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주 승상이야 소식을 들었을 테니 당연히 궁궐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와서 딸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겠지.”
“전하.”
홍문이 잠시 망설였다.
주이염의 병에 대해서 태자에게 알려야 하는 걸까?
정확한 병명은 모르겠지만 주이염의 증상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맥도 부정확했고 게다가 맥이 굉장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피가 멎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코피는 시간이 지나면 멎는다.
하지만 주이염의 코피는 한 시간이 지나도 멎지 않았다.
면포로 틀어막으면 지혈이 되어야 하는데 면포만 다섯 장을 넘게 버릴 정도로 출혈은 상당했었다.
‘얼마나 버틸까.’
초오를 약재로 사용해 보라고는 했지만 어쩌면 초오도 소용이 없을 수 있다.
초오는 정말 마지막에 사용하는 극약 처방이지만 초오가 소용이 없어지면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한다.
‘지금 주 승상이 죽으면…….’
주이염이 죽으면 일어날 일들을 홍문은 미리 생각했다.
죽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언제 죽는지가 중요하다.
만약 하진의 즉위 전에 죽는다면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죽더라도 즉위 후에 죽어야 하는데 그 전에 죽게 되면 죽음을 감춰야 하나?’
홍문이 결정을 내렸다.
‘전하께는 알리지 말자. 그리고 주 승상에게 사람을 붙여서 여차하면 시체를 감추고 죽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걸 최대한 미루든가 해야 하겠지.’
결정은 끝났다.
주이염의 병은 하진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당연히 주은호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지금은 하진의 즉위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위험 요소는 단 하나도 남겨서는 안 된다.
죽을 사람은 죽겠지만 그 죽음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주 승상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하진은 눈치가 빠르다.
홍문이 얼른 표정을 바꿨다.
“계속 속셈이 뭐냐고 묻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뭘 해야 황후마마를 놓아주실 거냐는 말은 했습니다. 자신에게 뭘 바라냐구요.”
“바라는 것이라. 그래서 뭐라고 했느냐?”
“아직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시기상조 같아서 말입니다. 주 승상은 약은 인간이라 우리 계획을 알면 어떻게 방해를 놓을지 또 알 수 없으니까요.”
“방해가 되겠느냐?”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죽이지는 마라.”
하진의 말에 홍문이 씨익 웃었다.
물론 속은 뜨끔했다.
하지만 홍문은 속마음을 감추는 것을 잘한다.
“제가 왜 주 승상을 죽이겠습니까?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한 사람을 죽이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걸림돌이 되더라도, 죽이지 말라는 거다.”
“전하.”
“가뜩이나 마음이 여리고 눈물이 많은 여자다. 아비가 죽으면 병을 얻을 거다.”
“……네.”
대답은 했지만 약속을 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불가항력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홍문도 주이염이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초오라는 약재도 알려 줬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주이염이 하진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다.
하진이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게 누구라도 홍문은 죽일 수 있다.
만약 하진이 옥좌에 오르는 일에 주은호가 걸림돌이 된다면, 주은호까지도 죽일 수 있다.
홍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진이다.
하진과 하진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것 외에 중요한 것은 없다.
정확히는, 하진이 만들어 갈 나라가 홍문이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나라와 하진이 만들어 가는 나라가 다르다면, 그때는 하진을 버릴 수도 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하진이지만 그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수 없다면 자신은 하진을 버릴 것이다.
하진을 버리고 꿈을 잡을 것이다.
그것이 이루와 자신의 다른 점이다.
이루는 하진이라는 한 인간에게 붙들려 있지만 자신은 하진의 꿈에 붙들려 있다.
그러나 만약 꿈이 변질되면, 자신은 하진을 버린다. 미련 없이, 버린다.
“옹주 쪽은 어떻게 되었느냐?”
하진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열어 놓은 창문에서 은은한 등나무 꽃향기가 흘러 들어왔다.
태자궁에는 등나무가 제법 많이 심기어 있다.
원래 태자궁에는 등나무와 꽃무릇이 뒤덮고 있었지만 며칠 전에 한쪽의 뜰을 전부 갈아엎고 그곳에 꽃창포를 심었다.
주 승상의 사가에 꽃창포의 정원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하진이 태자궁에도 똑같은 꽃창포의 뜰을 만들어 놓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하루 꼬박, 밤낮으로 내관들이 허리도 펴지 못하고 꽃밭을 만들어 냈다.
은호를 위한 하진의 선물이지만 아마 이 사내는 내색하지도 자랑하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자랑하기보다는 주은호가 웃어 주는 것이 목적인 사내이니 말이다.
“서기연을 부추겨 밀어붙일 수 있는 만큼 밀어붙이라 했습니다.”
서기연은 서북의 젊은 성주다.
원래 서북은 서기연의 부친이 다스리던 땅이지만 작년 가을에 서기연이 성주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온건파인 부친과는 달리 서기연은 과격한 개혁파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내다.
그는 성주가 되기 전부터 과격한 무리들과 어울리며 반황제파를 결성하고는 했었다.
그런 그가 부친에게서 성주의 자리를 물려받고 그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는 이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은 당연하였다.
물론 서기연을 부추긴 것은 홍문이다.
정확히는 홍문이 심어 놓은 간자가 서기연을 부추겼다.
서기연은 자신의 의지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믿고 있겠지만 실제로 그는 줄에 걸려 춤을 추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실의 끝을 쥐고 있는 것은 역시 홍문이다.
이 일은 하루아침에 계획된 것이 아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차근차근 계획되어 온 일이다.
이날을 바라보고 일찌감치 서기연의 주위에 사람을 심었고 다른 귀족들에게도 접근을 해 놓았다.
동묘 곳곳에, 그리고 넓게는 초한 전역에 제 사람을 심어 놓고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게 했다.
1, 2년 걸린 일이 아니다.
길게는 팔 년에서 짧게는 5년.
그 시간이 지나도록 그곳에 뿌리를 내리게 하고 하진과는 관계없는 사람인 것처럼, 완전히 저들의 사람인 것처럼 모두를 속이게 했다.
그런 간자가 서북의 서기연의 곁에도 있다.
그가 서기연을 부추겨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때가 되면 그는 서기연의 목을 벨 것이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간단하다.
아무리 대단한 병력을 가진 군대라 하더라도 수장을 잃으면 끝이다.
머리가 사라지면 나머지는 그저 오합지졸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홍문은 그 머리를 언제든지 날려 버릴 수 있다.
“독은?”
“때를 노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시기상조인 것 같아 잠시만 상황을 두고 보라 일렀습니다. 무엇보다 폐하께서는 의심이 많으셔서 물 한 잔도 기미 없이 드시지 않으니까요. 한 번 실패하면 경계가 심해져 두 번째 기회는 어려울 겁니다.”
“만약 아바마마께서 살아서 돌아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폐하께서 살아 돌아오시면.”
홍문이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효자 노릇을 조금 더 하셔야지요.”
“주은호는?”
“그렇게 되면 황후마마께 약을 쓰겠습니다.”
약을 쓴다는 말을 홍문이 거리낌 없이 꺼냈다.
하진의 미간이 일그러져도 그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며칠만 앓아눕게 만드는 약을 쓰겠습니다. 몸져누우신 분을 건드릴 정도로 폐하도 형편없지는 않으니까요.”
“동묘의 귀족들에게 연판장은 받아 두었느냐?”
“전하. 우복야 심창이 약속을 해 달라 하였습니다.”
“약속? 무슨 약속?”
“심창에게 혼기가 찬 딸이 있는데…….”
“황후의 자리에 제 딸을 올려 달라 하더냐?”
“그러하옵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아직 하진은 태자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하진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한 귀족들 중에서 딸을 가진 귀족이든 딸이 없는 귀족이든 내심 전부 황후의 자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 뻔했다.
젊은 황제의 옆자리.
거기에 제 딸을 올리고 싶어 하는 귀족들과 딸이 없는 대신 양녀라도 들여서 황후가 아니면 후궁으로라도 삼으려는 귀족들이 대부분이다.
욕심 없이 한편에 서려는 자는 없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욕심이다.
그 욕심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용할 줄 아는 자가 승자다.
순진하면 결국 이용당하다가 버려진다.
“심창의 딸 외에 또 제 딸을 황후로 삼아 달라는 자들이 있느냐?”
“몇 명 있지만 그리 영향력이 있진 못하고, 지금으로서는 심창이 가장 유력합니다.”
“심창은 야비한 인간이지. 심창보다야 차라리 허연이 낫지.”
“화비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진원을 어찌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진원 왕자는 죽여야 합니다.”
“때때로, 이건 어쩌면 피를 타고 흐르는 저주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전하.”
“아비를 죽이고 옥좌에 오른 자식은, 다시 그 자식에게 목숨을 잃는 저주. 형제를 죽이고 옥좌에 오른 자의 자식들은 다시 저들 형제를 죽이게 되는 거지. 서로 죽이지 않으면 죽고, 서로를 미워하고 물어뜯는 이것이 저주 아니겠느냐?”
하진이 찻잔을 입술에 댔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하지만 식은 차가 차갑다고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지금 나누고 있는 대회가 그보다 더 차가운 온도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