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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39화 (39/108)

39.

금환궁을 에워싸고 있던 금군들과는 칼날 한 번 부딪치지 않았다.

태자의 병사들을 본 금군들은 알아서 칼을 내렸고 하진은 아무런 저항 없이 금환궁에 들어서 곧장 현무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현무전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내관들도 상궁 나인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황제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던 조운도 옷깃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하진은 곧 그 고요함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전……!”

놀란 이루에게 하진이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현무전의 침전 안은 피바다로 변해 있었다.

사방 온통 검붉은 피가 흩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침상 아래에 황제가 싸늘한 주검인 채로 발견되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이미 죽은 것은 분명했다.

“마마께서는…….”

“그저 혼절한 것뿐이다.”

침상 위에 쓰러진 은호의 맥을 짚어 본 하진이 겨우 안도했다.

얼굴과 옷에 온통 피가 묻어 있지만 은호의 몸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다만 목에 새빨간 손자국이 난 것으로 봐서 황제에게 목이 졸리다가 정신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호흡도 고르고 맥도 정상이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던 하진이 겨우 안도하며 그녀를 제 품 안에 안았다.

조용히 뛰는 심장의 소리가 그를 안심시켰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던 심장이 이 작고 가녀린 몸을 품에 안는 순간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전하. 칼이 뒷머리에 꽂혀 있습니다.”

죽은 황제의 시체를 살피던 이루가 하진을 쳐다봤다.

“상처는 전부 세 곳입니다. 목과 가슴, 그리고 가슴.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머리에 박힌 칼날입니다. 목과 가슴은 앞에서 찔렀고 머리는 뒤쪽에서 찌른 것입니다.”

“목과 가슴을 찌른 것은 은호겠지만, 뒷머리를 찌른 건 누구지?”

하진의 가슴에 안겨 축 늘어진 은호의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외상이 없는 은호의 손이 피로 물들었다는 것은 이 피는 황제의 피라는 뜻이다.

은호가 황제를 찌르고, 그 피가 손에 물든 것이 틀림없다.

“발자국입니다, 전하.”

이루가 손으로 가리키는 발자국은 황제의 시체에서 곧장 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황제를 찌른 후에 달아난 흔적이었다.

“찾아내라.”

“알겠습니다.”

이루가 나간 후에 황제의 시체가 있는 침전 안에 은호와 함께 남은 하진이 제 품 안에 안겨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은호를 바라봤다.

그녀의 하얀 목에 얼룩져 있는 시뻘건 손바닥 자국을 도려 내고 싶었다.

목이 졸려 죽을 뻔한 것이다.

“살아 있어 줘서…….”

은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하진이 눈을 감았다.

“고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은호는 이미 제게 그 누구도 해 주지 못하는 일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칼로 자신을 지켜 주고, 어떤 이는 지략으로 자신을 도와주지만, 어떤 이는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을 지탱시켜 주는 이가 있다.

하진에게 있어서 그 사람이 바로 주은호다.

아주 오래전에 하진에게 있어서 그런 상대는 모친이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곁에서 웃어 주는 것만으로 힘이 되고 버팀목이 되어 주던 이가 어머니였다.

다들 약하다고 손가락질해도, 다들 미련할 정도로 착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리석은 여인이라고 비웃어도 하진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세상 그 자체였었다.

그랬던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에 하진은 더는 이 황궁에서 숨을 쉴 수가 없게 되었다.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가슴에 어둡고 서럽고 분노 가득한 감정만이 가득 차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물속에 빠진 것처럼 아무리 헐떡여도 가슴으로, 폐부로 들어오는 것은 증오였고, 원망이었다. 독기뿐이었다.

그리고 은호를 만났다.

은호를 만나는 순간부터 숨이 쉬어졌다.

독기로 가득한 폐에 맑고 청량한 바람이 스며 들어왔다.

어머니와 똑같은 여자.

어머니처럼 약하고, 어머니처럼 미련할 정도로 착하고, 어머니처럼 속수무책으로 아무것도 못 하는 여자.

그러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숨 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여자.

세상에 단 한 사람.

다른 누구와도 대체가 불가능한 단 하나밖에 없는 여자.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이번에는 울지 않게 해 줘서…….”

어머니를 잃었을 때는 참 서럽게 울었었다.

그 이후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보다 더 슬픈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물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만약 은호를 잃었더라면 자신은 20년 만에 다시 울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잃지 않게 해 줘서…….”

그녀는 듣지 못할 고백을 속삭이고 있을 때 침전 안으로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가 있었다.

이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굴을 들어 올린 하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루가 아닌 홍문이었다.

“이런…….”

침전 안으로 들어선 홍문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원래 계획대로 하실 생각이십니까, 폐하?”

은호를 죽은 것처럼 꾸미고 계획했던 양녀 입적을 하겠느냐는 뜻이다.

이미 은호를 양녀로 입적시킬 귀족도 물색해 놓았다.

부귀영화를 약속하고 약간의 위협으로 입단속까지 시켜 놓았다.

하진이 허락만 하면 홍문은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

“그래야겠지.”

“폐하. 제게 다른 계획이 있는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다른 계획?”

자신이 알지 못하는 다른 계획이 있다는 말에 하진이 미간을 찡그렸다.

만약 그 다른 계획이라는 것이 이미 사전에 존재했던 것이라면 홍문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지금 꺼낸다는 것은 이 상황을 보고 홍문이 즉석에서 세 번째 계획을 만들어 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역모로 옥좌에 오르시는 것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홍문이 죽은 황제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홍문에게 있어서 황제의 이 예측하지 못한 죽음은 절호의 기회다.

설마 은호가 황제를 죽이리라고는 홍문 역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황제를 죽인 것이 하진이 아니라 주은호라면, 이건 어쩌면 완벽한 기회다.

홍문의 입술이 저절로 휘어졌다.

‘이거라면 주이염도 꼼짝 못 하게 손안에 넣을 수 있고, 하진 님의 즉위에도 흠이 나지 않겠는데?’

지금 황궁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부 역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황후 주은호가 황제를 시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하진이 군사들을 이끌고 서둘러 현무전으로 왔지만 한발 늦어 황제가 죽었다, 구할 수 없었다, 이런 내용이라면 누구도 하진의 즉위를 반대하거나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비난은 황제를 죽인 젊은 황후 주은호에게 돌아갈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황제를 죽인 죄로 주은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사형 집행을 통해 주은호는 합법적으로 죽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원래 예정했던 대로 주은호를 양녀 입적시키고 황후로 간택하면 모든 것이 완벽하지 않을까?

원래 있던 계획에 한 가지만 더 끼워 넣는 것이다.

황제 시해자 주은호. 그 한 가지만 더해지는 것뿐이다.

어차피 곧 주은호는 표면적으로 죽어야만 한다.

이왕 죽을 것 황제를 죽였다는 오명을 가지고 죽으면 하진에게 가는 비난의 눈길이 덜어진다.

실제로 황제를 찌른 것은 주은호다.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아니다.

물론 황제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치명상은 제삼자의 짓이겠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을 살리기 위해 주이염은 화비와 잡았던 손을 놓고 하진이 시키는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을 것이다.

아직 조정에는 좌복야 허연이 남아 있다.

화비의 아비.

화비는 이제 황궁에서 출궁해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지만 허연은 다르다.

허연은 아직 조정에 자기 사람들을 두고 있고 그 가문은 아직 건재하다.

허연을 치는 사냥개로 주이염을 이용하려면 주이염을 협박할 무기가 필요하고, 주은호는 주이염을 휘두르는 데 있어서 가장 효율적이고 좋은 도구가 되어 줄 것이다.

“폐하. 황후 주은호가 황제 폐하를 시해했다고 공포하십시오.”

“네가 정녕 미친 것이냐?”

아니나 다를까.

홍문이 예상했던 반응이 하진의 입에서 나왔다.

저런 식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하진이라면 당연히 저렇게 나오고도 남는다.

하진은 아마 두렵지 않을 것이다.

두려울 것도 없고 거칠 것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누가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도, 비난하고 소리쳐도 하진은 눈 하나 꿈쩍할 사내가 아니다.

태산처럼 견고해서 도무지 흔들리는 법을 모르는 사내가 하진이다.

그런 그에게 비난의 책임을 주은호에게 돌리라고 하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건 홍문도 이미 예측했다.

“어차피 황후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죽어서 세상에서 사라지셔야 하는 분입니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모두가 납득할 만한 죽음이 낫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면 황제를 시해한 죄로 사약을 받아 죽었다 이런 것 말입니다. 폐하, 결과가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결과는 폐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과정만 조금 달라지는 것뿐입니다.”

“은호가 죽인 것이 아니다. 만약 저가 죽였다고 생각한다면 은호는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죄책감을 더 가지는 대신, 그만큼 폐하를 의지하게 되지 않을까요?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의지할 대상을 붙들게 되고, 한번 그렇게 붙들게 되면 어미를 떠나면 죽는 줄 아는 오리 새끼처럼 폐하의 곁에서 떠나지도 못하고 폐하께 죄의식을 품은 채로 폐하의 품에서 절대로 달아날 생각도, 사랑하지 않을 생각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폐하가 마마의 죄를 숨겨 주는 공범이자 보호자가 된다면 말입니다.”

홍문이 뱀처럼 간사하게 웃었다.

“마마께서는 아직 폐하를 무서워하고 계십니다. 마마께서 폐하께 완전히 마음을 주셨다고 확신하십니까?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마마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른다면, 마마의 마음이 떠나지 못하게 잡아 둘 안전장치는 필요할 것입니다. 그 안전장치로 마마의 죄의식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내가 이 사내의 아비를 죽였다. 내가 죄인이다, 이런 식의 심적 압박감이 마마를 폐하의 품으로 더 안기게 만들 것이라고 소인은 확신합니다.”

과정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결과다.

그게 홍문이 추구하는 방법이다.

결과를 위해서는 그 방법이 얼마나 야비하고 악랄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주은호가 받을 상처 따위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주은호가 결국에는 황후가 된다는 사실이고, 더 중요한 것은 하진이 흠 없이 옥좌에 오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은호의 마음이 조금 다쳐도, 아니 많이 다쳐도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은호 역시 황제를 죽일 마음으로 칼을 휘둘렀다.

황제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치명상을 입힌 것이 다른 사람일 뿐, 주은호도 충분히 황제를 죽일 마음이 있었고 시도까지 했었다.

그러니 주은호가 황제를 죽인 것이라고 해도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건 아니다.

“폐하.”

홍문이 다시 한 번 하진의 대답을 재촉했다.

하진이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홍문을 보며 하진이 미간을 찡그린 채로 대답했다.

“황제를 죽은 것은 나다. 아들이 옥좌를 노리고 아비를 죽였다고 공포할 것이다. 이 밤에, 태자가 역모를 일으켜 초한의 주인이 되었다고 알리거라.”

“폐하!”

바라지 않는 대답이 하진의 입에서 나오자 홍문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명령했으니 너는 그대로 이행하거라.”

단호한 결심을 들으며 홍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리석다.

홍문이 알고 있는 하진은 결코 어리석은 사내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일까.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가려는 것일까.

‘주은호 때문인가…….’

주은호라는 저 여자가 하진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일까.

하진도 역대의 황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자 때문에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는 그런 전철을 밟으려는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주은호가 어쩌면 가장 위험한 복병일 수도 있겠군…….’

그냥 꽃처럼 하진의 곁에 있기만 하면 되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진이 어여삐 여기고 순정을 주는 여자니까, 하진의 곁에 있으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틀렸다.

저 여자는 하진을 어리석은 사내로 만들 것이다.

결국에는 하진은 저 여자 때문에 망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저 여자를 하진의 곁에서 떼어 놓는 것이 상책이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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