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썩 비키지 못하겠느냐!”
금군 대장이 태자궁의 중문을 가로막고 있는 이루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그런 위협 어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루는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태자 전하의 명이 계셨습니다.”
“이건 폐하의 황명이다! 썩 비키거라! 황후마마를 당장 모셔 오라는 폐하의 명이 계셨다!”
이루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황명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건 이루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황명을 거역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목이 달아나도 이루에게 있어서는 하진의 명령이 더 중요했다.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했으니 그 말에 따르는 것이다.
“이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금군 대장이 칼을 뽑아 들자 태자궁을 둘러싸고 있던 금군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에 이루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등 뒤에 매고 있는 칼의 손잡이에 닿자 금군들이 바짝 긴장했다.
이루라는 사내가 어떤 사내인지는 금군들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등 뒤에 매고 있는 저 칼을 한번 휘두르면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터져서 죽게 된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저 한 명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황궁에 없다.
지금까지 하진을 숱한 위기에서 구해 낸 것도 이루라는 이 사내였다.
하진을 죽이기 위해 매복해 있던 수십 명의 자객들도 이 사내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태자궁 안으로 들어가 황후를 모시고 나와 황제에게로 데리고 가려면 이 사내를 넘어서야 하지만, 누구도 자신들이 이 사내를 넘어설 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황명 때문에 덤비면 결국은 개죽음이다.
황제의 명을 이행하지 못하면 고작해야 금군의 직을 박탈당하고 쫓겨나는 것이 전부겠지만 지금 이 사내에게 덤비는 것은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이유로 칼을 뽑아 들긴 했지만 금군들 중 누구도 먼저 덤벼드는 자는 없었다.
황명은 무섭지만 이루는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당장 저놈을 끌어내라!”
금군 대장이 아무리 소리를 쳐도 병사들이 서로 눈치만 봤다.
“당장 저놈을 끌어내지 않으면 모두 역모로 간주하고 전부 목을……!”
그때였다.
“길을 비켜 주세요.”
작고 가녀린 목소리가 이루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마마.”
이루가 제 등을 살며시 미는 은호를 돌아봤다.
은호의 안색은 창백했지만 입술을 굳게 깨물고 있었다.
태자궁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지만 그녀도 이미 상황을 깨달은 것이 틀림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마마.”
“아니요. 폐하께서 부르시니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르심에 가지 않는 것은 폐하를 거역하는 것이고, 폐하를 거역하는 것은 곧 역모입니다. 그러니, 길을 비켜 주세요.”
“마마, 태자 전하께서…….”
“폐하의 명을 어기지 마세요. 그러면 태자께도 화가 미칠 겁니다.”
가녀리지만 그 안에 이미 단단한 각오를 품은 은호의 말에 이루가 칼 손잡이에 얹어 놓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태자님께.”
그의 앞으로 스쳐 지나가며 은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금군 병사들을 향해 걸어가는 은호의 뒷모습을 보며 이루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이루의 눈에 비치는 은호는 거친 바람 앞에 위태로운 꽃이었다.
사나운 바람에 언제 꺾일지 모르는 꽃.
마음 같아서는 당장 금군 병사들을 베고 은호를 태자궁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고 싶지만 은호의 목소리는 그녀가 가진 용기를 전부 다 담은 목소리였다.
은호가 얼마나 마음이 약하고 눈물이 많은지는 이루도 잘 알고 있다.
작은 일에도 쉽게 겁을 먹어 움츠러들고, 두려운 일이 닥치면 혼절해 버리는 여자다.
강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연약한 꽃이리라.
그런 은호이지만 지금 그녀의 안에서 짜낼 수 있는 모든 용기를 짜내어 황제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이루는 짐작하고 있다.
하진을 위해서다.
하진을 위해서 두려움도 누르고 지금 황제에게로 가는 것을 택한 것이다.
자신에게 지켜 달라는 말을 하는 대신 하진을 위해, 하진을 지키기 위해 그녀 스스로 태자궁을 나온 것이다.
항상 겁먹고, 숨고, 울고, 도망치려던 그녀가 더는 숨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도망도 치지 않는 이유는, 하진 때문이다.
그것을 자신이 방해할 수는 없다.
그것이야말로 불충이다.
‘약속…….’
하진과 은호가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이루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약속을 했다면 하진은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하진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그의 칼이 되어 그를 위해 싸울 것이다.
*
잠시 잊고 있었다.
황궁이 이렇게 무섭고 어두운 곳이라는 걸 은호는 며칠 동안 잊고 있었다.
태자궁의 아늑함에 젖어 잠시 황궁이 이런 곳이라는 걸 잊고 지냈던 것을 은호가 다시금 떠올렸다.
무서운 곳, 어두운 곳, 숨이 막히는 곳, 도망치고 싶은 곳.
지금 금환궁으로 향하는 발길을 돌려 달아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하진을 위해서고, 그러지 않는 것은 하진을 믿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한 그 약속을 믿기 때문이고, 이제는 자신이 하진을 지켜 주고 싶은 까닭이다.
물론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강한 마음도 없고, 용기도 없고, 현란한 말재간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힘도 없다.
스스로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보호만 받아 왔다.
부친에게서 보호를 받아 왔고 하진에게서 보호를 받아 왔다.
하지만 살아가며 지금 처음으로, 보호받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켜 줄 힘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자신이 지켜 주지 않아도 그는 스스로를 누구보다 강하게 지켜 낼 사람이지만, 그럴지라도 지켜 주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다.
자신은 그저 이 몰아치는 바람 앞에서 눈을 감고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기 싫을 뿐이다.
바람이 그친 후에 자신을 지키려다 상처 입은 사내를 보며 입으로만 안쓰럽다, 아프냐 그렇게 묻기가 싫은 것뿐이다.
그 바람을 함께 맞고, 그 바람에 함께 상처를 입어야 나중에 그 사내의 상처를 보며 위로할 자격이 생기지 않을까.
처음이다. 이렇게 용기를 내는 것은.
금환궁을 향해 걸어가는 은호의 뺨으로 바람이 스쳤다.
스산한 황궁의 바람이었다.
처음으로 혼자 맞는, 누구의 등 뒤에서 숨지 않고 혼자 맞는 바람이었다.
그 스산한 차가움에 손끝이 떨려 와도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금환궁이 가까워져도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금환궁에 이르렀을 때 저를 향하는 무수한 시선들에도 불구하고 은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눈을 감지 않는 것은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용기이고, 도망치지 않는 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드시었습니다.”
환관 조운이 현무전 안으로 고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은호가 제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
“고개를 들어 보거라.”
쇠를 갈아 마신 것처럼 낮게 끓는 목소리에 은호가 얼굴을 들었다.
주름으로 가득 덮인 얼굴에 눈빛만 형형한 황제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큰일을 당했다고 들었다.”
“아니옵니다. 오히려 폐하께서 변을 당하실 뻔하셨다 들었사옵니다. 무탈하셔서 다행이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황제의 대답에 은호의 뒷목이 뜨끔거렸다.
“네 아비의 집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 무척이나 곱다고 생각했었지.”
황제의 손끝이 은호의 뺨에 닿았다.
제 뺨을 건드리는 손끝에 은호의 등으로 소름이 돋아났다.
손가락은 그녀의 뺨을 만지고 귓가를 어루만지다 천천히 내려와 그녀의 목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본 중에 가장 고운 꽃이라고 말이다. 나는 내 눈에 들어오는 꽃이라는 꽃은 전부 꺾었는데 아직 내가 꺾지 못한 꽃이 거기에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느냐.”
“폐하…….”
황제는 이 밤에 저를 안으려는 것일까.
아직 황제와는 초야를 치르지 못했다.
초야의 밤에 그 난리가 생기고 곧장 옹주로 떠난 탓에 은호는 아직 황제와 초야를 치르지 않았다.
‘싫어…….’
이미 자신은 하진을 아는 몸이다.
자신의 몸에는 하진이 새겨졌다.
이런 몸에 황제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아비와 아들을 한 몸에 받아들이는 배덕함 때문이 아니다.
황제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신은 더는 하진에게 안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자신은 이런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
자신은 황제의 아내다. 하진의 아내가 아니다.
자신의 지아비는 황제고, 하진은 자신의 아들일 뿐이다.
그런데 몸과 마음은 이미 하진에게 다 줘 버렸다.
“태자가 네게 잘해 주더냐?”
목소리는 섬뜩했다.
“폐하, 태자께서는 죽을 뻔한 저를…….”
“알고 있다. 귀하게 잘 보호하고 있었지. 기특하지 않으냐. 아비를 위해서 어여쁜 어미를 제 궁 안에 모시고 그리도 잘 지키고 있었으니. 상을 내려야지. 암, 상을 내리고말고.”
목 언저리를 더듬던 황제의 손이 옷깃 속으로 파고들어 와 은호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억세게 움켜쥐는 손에 은호가 어깨를 움츠렸다.
조금 전까지 하진의 손으로 덮이고 하진의 입술이 삼키던 젖가슴이다.
그곳에 다른 사내의 손이 닿자 혐오감이 일어났다.
벌레가 전신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벗기랴, 아니면 네가 알아서 벗겠느냐?”
여기서 도망치면, 하진은 죽는다.
은호도 그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황제는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고, 그것으로 지금 자신을 옥죄이며 즐기려는 것이다.
아들과 놀아난 자신의 부정을 다 알고 자신을 압박함으로써 자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거부하면, 하진은 죽을 것이다.
은호가 허리띠에 손을 올렸다.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