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35화 (35/108)

35.

“아아아악!”

화비전이 발칵 뒤집혔다.

“안 돼! 안 돼! 내 아들! 내 아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는 화비를 진정시키기 위해 상궁과 나인들이 그녀의 어깨와 팔을 잡았지만 그 손길들을 뿌리친 화비가 기어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 아들이 죽었을 리가 없어! 우리 진원이가 죽었을 리가 없다고!”

조금 전 황제의 환궁 소식과 함께 화비전에 전해진 것은

‘왕자 진원의 죽음’

이었다.

아직 시신을 모셔 오지 못했지만 시신은 관에 실려 나중에 당도할 것이라는 금환궁 내관이 전한 전언에 화비는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가 깨어난 후 황제를 만나야겠다며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마! 화비마마!”

“마마!”

화비전의 상궁들이 혼비백산해서 화비를 뒤쫓아 나갔다.

기이어 황제를 만나야겠다며 연환궁을 나간 화비는 금환궁 앞에 이르러 금환궁을 둘러싸고 있는 금군에게 가로막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마마!”

금군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길을 열라고 하는 화비를 발견한 좌복야 허연이 화급히 달려와 제 딸을 만류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허연도 진원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지금 황궁으로 속속 입궁하고 있는 대신들은 물론이고, 동묘의 귀족들에게도 진원의 죽음이 전해지고 있는 중이리라.

태자 하진을 견제할 유일한 왕자인 동시에 하진을 제외하고 가장 유력한 황제 후보였던 진원의 죽음은 이 밤, 모두에게 충격을 선사할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그의 사인은 독살이다.

황제가 마시려던 술잔을 그가 대신 마시고 죽었다.

이것은 진원 왕자의 죽음 이전에 황제를 독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더 중대한 문제였다.

“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내 아들이……!”

화비가 저를 붙잡는 허연에게 소리를 질렀다.

황제를 따라 옹주로 갈 때부터 불안했던 것이 이것이었을까.

“왜 내 아들이―!”

화비의 피 맺힌 소리가 금환궁의 뜰을 울렸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은 화비가 제 아비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30년의 세월을 살며 온갖 암투 속에서 살아남은 여인이다.

황후가 되지는 못했지만 황후 못잖은 품격을 가지고 황후가 없는 황궁 안에서 안주인의 역할을 해 왔던 여인이기도 했다.

황제의 장자를 낳았고 오랫동안 황제의 신임을 받아 온 여인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서러운 모양새로 울었다.

그 서러운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물들여 갔다.

*

홍문은 뒤늦게 간자에게서 기별을 받을 수 있었다.

진원 왕자가 독을 마시고 죽은 후 그 죽음은 꽤 오랫동안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간자는 전해 왔다.

진원 왕자의 죽음이 알려지기 전에 황제가 먼저 옹주를 떠났고, 황제가 떠난 후에야 진원 왕자의 죽음이 알려진 것이다.

옹주에 심어 놓은 간자들이 황제의 환궁에 앞서 서둘러 그 일에 대해 알려 오지 못한 까닭이었다.

‘황제의 술잔에 독을 탄 것이 누구지?’

홍문 자신은 아니다.

독으로 황제를 죽일 계획은 없었다.

황제가 독살당하면 그 의혹은 반드시 하진에게로 쏟아지게 되어 있다.

독살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 간단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잃어버릴 것들을 계산한 끝에 독살이라는 방법은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누가 황제의 술잔에 독을 넣은 것일까?

이미 옹주에서는 황제의 음식을 담당하던 나인들과 황제의 처소에 술을 들인 나인들이 전부 문초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입에서 과연 자백이 나올까?

황제를 독살하려고 한 자라면, 아마 실패했을 때의 방법도 생각해 뒀을 것이다.

‘전하께서 모든 것을 뒤집어쓰실 수 있는데…….’

지금 가장 곤란한 것은 그 독살의 배후로 하진이 지목되는 것이다.

물론 하진은 그 일과 전혀 관련이 없지만 황제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대체 누가…….’

황제가 죽어서 이득을 볼 사람.

지금 굳이 황제를 독살해야 하는 사람.

그게 누구일까?

‘전하께서 그러셨을 리는 없고…….’

황제가 죽어 가장 이득을 볼 사람으로는 당연히 하진이 으뜸이다.

하지만 하진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그런 일을 했을 리는 없다.

‘주이염?’

홍문의 생각이 주이염에게 머물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나? 주이염은 지금 딸이 황제에게 볼모로 잡힌 셈이고…… 황제는 황후를 의심하고 있고, 황제가 옹주에서 돌아오면 황후의 부정이 탄로 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으니 주이염으로서는 황제가 옹주에서 죽는 편이 더 낫겠지.’

범인이 주이염일 가능성에 힘이 실린다.

주이염은 젊었을 때 황제의 정적들을 독으로 제거한 전적이 있다.

‘주이염이 화비와 은밀히 밀담을 나누었다더니…….’

주이염이 연환궁의 화비와 은밀히 만났다는 보고는 이미 받았다.

분명히 화비와 모종의 거래가 오갔을 것이고, 어쩌면 그 독살에는 화비도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

‘주이염과 화비가 거래를 했다면 황제를 죽이고 진원 왕자를 황제로 만드는 것에 황후가 도움을 줄 수 있게 주이염이 돕는다는 그런 거래였을 텐데…… 진원 왕자의 죽음은 예측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었을까? 화비는 황제를 죽이려다 제 아들을 죽인 걸지도 모르겠군.’

이 가설이 아마 진실에 가장 근접할 수도 있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화비는 제 손으로 아들을 죽였고, 주이염은 스스로의 무덤을 판 것이다.

‘어리석기는…….’

황제는 운이 좋았고 화비와 주이염은 어리석었다.

그 덕분에 하진만 위험해졌다.

황제는 주이염이나 화비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진원 왕자가 죽었으니 더더욱 화비를 의심할 일은 없다.

그러니까 모든 의심의 칼날은 하진에게로 쏟아진다.

“하…… 돌아 버리겠네…….”

홍문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짜증이 밀려오고 있었다.

완벽한 계획에 균열이 생긴 것에 대한 짜증이었다.

*

“은환궁에 자객이 들었다고?”

하진이 황제를 만날 수 있었던 건 현무전에 들고 나서도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뜨거운 물에 한참 동안이나 몸을 담그고 나온 황제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반나절이나 말을 타고 달려오느라 지친 기색도 역력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예리했다.

“네, 아바마마.”

“잡았느냐?”

“놓쳤습니다.”

“멍청한 것.”

황제의 모욕적인 언사에도 하진이 눈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황후가 태자궁에 있다는 것이냐?”

“네, 아바마마. 은환궁을 습격한 자객과 그 배후를 알아내지 못한 이상 은환궁은 위험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소자가 어마마마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이 태자궁이라 그리하였습니다.”

“어마마마라…….”

황제가 히죽 웃었다.

“어린 계집을 어마마마라고 부르는 기분은 어떠하냐?”

“…….”

“황명을 내리겠다. 너는 지금 당장 옹주로 가서 진원의 시신을 수습하고, 술에 독을 탄 배후를 찾아내거라. 배후를 알아내어 잡아들이기 전에는 동묘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하진이 머리를 조아렸다.

옹주로 가서 독살의 배후를 잡아 오라는 말은 함정이다.

자신을 황궁에서, 동묘에서 내보낸 후에 죄를 물어 죽일 생각인 것이다.

황제는 지금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

독살에 대해서도, 은호에 대해서도.

지금 여기서 옹주로 가지 못하겠다고 하면 이 자리에서 죽임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순순히 옹주로 떠나 줄 생각도 없다.

자신이 황궁을 비우면 은호는 고립된다.

고립된 채로 황제에게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주이염이 은호를 지켜 주겠는가.

‘선수를 쳐야 하나…….’

자신이 살고 은호가 사는 길은 황제를 먼저 치는 길이다.

아비를 죽인 패륜아가 되는 것이 무섭지는 않다.

어차피 패륜은 마음으로부터 오래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어머니 호련 황후가 죽은 그다음부터 하진의 마음속에서 패륜의 싹은 트고 있었다.

아비를 죽이고 말리라.

제 칼로 죽이지 못하면, 말라 죽일 것이다.

반드시 제 손으로 아비를 죽이고, 그 죽어 가는 귓가에

‘이것은 어머니의 복수다’

라고 속삭여 줄 생각이었다.

그게 조금 더 앞당겨질 뿐이다.

칼로 죽이지 않겠다 한 결심을 깨고, 제 칼에 아비의 피를 묻히게 된 것뿐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 귀신의 소굴 같은 황궁에서 이것은,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우스울 뿐이다.

아비는 아들을 죽이려 들고, 아들은 아비를 죽이려 들고.

이건, 황가에 붙은 살이다.

이건, 피를 타고 내려오는 저주다.

아비와 아들,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저주.

그저 안타까운 것은 진원의 죽음이다.

홍문은 훗날에 옥좌에 오르고 나면 진원과 화비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하진은 진원을 죽일 마음이 없었다.

진원이 옥좌에 욕심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진원이 어떤 인간인지 하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호와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었다, 진원은.

맑고 깨끗했다.

하지만 이 황궁에서 맑고 깨끗한 것은, 연약하고 다정한 것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황궁의 독기가 그 순결한 꽃을 살려 두지 않는다.

하진은 진원이 언젠가는 황궁을 떠나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그는 저주를 비껴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황궁의 마물에게 잡아먹혔다.

젊고 순전한 꽃은 그렇게 시들었다.

하지만 애도를 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세상에서 잠들지라도 산 자는 산 자의 세상에서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싸워야 할 길이 남아 있으니.

애도는 먼 훗날에 하자.

먼 훗날에, 옛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때.

그때 일찍 죽은 형에 대해 애도를 하자.

그는 자신의 좋은 형제였다고, 그렇게.

“지금 당장 떠나거라.”

황제의 목소리에 하진이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머리를 숙였지만 하진의 눈빛은 복종하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하진의 눈빛은, 이제 막 본성을 드러내는 맹수의 그것처럼 사납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금단의 꽃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