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38화 (38/108)

38.

“흐어어……!”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금군들에게 당장 들어와 이 발칙한 년을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구멍이 뚫린 목에서 피가 솟구치며 바람이 새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황제의 발 아래로 붉은 피가 웅덩이를 이루기 시작했다.

“히익, 히익……!”

자꾸만 말을 하려는 황제의 입에서 괴이한 소리만 새어 나왔다.

“흐어, 흐어…….”

황제가 비틀거리며 한 발자국 발을 내딛자 은호가 뒤로 물러났다.

챙그랑―!

그녀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아, 아아…….”

피범벅이 된 황제가 제게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본 은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세 번이나 찔렀다.

그런데도 황제는 쓰러지지 않았다.

자신은 온 힘을 다해 찔렀지만 사람의 생살을 깊숙하게 찔러 들어가기에는 무리였던 것일까.

“아, 아아…….”

뒷걸음질 치던 은호가 손을 더듬거리며 뭐라도 잡기 위해 애썼다.

그때 은호의 손에 잡힌 것은 화병이었다.

화병을 쥔 은호가 그것을 황제를 향해 집어 던졌다.

퍽―!

챙그랑―!

요란한 소리가 나며 황제의 머리에 부딪친 화병이 산산조각 나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이녀언―!”

화병에 맞으며 얼굴이 찢어진 황제가 괴물처럼 소리를 지르며 은호의 목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윽!”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인지 피를 철철 흘리면서 황제가 은호의 목을 졸랐다.

“윽, 윽!”

은호의 몸이 침상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은호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는 황제의 얼굴과 목에서 떨어지는 핏물이 은호의 얼굴을 적셨다.

제 얼굴로 뚝뚝 떨어지는 핏물이 은호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숨 막혀……!’

은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 갔다.

숨이 막히고 머릿속이 점점 흐릿해졌다.

은호가 제 목을 조르고 있는 황제의 팔을 있는 힘을 다해 밀어 내려고 했다.

세 번이나 칼에 찔리고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는 황제는 무서울 정도로 힘이 쎘다.

툭.

황제의 팔을 밀어 내려던 은호의 손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의식이 끊어진 채로 축 늘어지는 은호의 목에서 손을 떼지 않고 더 사납게, 그녀의 목을 꺾어 버리려는 것처럼 힘을 주던 황제가 움직임을 멈춘 것은 그때였다.

“커억……!”

괴이한 소리를 내며 황제가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보기 위해 간신히 고개를 돌리던 황제는 끝내 돌아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황제의 뒤통수에는 조금 전 은호가 떨어뜨린 단검이 꽂혀 있었다.

*

“황궁 문을 막고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거라!”

이루에게서 갑주를 받아 든 하진이 그것을 몸에 걸쳤다.

바닥에는 하진이 벗어 던진 피투성이 옷이 뒹굴고 있었다.

현무전에서 물러나와 금환궁을 막 빠져나오려던 하진은 금군에게 둘러싸여야만 했었다.

금군의 병사들은 모두 무장을 한 채 칼을 빼들고 있었고 그들의 살의는 분명했다.

자신을 겨누는 칼끝을 보는 순간 하진은 황제가 이미 자신을 죽이기로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옹주로 가서 술에 독을 탄 범인을 잡아 오라는 황명은 자신을 일시적으로나마 방심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진짜 속셈은 자신을 이 밤, 이 황궁에서 죽이려는 것이 분명했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다.

다만 예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빨리 진행될 뿐이다.

아비가 저를 죽이려 든다면 자신은 아비를 죽일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부자간의 연은 끊어졌다.

부자의 혈연 대신 서로를 미워하는 증오의 끈만 붙잡고 살아온 세월이다.

서로 같은 땅을 딛고 살아갈 수 없다면 둘 중의 하나는 사라져야 하고, 내일 새벽이 오기 전에 사라지는 것은 황제가 될 것이다.

자신을 기어이 죽이려는 금군들을 전부 벤 직후 하진은 때마침 저를 구하려고 태자궁의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오던 홍문을 만날 수 있었다.

“금군이 저항하면 베어 버려라. 그리고 황궁 내에 입궁해 있는 대신들을 따로 격리시키고, 주이염을 찾아라.”

이미 하진의 병사들은 싸울 준비를 모두 마쳤다.

황제가 옹주에 가 있는 동안 하진이 손 놓고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니다.

황제가 금군을 이끌고 황궁을 비운 틈을 이용해서 자신의 병사들로 황궁을 채워 놓았다.

지금 이 황궁 안에서 병사들의 수로 치면 하진의 병사들이 황제의 금군을 압도한다.

황제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병력은 아직 옹주에 남아 있다.

곁에서 도울 수 없는 힘은 힘이 아니다.

황제는 금군만 이끌고 황궁에 돌아오는 순간 이미 스스로 죽음 안으로 발을 들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동묘의 귀족들이 황제를 구하기 위해 사병을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다.

설령 그중에 어떤 이들이 황제를 구하기 위해 사병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굳게 닫힌 황궁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그사이에 황제의 목을 치고, 하진이 옥좌에 오른다.

30년여 년 전, 황제가 그랬듯이 지금 하진이 그 전철을 다시 밟는 것뿐이다.

“…….”

하진이 서쪽 하늘을 쳐다봤다.

서쪽에는 태자궁이 있다.

이 소란 속에서 하진의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혹은 하진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야 하는 이루가 보이지 않는 까닭이 있다.

하진이 태자궁을 나서며 이루에게 은호를 지키라 명령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구라 해도 태자궁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라 했다.

이루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내이고, 그런 이루가 버티고 있는 이상 은호는 안전하다.

‘이 밤이 지나면…….’

이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은호는 황후가 아니다.

자신이 역모로 옥좌에 오르게 되면 은호는 폐서인이 된다. 그게 당연한 수순이다.

원래 계획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황제를 전사로 위장해 암살하고 정당하게 그 옥좌를 계승한 후에 은호를 태후로 추대한 후, 그녀가 병사한 것으로 꾸며 가짜 시체를 황궁에서 내보낸 후에 귀족들 중 한 명의 양녀로 입적시킨 다음 다시 황후로 맞이할 계획이었다.

황궁 안에 은호의 얼굴을 아는 내관들과 상궁, 나인들이 있는 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문제가 된다면 황궁 안의 모든 내관들을, 상궁 나인들을 전부 죽이고 물갈이를 하면 된다.

하지만 황궁에서 오래 묵은 내관과 상궁들은 제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봐도 모르는 척할 것이리라.

또 하나의 계획은 일이 틀어졌을 때 황제를 죽이고 역모로 옥좌에 오른 후에 은호 역시 그 난리에 휘말려 죽은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었다.

역모가 시작되면 그 밤에 황궁 안에서는 수십에서 수백 명이 죽어 나간다.

그 와중에 황후가 죽임을 당했다고 해도 누구 하나 의심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적당한 나인의 시신을 수레에 실어 주이염에게 보낸 후에

‘딸이 죽었다’

라고 말하면 주이염은 알아서 뒷마무리를 잘 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시신을 태우거나 묻어 버리면, 묻어 버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누가 그곳에 묻힌 것이 황후가 아니라 생각하겠는가.

그런 다음에 동묘의 귀족 중 한 명의 딸로 양녀 입적을 시켜 다시 황후로 맞이하는 것이 하진이 염두에 두고 있던 계획이었다.

첫 번째 계획이나 두 번째 계획이나 어차피 결론은 같다.

은호는 표면상으로는 죽어야 하고, 그런 은호를 다른 이름으로, 다른 신분으로 위장시켜 황후로 맞이하는 것. 달라지는 건 없다.

과정만 다를 뿐, 결론은 똑같다.

“금환궁으로 직접 가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대답을 뻔히 알면서도 묻는 홍문을 향해 하진이 차갑게 웃었다.

곧 자신의 손은 아비의 피로 물들여질 것이다.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지만, 많은 말을 할 시간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한마디만 하자.

‘나를 낳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라고 한마디만 하자.

“내가 금환궁에 가 있는 동안 황궁의 문을 사수하고, 황궁 안에 남아 있는 금군의 잔여 병력을 제압하거라.”

평소라면 이루에게 내릴 명령이지만 오늘만큼은 홍문의 몫이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홍문의 얼굴도 평소 그답지 않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밤이 홍문이 오랫동안 꿈꿔 오던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서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밤이 지나면 초한의 주인이 바뀌는데,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날이 밝기 전에 금환궁으로 오거라.”

하진의 그 말은, 다시 볼 때 자신이 금환궁의 주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네, 폐하.”

홍문이 허리를 숙였다.

불경스러운 말이었다.

전하가 아니라 폐하.

누가 들어도 불경스러운 말이었지만 홍문은 거리낌 없이 그 말을 내뱉었다.

이미, 하늘은 찢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

하진이 금환궁으로 가는 길목은 누구도 막아서지 않았다.

금환궁으로 향하는 젊은 태자의 걸음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상황을 눈치챈 내관들과 상궁 나인들은 이미 몸을 숨기고 이 두려운 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고, 황궁의 위군들은 하진의 병사들과 마주치자마자 칼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금환궁을 목전에 앞둔 하진이 걸음을 재촉할 때였다.

“전하.”

그의 곁을 따르던 한 병사가 심상찮은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무슨 일…….”

병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하진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횃불로 밝혀진 어둠 속에서 달려오고 있는 건 틀림없는 이루였다.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이루가 여기에 올 이유가 없다.

이루는 지금 태자궁에서 은호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왜 저렇게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는 것일까.

‘설마…….’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불길한 예감이 하진의 등줄기를 스쳤다.

그리고 그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황후마마를 지키고 있으라 하지 않았더냐?!”

소리치는 하진을 향해 달려온 이루가 그의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비통하게 고했다.

“마마께서는 지금 금환궁에 계시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죽여 주시옵소서! 마마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이마를 땅에 찧으며 비통하게 소리치는 이루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진의 다리가 비틀거렸다.

현기증이 일어나고 있었다.

‘금환궁에…….’

은호가 지금 금환궁에 있다.

황제와 함께.

저를 죽이라고 명령한 황제가 은호는 살려 뒀을까?

어쩌면 지금쯤 은호는 벌써 죽임 당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주 만약에 은호가 죽었다면, 벌써 죽었다면 황제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 개의 밥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

은호가 죽었다면, 스스로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황제만 용서치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지켜 준다 약속했던 이 혀를 뽑아 버리고, 그녀를 지켜 주지 못한 두 손을 잘라 버릴 것이다.

만약 정말 그녀가 죽었다면.

“살아 있을 것이다.”

지금 하진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황제는 손안에 든 노리개를 쉽게 죽이지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희롱하고 또 희롱한 끝에 죽이지 벌써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 아직은.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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