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쾌차하셔야지요.]
홍문의 말이 주이염의 귓전에 맴돌았다.
‘의도가 뭘까…….’
절대 호의는 아니다.
자신에게 호의를 보일 자가 아니다.
호의가 아니라면 지금 상황에서 제 편을 한 명이라도 더 만들어 놓으려는 것일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도 늙었나…….’
홍문은 젊었을 때의 자신을 닮았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비굴하게 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간교한 술책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으며 거짓말과 배신은 밥 먹듯이 했었다.
때로는 친구도 버렸고, 살려 달라 애원하는 자들의 목도 베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주이염은 원래 황궁의 문지기 출신이다.
지금이야 세상을 호령하는 초한의 승상이 되었지만 원래 신분은 평민에 하는 일은 문지기에 불과했었다.
문지기였던 주이염이 황제의 눈에 든 것은 황제가 아직 왕자에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현 황제 우윤은 왕자였던 시절부터 혈기를 심하게 부렸고 주위 사람들에게 지나친 언사를 퍼붓는 탓에 모두가 그를 기피했었다.
그런 우윤이 그나마 선황제에게 아주 내쳐짐 당하지 않은 것은 왕자비였던 그녀, 훗날에 호련 황후가 되는 태자 하진의 모친 때문이었다.
그 가문의 힘과 그녀의 어진 성품이 그나마 그의 악행을 희석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 선황이 아끼던 사냥개를 우윤이 때려죽인 일이 있었다.
당연히 선황은 노발대발했고 사냥개를 때려죽인 범인을 잡아 오라 황명이 내려지고 마침 그 시간에 우윤이 그곳에 있었다는 증언이 나올 때 주이염이 저가 개를 죽였다고 거짓 자백을 함으로써 우윤을 살렸다.
아마 그때 주이염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황제는 없었을 것이다.
선황제의 개를 죽인 죄로 주이염은 태장을 서른다섯 대나 맞고 문지기 자리에서 쫓겨났다.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게 겨우 반병신 꼴로 살아남은 주이염이었지만 우윤은 그를 찾아와 보지도 않았고 돌봐 주지도 않았다.
우윤을 먼저 찾아간 것은 주이염이었다.
우윤이 개를 죽인 증거를 들이밀며 입 다물어 주는 조건으로 저를 측근으로 써 달라 협박한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결국 주이염은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때부터 우윤의 곁에서 온갖 악랄한 짓을 저질렀다.
항상 선황제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던 우윤을 부추겨서 황제가 되라고 꼬득인 것도 주이염 자신이었다.
황제가 되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그를 부추겨 형제들을 죽이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그 손으로 아비인 선황제까지 죽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우윤을 등에 업고 여기까지 왔다.
출세해서 어여쁜 아내를 얻었지만 업보였는지 딸을 낳으며 아내가 죽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병이 들어 죽어 가고 있고 딸은 태자궁에 갇혀 생사를 알 수 없다.
이건 업보다.
그동안 자신이 죽인 무고한 자들의 피가 저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업보라면 저 하나의 죽음으로 끝내고 싶다.
은호에게까지 이 업보가 이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젊은 날에 저질렀던 일들을 후회하곤 했다.
그때 그러지 말 것을…… 하고 후회해도 이미 지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런데 홍문이 딱 그렇다.
젊은 날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목적을 위해서는 무자비해질 수 있고 누구라도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내다.
그런 사내가 제게 호의를 베푼다면 그건 호의를 가장한 함정이리라.
“어르신.”
차마 황궁을 나가지 못하고 태자궁 주위를 배회하던 주이염의 곁에 다가선 자는 연환궁의 상궁이었다.
그것도 화비를 섬기는 상궁이 주이염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마마께옵서 잠시 뵙기를 원하십니다.”
“화비마마께서?”
“네, 어르신.”
“화비께서 내게 무슨 볼일이 있으시다고.”
화비의 부친인 허연과 주이염은 악연이다.
서로 얼굴만 봐도 독을 내뱉는 사이에 그 딸인 화비와 자신이 나눌 말은 없다.
“어르신을 꼭 모셔 오라 제게 이르셨습니다.”
쉽사리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상궁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주이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나서 해가 될 건 없었다.
*
연환궁의 화비전으로 들어서는 주이염을 화비가 반색하며 맞이했다.
화비는 호련 황후와 비슷한 나이로, 죽은 주이염의 아내와도 나이가 비슷했다.
젊었을 때의 화비를 주이염은 기억하고 있다.
무척이나 화사하고 우아한 미인이었다, 화비는.
대대로 승상과 좌복야를 배출한 명망 높은 가문의 딸로 기품을 지니고 있었고 오만한 아름다움으로 주위를 압도하는 기백까지 갖추었던 미녀를 주이염은 기억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 그 미모가 조금 빛이 바랬지만 화비의 위엄은 여전했다.
만약 화비가 황후였더라면 지금쯤 황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호련 황후는 심약했고 착한 성품이었다.
눈물이 많았고 거짓을 몰랐던 여인이다.
그러나 화비는 달랐다.
황후의 자리에는 오히려 화비가 더 어울렸던 것이 사실이다.
제 딸인 은호 역시 마찬가지다.
화비가 가지고 있는 이런 당당함은 제 딸에게는 없다.
안타깝게도 은호는 호련 황후를 닮았다.
황궁의 기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 버린 그녀를 닮아 버렸다.
“은환궁에서 있었던 변고에 대해서는 저 역시 너무 놀라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저도 이럴진대 승상께서는 오죽 하시겠습니까? 그래, 마마는 만나 보셨습니까?”
화비는 짐짓 위로하는 표정으로 주이염을 쳐다봤다.
가면을 쓰는 것에 익숙한 여자다.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여자이기도 하다.
“태자 전하께서 태자궁의 출입을 금하신 탓에 아직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승상.”
화비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이 화비전의 주인은 화비다.
그런 그녀가 주위를 경계하는 눈빛을 짓는 것은 아마 지금 그녀가 대단히 중요한 말을 꺼내려 한다는 일종의 과시일 것이다.
“황궁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궁녀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흉흉한 소문이라니요?”
“어젯밤 은환궁에서 일어났던 변고가 실은 태자의 짓이라는 소문입니다. 그리고 태자가 황후마마를 태자궁에 가둬 놓고 입에 담지 못할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입니다.”
“누가 그런 몹쓸 소문을 내고 있는 겁니까?”
주이염의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은호와 태자가 부도덕한 짓을 했다고 소문을 내는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황제는 의심이 많다.
이 소문이 만에 하나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사실 여부를 떠나 은호는 죽은 목숨이다.
어떤 발칙한 것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낸단 말인가.
“황궁에는 벽에도 눈이 있고 천장에도 눈이 있고 밟고 있는 땅에도 눈과 귀가 있는 법입니다. 아무리 쉬쉬하려고 해도 드러날 일은 드러나는 법이지요.”
“그건 마마를 음해하려는 소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자가 은환궁 습격의 배후라는 것도 헛소문으로 치부하실 생각이십니까?”
“태자 전하께서 왜 은환궁을 습격해서 황후마마를 노렸다는 겁니까?”
“황후마마가 계시면 옥좌에 오르는 것이 방해받으니까 그랬겠지요.”
“마마께는 아직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하지만 황후마마의 뒤에는 폐하와 승상이 계시지 않습니까? 폐하의 눈 밖에 난 태자라면 황후마마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화비마마의 말대로라면 왜 은환궁에서 죽이지 않고 태자궁으로 데려가셨겠습니까? 태자궁에서 죽인다면 더는 소문을 감출 수 없어지는데 말입니다.”
“그게 이상하니 다들 태자가 황후마마를 겁간하고 그것으로 위협해서 태자의 자리를 지키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도는 겁니다.”
“말을 삼가십시오. 겁간이라니요.”
“승상. 소문에는 발이 없습니다.”
화비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리고 소문은 양심도 없지요.”
화비의 말이 맞다.
소문은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고 불길처럼 번지기 마련이다.
그 소문에 죽어 나간 이들이 한둘이었을까.
당장 죽은 호련 황후만 하더라도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한 젊은 서생과의 불미스런 소문이 아니었던가.
호련 황후는 절대로 부도덕한 짓을 저지를 성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스스로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자결을 택했다.
은호도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실제로 태자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른다.
“승상께서 저를 도와주시면 저도 승상을, 아니 황후마마를 돕겠습니다.”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까?”
“승상. 황후마마께서는 승상의 말씀만 들을 겁니다. 그렇지요? 황후마마께 다음 옥좌의 주인을 지명할 때 태자가 아니라 진원 왕자를 지명해 달라 청을 해 주십시오.”
“황후께서 옥좌를 이을 차기 황제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폐하께서 유명이 없이 붕어하셔야만 합니다. 폐하께서 유명을 남기시면 그 유명이 우선시되는데 어찌 차기 황제의 자리가 황후마마의 입에 달렸다 생각하는 겁니까?”
“폐하는.”
화비의 눈이 간교하게 빛났다.
“유명을 남기지 못하시고 붕어하실 겁니다. 그러니 승상은 그것만 약조하시면 됩니다. 황후마마께서 제 아들을 황제로 앉힐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 그것만 해 주시면 승상과 황후마마의 안위는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태자도 황제를 죽이려고 들고, 화비도 결국에는 황제를 죽이겠다는 뜻이다.
황제 우윤은 자식에게서도, 제 여인에게서도 버림을 받았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고 다스려도, 결국에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
그 자리가 황제의 자리라면, 그 자리는 저주의 자리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끔찍한 피의 자리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