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그리고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폐하께서 친정을 나가시기 전에 은환궁의 나인들을 전부 물갈이하셨습니다. 출정 직전에 왜 갑자기 그러셨을까요? 아시다시피 나인들을 그런 식으로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폐하께서 이전 금환궁의 나인들을 은환궁으로 옮기라 하시고 번을 서는 위군들 역시 금환궁의 위군으로 교체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고작해야 나인 따위인데.”
이건 주이염도 금시초문이다.
‘은환궁의 나인들과 위군들을 바꿨다고? 그것도 출정 전에?’
이건 충분히 이상한 이야기다.
은환궁은 오랫동안 비워진 채였다.
당연히 은환궁에는 상궁도 나인도 위군도 없었다.
그런 것이 황후 책봉식을 앞두고 새롭게 책임 상궁과 나인들이 뽑혔고 위군들 역시 새로 발탁된 자들이었다.
그런데 고작 책봉식 하루 만에 상궁과 나인, 그리고 위군들까지 전부 바꿨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황제가 괜히 그랬을 리도 없다.
의심 갈 만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그리했을 것이고 은환궁의 나인과 위군들을 전부 바꿨다는 것은 일종의 감시 혹은 견제다.
무엇을 위한 감시였을까. 무엇을 위한 견제였을까.
“승상. 폐하께서는 지금 황후마마와 태자를 의심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출정 중이시지만 환궁하시면 가장 먼저 위험해지는 건 황후마마이십니다. 폐하의 성정을 아시지요? 어쩌면 변명의 기회도 없이 바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부정을 저질렀건 저지르지 않았건 그런 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죄의 유무는 폐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요. 그분은 의심만으로 사람을 죽이시잖습니까?”
화비의 말에 주이염도 공감했다.
황제는 다른 누구보다 주이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30년을 곁에서 입 안의 혀처럼 굴며 섬겼어도 황제는 언제든지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인물이다.
의심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자식도 신하도 어느 날 변덕이 일고 의심이 생기면 죽일 수 있는 그런 인물이기도 했다.
은환궁의 나인들을 전부 바꿀 정도였다면 화비의 말대로 은호에게는 변명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마께서 제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미 답은 알고 있다.
은호를 살리는 길을 주이염은 알고 있다.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승상. 승상께서는 한 가지만 해 주시면 됩니다.”
유일한 길은 황제가 죽는 것이다.
황제가 죽어야 은호가 산다.
“폐하께서 붕어하시면 태자가 황제가 됩니다. 그것만 막아 주시면 됩니다. 태자가 황제가 되는 것은 승상께도 결코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황후마마께서 진원 왕자의 손만 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진원 왕자가 옥좌에 오른 후에도 황후마마를 태후로 극진히 섬길 것입니다. 승상께서도 진원 왕자의 성품을 아시잖습니까? 이 황궁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어질고 효심이 지극하다는 것을요.”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자 하는 화비의 욕심, 그리고 딸을 살리고자 하는 자신의 욕심.
그 욕심들이 만나 결국은 또다시 예전의 일이 되풀이된다.
“승상께서는 이미 한 번 그 손으로 황제를 옥좌에 올리셨으니 그와 같은 일을 다시 한 번 더 하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그때도 손을 더럽힌 건 황제 폐하셨고, 지금도 손을 더럽히는 건 승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겠지만 말입니다.”
30년 전, 주이염은 선황의 죽음에 대한 모략을 짜 냈고 선황을 죽인 것은 현 황제다.
그리고 이제 주이염은 다시 현 황제의 죽음을 방관해야 한다, 현 황제를 죽이는 것은 화비가 될 것이다.
그렇게 두 명의 황제의 죽음을 계획하고 방관함으로써 과거에는 제 살 길을 찾았고 지금은 딸의 살 길을 찾으려 한다.
이전과는 달라졌다고, 이전에 없던 권력과 부와 명성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살려고 발버둥을 칠 뿐이다.
자신이 살거나, 혹은 딸이 살거나.
[이 황궁은 고의 항아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문의 목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들 모두는 황궁이라는 항아리에 갇힌 고충에 지나지 않는다는 홍문의 목소리가 지금도 머릿속을 울렸다.
서로 죽고 죽이는 항아리 속, 이 안에서 벗어날 길은 죽음 외에는 없다.
이곳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은, 달아날 길도, 피할 길도 없다.
“폐하는 제가 손을 쓰겠습니다. 승상께서는 그 후의 일을 책임지시면 됩니다.”
이것은, 역모다.
주이염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역모다.
역모로 세운 황제를 다시 역모로 무너뜨리려는 간계다.
제 손으로 황제를 세우고, 제 손으로 황제를 죽이고.
“황후마마의 옥체에 약간의 변고라도 생긴다면 모두 함께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마마.”
승상이 화비에게 경고를 던졌다.
지킬 것이 있는 자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다.
욕심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할까 딸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할까.
아니다.
화비 역시 아들을 지키기 위함일 것이다.
태자가 황제가 되면 진원 왕자는 반드시 죽는다.
태자는 결코 진원 왕자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화비도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자신들은, 아들을, 딸을 살리기 위해 그 아비를, 그 형제를 죽이려 들고 있다.
간교하지만 서글픈 짐승들이 아닌가.
*
은호는 약간의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진과 함께 있을 때는 전혀 무료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막상 태자궁에 혼자 남겨지니 무료해지는 걸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은환궁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이 황궁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가에 있을 때는 어머니의 역할을 자신이 도맡아 했기 때문에 집안일도 돌보고, 부친의 생활도 돌보는 것이 은호의 일이었다.
수도 놓고 책도 읽고 그림도 그렸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몸종 사비와 함께 수다를 떨었었다.
사비가 밖에서 듣고 온 이야기들을 제게 들려주면 그 이야기를 화제 삼아 둘이서 얼마나 웃고 떠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황궁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
저와 수다를 떨어 줄 사람도 없고 자신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서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이렇게 살면 숨이 막힐 것 같아…….’
그렇다고 하진에게 곁을 떠나지 말고 하루 종일 계속 같이 있어 달라고 조를 수도 없다.
그는 태자이고, 황제가 궁을 비운 지금 황제의 대리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런 그에게 할 일을 미뤄 놓고 자신하고만 있어 달라고 하는 건 정말 이기적인 짓이 될 것이다.
‘하진 님…….’
그와 함께 있으면 하루 종일 그 품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몸에서 그의 체취가 풍기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몸 안이 그로 꽉 채워졌다.
은호가 제 아랫배를 조심스레 만졌다.
이 안에 그 사내가 쏟아 놓은 씨물이 가득 찼었다.
여전히 가득 차 있는 느낌이다.
‘잉태를 하게 되는 걸까…….’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은호가 아주 무지한 것은 아니다.
사내가 여인의 몸에 씨물을 쏟아 넣으면 여인은 잉태를 하기 마련이다.
‘하진 님의 아이…….’
황후의 몸이 되어 태자의 아이를 낳으면, 세상은 자신을 뭐라고 손가락질할까.
만약 잉태를 하게 되면, 아이는 정상적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는 하진의 아이로 취급받을까 아니면 하진의 아우로 취급을 받게 될까.
형식상으로는 하진의 형제요, 실제로는 하진의 아이니 그 또한 우습고 서러운 관계가 되지 않을까.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만 기다리거라.]
하진은 한 달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한 달이 지나면 모든 것이 바뀔까.
그가 역모를 꾸민다는 사실 정도는 은호도 알고 있다.
그 역모가 실패하면 하진은 아마 죽을 것이다.
그러니 그 역모가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역모가 성공한다고 해도 자신에게도 좋은 일일까.
‘무엇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실까…….’
자신에게는 무엇 하나 속 시원히 말해 주는 것이 없으니 가슴이 답답하다.
‘내가 미덥지 못한 것이겠지…….’
아니면 자신의 부친을 믿지 못하거나.
“…….”
은호가 살며시 뒤를 돌아봤다.
하진이 곁을 떠나며 자신에게 붙여 준 사람이 한 명 있다.
“저어…….”
말이 없는 과묵한 사내로 표정의 변화도 거의 없는 사내였다.
[이놈은 이루라는 놈인데, 그냥 필요한 대로 쓰거라. 내게 화가 나면 나 대신 이놈을 때려도 좋다.]
하진은 그렇게 말했지만 어떻게 사람을 때리겠는가.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이겠지…….’
하진은 신뢰하지 않으면 사람을 곁에 두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러니까 이 사내는 하진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리라.
하진만큼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사내다.
태자궁 안에서 칼을 차고 있으니 분명 허락받은 무장일 것이다.
“계속 그렇게 서 계시면 다리가 아프지 않으신가요?”
이루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은호의 뒤쪽에 서 있었다.
“저는 괜찮으니 가셔서 좀 쉬셔도 되어요.”
저렇게 하루 종일 서 있는 이루의 다리가 염려가 되었다.
사람이 쇠붙이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한두 시간도 아닌 거의 반나절을 저렇게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들까.
보고 있는 은호의 다리가 아파질 정도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마마.”
무뚝뚝한 표정과는 달리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그러면 앉아 있기라도 하세요.”
문득, 좋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안 그러면 저도 계속 서 있을 거예요.”
그 말에 그가 아주 살짝 웃었기 때문이다.
입술 끝을 실룩이며, 웃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아주 조금 웃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은호는 저 사내가
‘좋은 사람’
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버렸다.
사람은 겪어 봐야 안다고 하지만, 때로는 겪어 보지 않아도 좋은 사람을 아는 경우가 있다.
마음이,
‘좋은 사람’
이라고 느껴 버리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다.
지금처럼 말이다.
“저도 서 있을까요?”
“아닙니다, 마마. 제가 앉겠습니다.”
그 말을 하며 이루가 바닥에 앉았다.
“아니, 거기가 아니라…….”
덕분에 은호가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바닥에 앉으라는 뜻이 아니라 의자에 앉으라는 뜻이었다.
찬 바닥이 아니라.
결국, 은호도 웃고 말았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은호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무뚝뚝한 사내가 보여 주는 엉뚱한 행동에 웃음이 나왔다.
황궁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