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31화 (31/108)

31.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은호가 새삼 깨달았다.

이루라는 이 사내가 그랬다.

처음 봤을 때는 말이 없어 무뚝뚝하고 무서워 보였는데 막상 가까이하고 보니 이 사내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순하고 귀여운 성격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사내에게

‘귀엽다’

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이 사내는 귀여웠다.

조금만 당황해도 귀까지 새빨개지며 진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다.

작은 소년이 그리했어도 당연히 귀엽다 생각하겠지만 6척이 넘는 장신의 사내가 진땀을 흘리며 귀를 붉히는 것을 보고 누가 귀엽다 하지 않겠는가.

“엄청 무거워요.”

지금 은호는 이루의 칼을 들고 있다.

이루가 등에 메고 있던 칼은 은호의 가슴 높이까지 올 정도로 길었고 그 너비는 은호의 허벅지만큼이나 두꺼웠다.

칼인지 도끼인지 알 수 없을 정도지만, 이루는 그 칼을 한 손으로 가볍게 다루었다.

“그런데 날이 두꺼워요. 이걸로 어떻게 베는 건가요?”

“마마. 그것은 베는 것이 아니라 주로 부수는 용도입니다.”

“부순다구요?”

은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은 베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칼로 부순다고 하는 것일까.

“날이 있긴 하지만 섬세하게 베는 것에는 어울리지 않고, 힘을 실어 내리쳐 부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

두 손으로 들어도 낑낑거리며 결국 내려놓아야 할 정도로 무거운 칼이다.

이것을 휘둘러서 내리치면 기둥 같은 것들도 단번에 부서질 것이 뻔했다.

이런 것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를 정도면 힘이 얼마나 센 걸까.

“무겁지 않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루가 은호에게서 칼을 받아 들었다.

한 손으로 가볍게 칼을 흔들어 보인 이루가 다시 그 칼을 제 어깨에 메었다.

은호는 두 손으로도 낑낑거리며 들었던 칼을 이루는 손목만 이용해서 아주 가볍게 다루었다.

“모든 분들이 전부 다 그렇게 무거운 칼을 쓰시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보통은 이런 것을 사용합니다.”

이루가 허리에 매달려 있는 칼을 꺼내 은호에게 내밀었다.

그건 은호도 알고 있는 날렵하고 예리한 날을 가진 칼이었다.

“보통은 이런 것을 사용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무거운 쪽을 선호하기 때문에 굳이 써야 할 일이 있다면 무거운 쪽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저도…….”

제법 가벼운 칼을 손에 들고 은호가 조심스럽게 이루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저도 칼 쓰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네?”

순간 당황한 이루가 난색을 드러냈다.

“그냥 너무 무료해서요.”

칼을 돌려주며 은호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시무룩해지는 은호를 보며 이루가 적잖게 당황했다.

“여기서는 할 일도 없고…… 그냥 하루 종일 멍하니 뜰을 쳐다보는 것이 전부고…… 이러다가는 바보가 될 것 같고…….”

“마마…….”

물론 이루도 충분히 이해한다.

칠석의 밤, 부친 몰래 집을 빠져나와 풍등이 가득한 거리를 구경 나왔던 은호가 아닌가.

지금 한창 활기차게 움직이고 또래의 소녀들과 수다를 떨며 즐겁게 지내야 하는 나이에 황후가 되어 황궁에, 지금은 태자궁 안에서 나가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오죽이나 답답할까.

하진은 은호를 태자궁에서 보호한다는 명목이겠지만 은호의 입장에서는 이건 감금이나 다를 바 없다.

측은지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마, 그러하시면…….”

물론 하진이 알면 혼이 날 수도 있다.

홍문이 알면

‘쓸데없는 짓을 잘도 한다’

고 면박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태자 저하께는 비밀로 하고…….”

하진에게는 비밀. 그 말에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

“놀이 삼아 배우신다면 소인이 가르쳐 드릴 수는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은호의 얼굴에 당장 생기가 떠올랐다.

두 눈 가득 생기를 담고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이루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예, 예뻐…….’

미인이라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까이에서 이렇게 웃는 얼굴을 보니 여간 어여쁜 것이 아니다.

보이는 이가 다 귀가 붉어질 정도로 은호는 예쁘다.

물론 불경스러운 의미에서 예쁘다 생각하는 건 아니다.

은호는 하진의 여자다.

하진이 은호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이루도 알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주군의 여자에게 더러운 마음을 품지는 않는다.

이건 순수한 의미에서

‘예쁘다’

라고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 발길을 멈추고,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에 웃음이 저절로 나는 것처럼 주은호라는 이 여자가 너무 순진하고 어여뻐서 뭐든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뿐이다.

“대신 조심하셔야 하옵니다. 만약 다치기라도 하시면 전하께 제가 혼이 납니다.”

“알고 있어요. 고마워요.”

생긋 웃는 은호의 미소에 이루가 슬쩍 뒷목을 긁었다.

뒷목이 간질간질거리고 있었다.

*

“아니!”

태자궁의 뜰에 들어선 왕자 위연이 기가 막힌 나머지 목소리를 높였다.

“나만 빼놓고……!”

하진을 만나러 태자궁에 들어왔더니 이루가 황후와 함께 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목검을 가지고 노는 것이 위연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나를 불렀어야지!”

이루에게 괜히 한번 성질을 부린 위연이 은호의 앞으로 가서 허리를 숙였다.

“마마. 소자 위연이라 하옵니다.”

소자.

그 말에 은호가 위연을 말똥말똥 쳐다봤다.

자신은 황후고 이 청년은 왕자이니 자신에게 이 청년이

‘소자’

라고 부르는 것이 맞긴 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청년이 제게

‘소자’

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물론 하진도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제게

‘어마마마’

라고 부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책봉식과 아바마마의 출정식에서 마마를 뵈었는데 마마께서는 소자를 기억하지 못하실 듯하옵니다.”

“아, 그게…….”

난감해진 은호가 이루를 쳐다봤다.

은호는 위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믿어도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전혀 모른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고자 이루를 쳐다본 것이다.

그런 은호를 향해 이루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도 된다는 뜻이다.

하긴, 지금 모든 이들의 출입이 금지된 태자궁에 들어온 것만 봐도 하진과는 각별한 사이인 것이 분명했다.

“미안해요……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서…….”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혀요! 그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당연하신 겁니다.”

미안해하는 은호를 향해 위연이 손을 저었다.

목청이 크고 표정이 여러 가지다.

약간 과장해서 손을 움직이고 계속 얼굴에 웃음이 떠올라 있다.

하진과는 또 다른 성격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마마, 칼을 가지고 노실 생각이시라면 이루보다는 소자가 더 낫습니다.”

“네? 그게 무슨…….”

“이루는 힘이 무식하게 센 탓에 마마께서 다치실 수도 있지만 보시다시피 저는 낭창낭창해서 절대로 마마를 다치게 할 일은…….”

“풉……!”

낭창낭창하다는 말에 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봐도 위연은

‘낭창낭창’

하고는 거리가 멀다.

황제를 닮아서인지 하진도 그렇고 위연도 그렇고 모두 체격들이 장난이 아니게 크다.

키가 6척이 넘는 이루는 그렇다 쳐도, 하진도 그리고 위연이라는 이 왕자도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다봐야 할 정도다.

얼굴은 개구쟁이처럼 생겼지만 체격은 장정이라 아무리 뜯어봐도 낭창낭창한 몸은 아니다.

“마마. 지금 비웃으신 겁니까? 이러면 또 심약한 마음에 상처를 받는데…….”

위연이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은호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좀 놀아 드리거라. 황후마마께서 적적해하시니 말이다.]

위연이 태자궁에 온 것은 그냥 우연히 온 것이 아니다.

하진이 일부러 자신을 보낸 것이다.

황후와 말벗을 해 주고 웃게 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역할에 자신이 적합하다 여겨서 보내 준 것에 대해 물론 위연은 굉장히 뿌듯해하고 있다.

하진이 자신을 믿어 주는 것이 그저 좋고, 하진이 그런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 자신 외에 없다는 것이 또 좋다.

주은호.

원래 하진의 태자비가 되었어야 할 여자.

그러나 지금은 부왕의 황후가 되었다.

‘형님은 무슨 생각이실까…….’

아직 위연은 하진의 계획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하진은 그 마음에 품은 생각을 홍문 외에는 절대로 나누지 않는다.

아무리 신뢰해도 그 속을 전부 털어놓는 상대는 홍문이 유일하다.

하진이 제 목숨을 맡기고 있는 이루에게도 아마 거기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을 텐데…….’

위연이 아는 것은 머잖아 하진이 세상을 뒤엎을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아비인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내리고 그 옥좌에 앉을 거라는 사실만 위연은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하진이 주은호를 어떻게 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주은호가 이미 황후로 책봉된 이상 하진의 황후가 될 수는 없다.

그건 역모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다.

아비의 아내를 제 황후로 맞이하게 되면 하진을 옥좌에 옹립하는 데 힘을 쏟아 준 귀족들은 전부 등을 돌릴 것이다.

세상에는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 존재하니 말이다.

백성들이 손가락질하는 황제, 귀족들이 비난하는 황제, 하진은 과연 그 오명을 뒤집어쓰려고 할까?

‘뭐, 지금 머리 아프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고.’

위연이 이내 생각을 지웠다.

나중 일은 나중에, 지금은 지금의 일만 하면 된다.

“아, 마마. 그거 아십니까?”

위연이 짓궂게 눈웃음을 지었다.

“네?”

“형님 전하께서 마마를 위해 이곳에 꽃창포의 꽃밭을 하룻밤 만에 만들어 내셨다는 건 모르셨지요?”

“그게 무슨…….”

하룻밤 만에 꽃밭을 만들어 내?

그러면 저 아름다운 꽃창포들은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

“마마께 드리는 형님 전하의 선물입니다.”

위연의 말에 은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저를 위해 뜰 전체를 제가 좋아하는 꽃으로 가득 채운 사내.

저를 위해서.

오직 저 하나만을 위해서.

그런 사내가 세상에 또 있을까.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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