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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27화 (27/108)

27.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무것도요…….”

몸을 빙글 돌린 사내가 은호를 품 안에 안고 옆으로 누웠다.

전각의 반대 방향으로 눕게 된 은호의 눈에 붉은 꽃의 향연이 들어왔다.

전각의 오른쪽에 꽃창포가 군락을 이룬다면 전각의 반대쪽은 꽃무릇이 넘실거리며 피어 있었다.

보라색과 붉은색의 그 상반된 아름다움에 은호가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꽃무릇은 신기한 꽃이다.

가을에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지고 나면 그제야 잎이 올라와 겨울을 지내고 늦봄이 되면 시들어서 지는 그런 꽃이다.

꽃과 잎이 만날 수 없는 꽃.

꽃이 져야만 잎이 나오는 꽃.

반대로, 꽃이 지기 전에는 잎이 나오지 않는 꽃.

어쩌면 하진과 자신도 그런 관계가 아닐까.

함께할 수 없는 관계.

같이 피고 같이 지고 싶지만 한쪽이 피면 한쪽은 져야 하고, 한쪽이 져야 한쪽이 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닐까.

황제와 함께 황후인 자신이 시들어야 하진이라는 잎이 활짝 필 수 있고, 하진이라는 잎이 피기 위해서는 자신이 시들어야 하는 그런 관계.

결코 함께 피고 함께 시들 수는 없는 관계.

그런 것이라면 참 서러운 관계다.

“왜 꽃무릇을 심어 놓으셨어요?”

“독으로 쓸 수 있으니까.”

사내의 거침없는 대답에 은호가 그 대답마저도 이 사내답다고 생각을 했다.

독으로 쓰기 위해 꽃을 심어 놓는 사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부자간의 천륜도 저버릴 수 있고 누구든지 이용할 수 있는 그런 사내.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사내.

“아름다운 꽃을 독으로 쓰시다니요…… 나쁜 분이시네요…….”

이 사내가 저를 사랑한다고 믿고 싶다.

이 사내가 제게 미쳐 있다고 믿고 싶다.

저를 향한 이 사내의 마음이 순수하다고,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이 사내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그것이 그저 서럽다.

꽃을 독으로 사용하려고 심은 사내에게 자신도 어쩌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어 마음이 서글퍼진다.

아름다운 꽃도 이 사내에게는 독에 지나지 않다면, 자신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가슴이 아픈 이유는, 이 사내를 마음에 담아 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사내를 마음에 담은 것일까.

하지만 한순간에 가슴을 열고 들어와 자리를 잡아 버린 이 마음을 어쩌란 말인가.

속수무책으로 가슴을 잡아 열고 거침없이 들어와서 이미 마음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해 버린 이 사내를 내쫓는 방법을 은호는 모른다.

이것이 처음 느끼는 마음이라서 더 그렇다.

은호는 이런 감정에 면역이 없다.

사내, 사랑, 이런 것에 면역이 없다.

누군가를 좋아해 보는 것도 이것이 처음, 누군가에게 두근거리는 것도 이것이 처음, 누군가에게 이토록 강렬한 구애를 받는 것 역시 이것이 처음이다.

처음 경험해 보는 탓에 면역이 없이 그저 받아들이고 그저 앓을 뿐이다.

‘가슴이 아파…….’

이것이 사랑을 앓는 것일까.

사랑앓이.

사랑을 앓는 것이 무척이나 아프고 힘들다는 주위의 하녀들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아, 그렇구나 하고 남의 일처럼 여겼던 것이 이제 자신의 일이 되었다.

약도 없다는 사랑앓이.

이 사내도 저처럼 사랑을 앓고 있을까.

자신이 불안한 것처럼 이 사내도 불안할까.

자신이 가슴 아픈 것처럼 이 사내도 가슴이 아플까.

아마, 아닐 것이다.

앓는 것은 자신 혼자일 것이다.

사내는 그가 자신에게 구걸하고, 매달리고, 구차하게 군다고 했지만 이 관계에서 절대적인 강자는 이 사내다.

결국은 사내가 원하는 대로 자신은 흔들리고 휘둘리고 이끌려 간다.

사내는 자신이 강자고 그가 약자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약자에 불과하고 이 사내가 강자다.

모든 것은 이 사내의 뜻대로다.

“독으로 쓸 수 있으면 써야지. 쓸 수 있는데도 쓰지 않으면 바보니까.”

저도 독으로 쓰실 건가요? 그 말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이 사내가 자신에게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만약 꽃무릇처럼 자신을 독으로 쓰려는 것이라면, 자신은 이 사내에게 어떻게 독으로 쓰일까.

“꽃무릇은…….”

저를 끌어안은 사내의 팔을 어루만지며 은호가 중얼거렸다.

“꽃무릇의 잎은 꽃을 기억할까요…….”

꽃이 진 후에 피어난 잎은 그 꽃을 기억할까.

꽃의 흔적을 보고 자라난 잎은 그 꽃이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 줄까.

꽃이 지면 잎은 그것을 알까.

꽃과 잎은 서로를 기억하고 그리워할까.

비슷한 꽃을 알고 있다.

상사화.

잎이 먼저 피어나고 잎이 진 다음에 꽃이 피는 그런 꽃을 알고 있다.

잎과 꽃이 서로를 그리워해서 지어졌다는 상사화라는 꽃.

꽃무릇도 상사화처럼 서로를 그리워할까.

만약 이 사내가 모든 원하는 것을 손에 넣게 되면, 그때 자신들이 함께하지 못해도 사내는 자신을 그리워해 줄까.

아마 자신은 이 사내가 항상 그리울 것이다.

지금 함께하는 이 순간 역시 계속 그리울 것이 분명하다.

사내도 그렇게 그리워 해줄까?

“보지도 못한 꽃을 기억할 리가 있겠느냐, 꽃이 지면 겨울이 시작되고, 잎은 겨울을 날 준비를 해야 하는 법. 모진 겨울을 나야 하는 잎에게 꽃을 그리워하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지.”

하진의 말에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것을 은호가 살며시 참았다.

“그리워하면 좋겠느냐?”

“……네…….”

“그리움이 뭔지 아느냐?”

은호의 귓가에 사내의 숨결이 번졌다.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한데 사내의 숨결은 뜨거웠다.

저를 안고 있는 사내의 품은 여전히 뜨거웠다.

“잡아야 하는데 잡지 못해 애를 태우는 것이 그리움이다. 함께 있고 싶은데 함께 있을 수 없는 것이 그리움이다. 손잡고 싶은데 그 손을 놓아야 하는 것이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나는 손을 놓지도 않을 것이고, 내게서 떨어뜨려 먼 곳에 보내지도 않을 것이니, 내게 그리움은 없다. 나는 일생 너를 그리워할 일은 없을 거다. 너는 평생 여기, 내 품에 있을 테니까.”

은호를 끌어안은 사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놓지 않아.”

속마음을 들켜 버렸을까.

사내를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는 속마음을 들켜 버린 걸까.

아니면 이 사내가 좋은 나머지 사내에게서 멀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킨 것일까.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을 두려워할 만큼 이 사내가 좋아진 것을,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을 그만 들켜 버렸을까.

“한 나무에 함께 피고 지는 자귀꽃처럼 나는 이렇게 너를 안고 갈 것이다.”

사내가 작게 웃었다.

“꽃무릇을 전부 파내고 그 자리에 자귀나무나 심어야겠구나. 너를 불안하게 만드니 치워 버려야지.”

“그렇게까지는…….”

“그리워하지 마라. 너는 일생 나를 그리워할 일이 없을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니까.”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저 시원하고 다정하기만 한 이 바람이 언제 거센 폭풍이 되어 밀어닥칠지 알지 못하지만 이 사내를 믿어 볼 생각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단 하나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자.

자신에게는 남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도 없고 용기도 없다.

그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그런 자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이 사내를 믿는 것이다.

믿는 것은 할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라면, 믿는 수밖에 없다.

“이제 슬슬 조반을 먹을까?”

사내가 은호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배가 고파서 조반을 먹지 않으면 너를 먹어 버릴 것 같다.”

그 말에 은호가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웃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배가 고팠다.

어젯밤도, 지금도 너무 격렬하게 움직여서 배가 고파 왔다.

“조반을 먹고, 간식으로 너를 먹을 셈인데…….”

사내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은호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더듬었다.

다시금 단단해진 사내의 음경이 제 뒤쪽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을 은호도 느꼈다.

“아니면 지금 간식을 먹고 잠시 후에 조반을 먹을까?”

사내의 속삭임에 은호가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먹어 주세요…….”

배가 고프지만, 지금은 이 사내가 더 고프다.

지금은 이 사내를 조금 더 느끼고 싶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지금은 이 사내만 느끼고 싶다.

몸 안 가득 이 사내로 채우고, 이 사내로 배부르고 싶다.

다시 저를 안아 오는 단단한 손과 저를 물어뜯는 입술, 그리고 제 아래쪽을 문지르는 뜨겁고 단단한 살덩이에 신음하며 은호가 사내에게 매달렸다.

열이 식지 않았다.

도무지 이 열이 식지 않았다.

식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전신에 열이 끓어올랐다.

*

“너무 일찍 수태를 하시면 곤란합니다, 전하.”

홍문이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움직였다.

붓을 들어 서신을 써 내려가던 홍문이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진이 주은호를 어떻게 하지 못할 정도로 귀애한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하진은 하루 종일 태자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태자궁 안에 있으면 아침부터 밤까지 발정이 난 짐승처럼 교접만 했다.

‘굶주린 짐승도 그렇게까지는 안 할 텐데…….’

하지만 태자에게

‘발정난 짐승’

이라는 표현을 쓸 수는 없다.

물론 홍문의 눈에 비치는 태자는 그냥 발정 난 짐승이다.

이성이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홍문이 아는 하진은 이성적이고 냉철한 인간인데 주은호의 일이라면 가끔 나중 일을 생각하지 않는 짐승처럼 구는 경우가 있다.

“적어도 서너 달 후에 수태를 하셔야지…… 지금은 곤란합니다. 아주 곤란하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 그리 구십니까?”

“내가 고자도 아닌데 참아야 한다는 것이냐?”

하진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홍문의 가랑이를 향했다.

그 말에 홍문의 귀가 화끈 달아올랐다.

‘너는 고자라서 모르겠지만 나는 고자가 아니라서 참지 못한다.’

라고 그 시선이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이염이 다녀갔습니다.”

헛기침을 하고 홍문이 말을 돌렸다.

고자라니.

그저 사용만 안 하고 있을 뿐인데 고자라니.

홍문의 얼굴이 화끈화끈거렸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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