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은호의 손이 허리띠에 닿았다.
매듭의 끝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왜 그렇게 떠는 것이냐? 내가 무서우냐?”
[내가 무서운 것이냐.]
그런 말을 들었던 것이 고작 며칠 전이다.
무섭다고 대답하던 자신에게 그 사내는 저만 무서워하라고 했었다.
저만 무서워하라고.
다른 이보다 저를 더 무서워하라고.
그때는 그랬었다.
다른 어떤 이들보다 그 사내가 더 무서웠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 사내가 더 무서운가 아니면 눈앞의 황제가 더 무서운가.
‘더 무서운 건…….’
눈앞의 황제가 무섭다.
언제든지 자신과 부친과 하진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진 황제가 너무나 무섭다.
그러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하진을 잃는 것이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눈앞의 황제보다 하진을 잃는 것이 더 무섭다.
진짜 무서운 것은 그것이다.
소중한 것을 잃는 것.
부친, 하진. 소중한 이들. 그것을 잃는 것이 지금 앞에 있는 황제보다 더 무섭다.
“폐하. 옹주에서 이곳 동묘까지는 먼 길이라 폐하의 옥체가 고단하실 듯하여…….”
허리띠의 끝을 손에 쥔 채로 은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황제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왜? 양물도 서지 않는 지아비에게는 다리를 벌려 주기가 싫은 것이냐?”
“폐하…….”
“이미 젊은 사내놈의 고기 맛을 봐 버렸으니 늙은이에게는 다리를 벌리기 싫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폐하……!”
당황한 은호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황제에게 전부 들켰다는 건 은호도 알고 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래, 태자의 고기 맛이 그리 좋더냐? 그 고기 맛에 푹 빠져서 살다가 내가 살아서 돌아오니 내가 얼마나 밉겠느냐.”
“폐하, 그렇지 않사옵니다……!”
“너희 두 년놈들이 음탕하게 뒹굴면서 나를 죽이려 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폐하……!”
“네년이 태자와 공모해서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을 내가 정녕 모를 줄 알았더냐?!”
공모라니. 그런 것은 한 적 없다.
하진이 역심을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황제를 죽이려 한 적이 없다.
아니, 황제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조차 품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옹주에서 있었던 독살 사건에 하진은 관계가 없을 것이다.
만약 그 일을 꾸민 것이 하진이라면 황제가 살아서 급히 돌아온 순간 독살이 실패로 돌아갔을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진짜 하진이 꾸민 짓이라면 하진은 황제의 부름에 응하는 대신 군대를 끌고 황궁을 점령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진은 황제의 부름에 응했다.
그건 황제의 앞에 이를 때까지 하진도 옹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 하진이 황제를 독살하려 했다고? 아닐 것이다.
절대로 아니다.
“폐하,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사옵니다!”
“음탕한 년. 제 배로 낳은 것이 아니지만 엄연히 아들이거늘, 아들의 좆에 쑤셔 박히며 좋다고 울어 댔을 테지. 내가 옹주에서 죽었다면 너희 년놈들이 내 시체 앞에서 곡을 하는 척하며 배를 맞췄겠지.”
“폐하!”
“오늘 태자는 이 황궁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거다.”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은호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듣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금군의 병사들에게 그놈이 황궁을 나가기 전에 붙잡아 목을 베라고 일러 뒀지. 감히 나를 독살하려고 했으니 마땅히 그 죄는 죽음으로 갚아야 하는 법 아니겠느냐. 하지만 네년은 살려 주마. 하진 그놈의 머리와 양물을 잘라 와서 그 머리는 눈앞에 두고 그 양물을 손에 쥐고 네년 가랑이를 쑤셔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네년이 그리도 좋아하는 놈의 양물이니 그 양물이 쑤셔 박히면서 어디 한번 좋다고 울어 보거라.”
괴물이다.
지금 제 눈 앞에 있는 것은 괴물이다.
부도덕한 짓을 저지른 하진과 자신이 죄인이라면 눈앞의 황제는 괴물이다.
더는 망설일 수가 없다.
더는 주저할 수도 없다.
주저하면, 모두가 죽는다.
용기를 내면 저 하나만 죽고 부친과 하진은 살겠지만, 이대로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전부 죽는다.
그러니까, 차라리 자신이 죽는 쪽을 택할 것이다.
허리띠의 매듭을 푼 은호가 제 몸에서 옷을 끌어 내리는 척하다가 옷 안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쥐었다.
이 단검은 하진이 제게 준 것이다.
황제의 부름을 듣고 이 단검을 옷 안에 숨겨 온 이유는 하나였다.
황제에게 능욕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목적으로 가져왔었다.
제 목을 찌를 목적으로 가져온 단검이지만 이제 제 것이 아닌 다른 피를 묻히는 수밖에 없다.
황제를 찌르고 저를 찌르자.
어차피 황제를 죽이면 자신도 살아남지 못한다.
황제를 시해한 죄는 대역죄다.
자신도 죽고 부친도 해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부친에게는 그동안 쌓아 놓은 권력이 있으니 목숨까지는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하진이 부친은 보살펴 주지 않을까.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진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은 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이 자리에서 황제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 것이 낫다.
‘작별 인사도 못 하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인사라도 할 것을.
‘자책하시면 안 되는데…….’
만약 자신이 여기서 황제와 함께 죽고 나면 하진은 자책에 빠질지도 모른다.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하진은, 또 이루는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까.
부디 그러지 말아 주면 좋겠다.
그저 잊지만 않아 준다면.
하진이 자신을 잊지 않아 준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바쁜 일상에 사로잡혀 살다가 어느날 문득 바람이 스칠 때 자신을 기억해 주는 그 정도면 족하다.
태자비를, 아니 황제가 된 후에 황후를 맞이하고 후궁들을 맞이하고, 그렇게 또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문득
‘주은호’
라는 여자가 그의 삶의 어느 언저리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는 정도면 족하다.
더 많이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더 오래 서로에 대해 알아 가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여기서 끝나도 미련은 없다.
칠석의 밤에서 시작되어 여기까지 왔다.
칠석의 밤에 하룻밤을 같이 보낸 남녀는 부부의 연을 맺는다고 했다.
부부의 연은 맺지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그렇게 되었다.
그러니, 그만하면 된 것이 아닐까.
그만하면, 가슴이 아파도 된 것이 아닐까.
가슴이 아프고, 자꾸만 그 사내가 보고 싶어도 그만하면, 거기서 더 바라면 그게 욕심이 아닌가.
‘망설이지 마…….’
모질게 결심하고 품 안의 칼을 꽉 쥘 때였다.
“폐하―!”
난데없이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은호의 귀를 찢었다.
그 목소리는 은호의 손만 멈추게 한 것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은호의 목을 조를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던 황제의 움직임도 멈추게 만들었다.
“폐하―! 폐하!”
울부짖음에 가까운 목소리에 황제가 눈살을 찡그렸다.
“밖에서는 뭣들 하길래 화비가 현무전까지 오게 만들었느냐! 화비는 당장 연환궁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은호는 아직 화비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화비가 누군지는 안다.
왕자 진원을 낳은 황제의 후궁.
황제 대신 독을 마시고 죽은 왕자 진원의 어미다.
그녀가 지금 문 바로 뒤에서 서럽게 황제를 부르고 있었다.
“폐하―! 원통하옵니다!”
밖에서 분주한 소리들이 들렸다.
현무전 안으로 기어이 들어오려는 화비와 그런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내관들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폐하! 폐하께 이 원통함을 아뢰기 전에는 비통하여 살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나 주시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 것입니다! 현무전에 기어이 제가 피를 뿌리는 것을 보시고 싶으신 겁니까?!”
화비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비통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저년이 미친 것이로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황제는 더는 화비를 끌어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황제도 아는 것이다.
평소의 화비라면 절대로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는다.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아들이 죽었다는 말에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라고 황제는 짐작했다.
제정신이 아닌 화비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정말 저 문 앞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 수도 있다.
화비가 죽는 것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화비를 죽게 만들었다는 시선을 받는 것이 싫을 뿐이다.
화비는 이미 왕자 진원을 잃었다.
더군다나 진원이 죽은 까닭은 황제 자신이 마셨어야 할 독이 든 술을 대신 마셨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저 대신 죽은 진원의 어미인 화비가 현무전 앞에서 황제를 만나기를 청하다가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면 사람들은 자신을 괴물이다, 무정하다 욕할 것이다.
물론 그런 욕을 듣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평생을 들어 왔지만 그런 소문들로 인해 동묘의 귀족들이 자신에게서 돌아설 수도 있다.
“화비는 남기고 나머지는 물러가거라.”
황제의 명이 떨어지자 문밖이 조용해졌다.
내관들이 물러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흐느끼는 화비의 울음소리는 이어졌다.
“잠시 기다리거라. 내가 일단 황후와 하던 것이 있으니 마저 마친 다음에 네 억울함을 들어 주마.”
그 말이 떨어진 후에야 문밖에서 울음이 그쳤다.
울음소리가 그치자 황제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돌아섰다.
흥이 식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은 여기서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늘은 기어이 끝장을 볼 생각이다.
옹주로 내려가 있는 사이에도 하진과 황후가 붙어먹고 있을 것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었다.
옹주에서 서북의 반란군들을 진압한 다음 돌아와 하진의 목을 베고 황후가 보는 앞에서 그 목을 들이댈 생각만 했었다.
물론 명분은 없었다.
태자를 죽일 명분. 그게 없었다.
제 아들이지만 하진은 늘 제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가장 위험한 것이 아들이라는 것들이다.
언제나 호시탐탐 아비의 자리를 탐내는 것들이 아들이라는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지위와 힘을 갖춘 하진은 더더욱 그랬었다.
하진이 어렸을 때는 화비와 화비의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하진을 태자에 앉혀 놓았어야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것이 제 자리를 위협해 왔다.
하진과 주이염이 손을 잡으려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저를 칠 것이라 생각해서 선수를 쳐서 주이염의 딸을 황후로 들였건만 기어이 둘이 붙어먹었다.
이제는 하진도 치고 주이염도 치고, 제 자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칠 때다.
이 밤이 지나기 전에 하진은 황제를 독살하려 한 죄로 죽임을 당할 것이고 아침이 밝아 오기 전에 주이염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황후를 실컷 능욕할 생각이다.
제 양물은 서지 않지만 굳이 양물이 필요하진 않다.
손에 잡히는 온갖 것들로 능욕한 다음 내관과 금군들을 불러들여서 밤새도록 돌아가며 겁탈하라고 시킬 생각이다.
수십 명의 사내들에게 돌아가며 겁탈을 당해 너덜너덜해진 황후를 다시 감옥의 죄인들에게 보내 그곳에서 굶주린 죄수들에게 범해지게 하고 그 꼴을 후궁들에게 보이면 후궁들 중 누구도 감히 자신을 두고 다른 배와 맞출 생각을 품는 후궁은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일벌백계다.
“다 벗었느냐?”
탐욕스런 얼굴로 황제가 돌아서는 순간,
푹―
황제가 제 가슴을 내려다봤다.
제 아래에 은호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푹 숙인 고개 아래로 희고 가녀린 손이 보였다.
원래 희어야 할 손이 시뻘겋게 물든 것은, 피 때문이었다.
피.
그 손은 단검을 쥐고 있었고 그 단검의 끝은 제 가슴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피가 흘러내렸다.
“이, 이, 이년이……!”
고통보다 더한 분노를 느끼며 황제가 은호를 내리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릴 때,
푹―!
푹―!
황제의 가슴에서 칼날을 뽑아 낸 은호가 그 칼끝으로 황제의 가슴을 또 한 번, 목을 또 한 번 찔렀다.
황제의 목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며 은호의 얼굴과 옷자락을 적셔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