것입니까?”
홍문의 말에 하진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은호에게 강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하진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몸에 배여 자연스레 그렇게 나오는 것을 어찌하란 말인가.
이제 와서 다정한 흉내를 내는 것은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은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행동 역시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한 것 역시 사실이다.
과정이야 거칠었다 하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것이 하진이 살아온 방식이다.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을 추구하는 것.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무자비해질 수 있고, 무자비해져야만 하고, 그런 것들은 나중에 결과로 보상받을 수 있다 그렇게 여겨 왔다.
나중에 더 사랑해 주면 상처도 사라질 거라고, 그렇게 합리화를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방식을 지금 홍문은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이미 상처를 줄 만큼 줘 놓고 이제 와서 상처를 입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냐고 비난하고 있다.
“상처 입힐 마음이 없으셨다면, 처음부터 상처를 주지 말았어야지요. 이미 상처를 입할 만큼 입혀 놓고 이제 와서 상처를 입히기 싫다는 말로 회피하시려는 것이 아니라면, 폐하. 지금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해야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 그것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페하, 지금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판단하셔야 합니다.”
홍문의 말을 듣는 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미 은호는 상처를 입었다.
홍문의 말처럼 가장 먼저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다.
황제가 준 상처보다 자신이 준 상처가 더 지독할 수도 있다.
인정한다.
그리고 지금 선택을 해야 한다.
조금만 더 가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그녀가 조금만 더 상처를 견뎌 주기를 바라며 그녀에게 가해질 충격을 외면하는 것.
아니면 여기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일체의 상처를 멈추는 것.
홍문의 제안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는 건 하진도 알고 있다.
황제를 죽였다는 죄를 은호가 떠안아 주면 자신의 즉위에 걸림돌이 없다는 것을 하진도 모르지는 않는다.
자신이 옥좌에 오르는 길이 평탄하려면 은호가 황제를 죽였다는 죄를 떠안아야 하고, 그 죄를 안고 은호는 죽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쉬운 일이다.
홍문의 말대로 처음부터 은호는 죽은 사람으로 위장하려고 했었다.
거기에 예상하지 못한 일, 즉 황제 시해라는 죄만 더해지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홍문이 바라는 대로 하라고 하면 된다.
하진이 제 품에 축 늘어진 은호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이 가녀린 손으로 황제를 찔렀다.
울보인 여자다.
심약해서 쉽게 혼절하고 도무지 타인을 미워하지 못하는 여자다.
그런 여자가 사람을 찔렀다.
죽이기 위해 찔렀을 것이다.
하지만 찌른다고 사람이 죽는 건 아니다.
목이든 가슴이든 어디든 찌른다고 해서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긴 칼로 베었으면 모를까, 날이 짧은 단검으로는 어지간한 힘이 아니면 사람을 죽일 수 없다.
은호의 손으로 황제를 몇 번 찔렀다고 해도 그것으로 황제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를 죽인 것은 또 다른 인물이다.
뒷목의 상처, 그것이 진짜 사인이다.
앞의 상처들은 얕고 뒤의 상처는 깊다.
은호가 죽인 것이 아니지만, 은호가 죽인 것이 되어야 모든 것이 순탄하다.
피 묻은 손.
손에 묻은 피는 씻으면 지워지겠지만, 마음에 묻은 피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하진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다.
마음에 묻은 피는, 쉬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래 흔적처럼 남아, 때로는 낙인처럼 남아 사람을 괴롭힌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좀먹기도 한다.
“상처를 많이 줬지.”
창백한 은호의 피투성이 얼굴을 내려다보며 하진이 중얼거렸다.
“나는 너무 오래 누군가를 미워하기만 해서 미워하지 않는 상대에게도 사납게 대하는 법 외에는 알지 못하고, 나는 너무 오래 독기를 품고 살아와서 위협하고 강제로 취하는 것 외에 다른 행동은 알지 못해서, 소중한 이에게 상처를 입히면서도 그것이 그녀를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를 해 왔고, 소중한 이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도 나중 되면 전부 괜찮아질 거라고 여겼다. 지금은 상처라도 나중에 새살이 돋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없었던 일처럼 모든 싫은 기억이 사라지게 될 거라고.”
손을 들어 은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하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한번 새겨진 싫은 기억은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처 위에 상처가 덮이고 또 상처가 덮이면 그건 흉터가 되고, 흉터는 사라지는 법이 아니지. 만약 내가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 조금 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빌어먹을 인간이 되는 걸 스스로 자초하는 거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하진의 입술에서 샜다.
‘원래 빌어먹을 인간이긴 했지만.’
이라고 낮게 중얼거린 하진이 홍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지금까지 나쁜 인간이긴 했지만 비겁한 인간은 아니었지. 그러니까 비겁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내 여자에게 하지도 않은 짓을 뒤집어씌워 편안하게 옥좌에 오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너는 나를 비겁하게 만들 생각이냐? 네 주인이 비겁한 인간이기를 바라는 거냐?”
“폐하, 비겁한 것이 아니라 현명한 분이기를 바라는 겁니다.”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황제는 내가 죽였고, 은호는 역모 중에 변을 당한 거다.”
지금까지 입혀 온 상처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내버려두고, 이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
언제까지 독기를 품고 갈 것인가.
언제까지 미움을 머금고 갈 것인가.
이 밤, 무수한 피를 흘리고 나면 이제 흘린 피와 함께 미움을 흘려보내고, 독기도 흘려보내고 상처에 새살이 돋을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미움을 품고, 독기를 품은 곳에는 꽃이 필 수가 없다.
자신이 겨우 찾아낸 이 꽃을 자신의 미움으로, 자신의 독기로 시들게 할 수는 없다.
이 밤만 피를 흘리고, 이 밤에만 황궁이 마지막 독기로 가득 차고 넘쳐흐르게 하자.
이 밤만.
그리고 이 밤이 지나면, 안개가 걷히듯 이 황궁에서 독기를 걷어 내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주은호를 지키는 것이다.
그녀의 상처를 자신이 끌어안는 것이다.
이제는 상처를 입히는 사람이 아닌, 상처를 대신 받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상처 입혀 왔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대신 상처를 받는 사람이 되어 볼 생각이다.
“이 밤에 주은호가 죽었다고 공포…….”
그때였다.
“이것 놓지 못하겠느냐!”
날카로운 목소리에 하진도, 홍문도 서로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문을 향했다.
발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리더니 잠시 후 이루의 손에 붙들린 채로 화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비의 손 역시 피투성이였다.
*
“으응…….”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은호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의식이 돌아오며 그녀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통증이었다.
목이 아팠다.
목이 쓰라리고 욱신거렸다.
‘폐하께서 내 목을…….’
어렴풋하게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황제가 제 목을 조였고 그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었었다.
‘내가…… 폐하를 찔렀는데…….’
그 감각도 선명했다.
제 손으로 칼을 쥐고 그것으로 황제의 가슴을 몇 번이나 찌르고, 목을 찔렀다.
분수처럼 쏟아지던 붉은 피.
무섭게 치켜뜨던 황제의 눈.
‘내가 살아 있다면 폐하는…….’
황제는 죽은 것일까.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일까.
황제가 만약 살았다면 하진은 어찌 되었을까.
‘태자께서는…….’
황제를 찌른 것은 하진을 살리기 위해서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하진을 살리기 위해서 황제를 찔렀다.
사람을 찔렀다.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살아났다고 해도 극형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였다.
은호의 이마에 차가운 손이 덮였다.
뜨거운 열이 있는 이마에 차가운 손이 닿자 은호가 긴 숨을 내쉬었다.
이 손의 느낌을 은호는 알고 있다.
이 손의 주인을 알고 있다.
눈을 뜨기 싫은 것은, 이것이 꿈일까 무섭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은호의 시야에 흐릿하게 사람의 윤곽이 잡혔다.
그 윤곽은 점점 선명해지더니 저를 바라보는 사내의 얼굴로 바뀌었다.
사내는 웃고 있었다.
무척이나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 다정하게 웃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내가 아닌 줄 알았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