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포개졌던 입술이 떨어지며 하진의 속삭임이 숨결과 함께 은호의 얼굴에 번졌다.
“이건 유혹이지?”
은호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불어오는 바람이 이제 더는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뜰을 가득 메우고 있는 보라색 꽃창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에 들리는 것은 하진의 목소리, 눈에 보이는 것은 하진의 얼굴뿐이다.
제 얼굴에 번지는 숨결과 저를 바라보는 뜨거운 눈동자.
그에게 잡힌 건지, 아니면 저가 잡은 건지 알 수 없지만 맞잡은 손가락이 뜨거웠다.
뒷목으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머릿속이 열기로 뿌옇게 흐려져 생각이 정돈되지 않았다.
“서툴지만, 유혹이겠지?”
유혹.
아니다. 유혹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은 오해를 하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자신이 이 사내를 무서워한다고, 싫어한다고 이 사내가 저를 오해하는 것이 싫어서 손을 잡았을 뿐이다.
그런데 유혹이라니. 그런 것이 아니다.
“유혹이 아니라…….”
“유혹이 아니면?”
대답할 말이 없다.
사내의 손에 닿은 등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뜨거웠다.
하진이 은호에게 바짝 다가섰다.
은호에게로 바짝 다가선 하진이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왜 대답이 없지? 유혹이 아니면?”
그 얼굴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은호의 숨이 가빠졌다.
눈과 귀가 먼 것처럼 느껴졌다.
이 공간에 아무것도 없이 이 사내와 저, 단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무도, 풀도, 새도, 바람도 없는 곳에 사내와 저만이 존재하고, 이 사내의 숨결과 제 숨결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
“유혹이 아니면, 드디어 나한테 반한 걸까?”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주은호.”
하진의 목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휘감기자 은호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볼 수가 없었다.
너무 가까워진 얼굴이 제 얼굴을 덮는다 싶더니 사내의 입술이 다시 제게 덮여 왔다.
익숙한 감촉의 입술이 제 입술을 덮더니 젖은 혀가 틈새를 핥으며 입술 사이로 파고들어 왔다.
등으로 전율이 흘렀다.
이 사내와 입을 맞추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밤에도, 어젯밤에도 입을 맞춘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셀 수 없는 입맞춤에서 느끼지 못했던 전신을 울리는 이 강렬한 전율이 어디에서 피어오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으응…… 읏…….”
하진의 혀에 휘감기며 은호의 숨소리가 입술 밖으로 샜다.
“으응…… 응…… 응…….”
자꾸만 새는 신음 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제 입 안을 휘젓는 하진의 혀에 머릿속이 마비가 되어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등줄기가 떨리고 다리 사이가 화끈거렸다.
무릎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후들거리는 다리는 하진의 손을 잡지 않았다면 벌써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하진의 손이 등을 받쳐 줘서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하진의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의 입술과 이어진 타액이 은실처럼 길게 이어지다 툭 하고 끊어졌다.
제게서 떨어진 사내의 입술을 더 느끼고 싶은 나머지 은호가 사내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제 입술까지 닿지 못한 그녀의 혀에 하진이 마찬가지로 혀를 내밀어 그 끝을 핥았다.
허공에서 서로를 향해 뻗은 혀를 핥자 질척거리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귀를 울렸다.
그것도 잠시, 제게로 매달려 오는 은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끌어안은 하진이 맹렬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숨결과 타액까지 전부 그에게 삼켜지며 은호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벅찬 희열은 처음이었다.
이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언제 자신에게 심어진 것일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이 잠들었던 사이에 누군가 이 마음을 자신 안에 심어 놓고 도망간 것일까.
“하아…… 하아…….”
다시 입술을 떨어지자 은호가 새빨개진 얼굴로 하진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 더는 두려움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더는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진도 이미 알아차렸다.
그 눈동자에 깃든 감정은 자신을 바라는 여인의 그것이었다.
“젖었느냐?”
하진의 속삭임에 은호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젖었구나.”
그의 말이 맞다.
지금 은호의 다리 사이는 습기로 축축하게 젖었다.
이 사내와 입을 맞추며 그만 속곳을 흠뻑 적시고 말았다.
자신의 몸은 얼마나 음란하게 변한 것일까.
“여기서 할까, 아니면 안으로 들어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여기서. 여기서?
이곳은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자신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여기서?
“태자궁 안에 있는 놈들은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놈들이다. 내가 보라고 하면 보고 보지 말라고 하면 보지 않지. 내가 들으라고 해야만 비로소 들을 수 있는 놈들이니 여기는 우리 둘뿐이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을까.
눈도 없고 귀도 없다니.
그건 그런 척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사내라면 정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할 것 같았다.
이 사내는, 이 입술로 하는 모든 말을 반드시 이루어지게 할 것만 같았다.
“여기서…….”
어떻게 이런 대담한 말이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지 은호도 알 수 없었다.
홀린 것 같았다.
하진이라는 이 사내에게 홀려서 지금 자신은 제정신이 아니다.
미친 것이다.
[내가 네게 미친 것처럼 너도 내게 미치는 거다.]
그 말대로, 지금 자신은 이 사내에게 미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이건 네가 먼저 유혹한 것이다.”
그녀가 먼저 매달려 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은 건지 하진의 눈동자는 지금까지 은호가 본 것 중에서 가장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기분 좋을 때는 이 남자의 사나운 눈매가 굉장히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은호가 지금 겨우 깨달았다.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진의 손이 그녀의 치맛단을 걷어 올린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
“언제부터 이러신 겁니까?”
붉은 피가 묻은 면포를 건네받자 새 면포를 건네며 홍문이 혀를 찼다.
주이염의 코에서는 아직 피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코를 틀어막아도 이내 면포를 흠뻑 적실 정도로 출혈은 심했다.
벌써 두 장의 면포를 버렸다.
그리고 이게 세 번째 면포다.
‘얼굴이 창백했던 것이…….’
최근 들어 주이염의 안색이 좋지 못하던 것이 딸을 황후로 만들고 걱정을 하느라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진짜 원인은 이것이었다.
“피곤해서 그런 것이네.”
“그런 것치고는 코피가 너무 오래 흐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러다 멎을 걸세.”
“제가 맥을 짚어 봐도 되겠습니까?”
홍문의 말에 주이염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자가 의술도 아는가?’
홍문이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주이염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의술도 할 줄 아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제가 의술은 모르지만 독과 약에 대해서는 공부를 해 본 적이 있는지라 아주 조금은 맥을 짚을 줄도 압니다.”
“의원에게 보였네. 별것 아닌 과로라고 들었으니 자네도 신경 쓰지 말게.”
“어르신.”
홍문이 소매를 걷고 주이염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주이염이 손목을 잡아 올렸다.
“뭘 하는 건가?!”
“얌전히 계십시오.”
주이염의 손목을 잡은 홍문이 그 맥을 짚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홍문의 처소였다.
태자궁의 바깥쪽에 작게 마련된 처소는 홍문이 밤낮으로 거하며 태자와 이런저런 논의를 하는 곳이기도 했다.
홍문은 황궁 밖에 사가가 없다.
황궁 안에서 태자가 마련해 준 이 작은 처소가 그가 머무는 유일한 곳이다.
온통 책으로 가득하고 앉을 자리 누울 자리도 없이 빽빽하게 책만 쌓여 있다.
책장에 들어가지 못한 책들이 바닥에 산처럼 쌓여 있어서 사람이 지나다닐 길도 부족했다.
그 구석진 곳의 작은 공간에 겨우 의자 하나가 있고, 그 곁에 모포가 있다.
밤잠을 자는 일이 거의 없는 홍문은 어쩌다 눈을 붙일 때도 그저 모포를 몸에 둘둘 휘감고 찬 바닥에서 책을 베고 자는 것이 전부다.
게으름이나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내다.
태자의 가장 신임을 받는 측근으로 얼마든지 권력을 휘두를 수 있고, 뇌물을 받아서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지만 이 사내는 뇌물과는 거리가 멀고 안락함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
[돌에 물감을 칠한다고 보석이 되겠습니까?]
옷이라도 화려하게 입지 그러냐는 하진의 말에 홍문은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었다.
어차피 자신의 외모는 꾸민다고 가려지는 것도 아니고, 화려하게 치장한다고 해서 곱게 보일 외모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시간에 차라리 쓸모 있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 홍문의 생각이다.
“약은 드시고 계십니까?”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잘 챙기고 있네.”
“고아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뜬금없는 홍문의 질문에 주이염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인가?”
“고아라는 건, 세상에 자기 피붙이라는 것이 없는 겁니다. 아무리 화려한 자리에 올라가도, 아무리 부귀영화를 얻어도 돈과 권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까요. 따님을, 황후마마를 정말 걱정하신다면 오래 사셔야 할 것입니다. 가뜩이나 심약하신 분께서 부친을 잃게 되면 그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 딸을 걱정해 주는 것인가?”
주이염의 눈에는 홍문을 믿을 수 없다는 의혹이 가득했다.
홍문이라는 자를, 아니 태자 하진을 믿을 수가 없다.
그가 지금 은호를 볼모로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지금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은호는 태자궁에 갇혀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이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가뜩이나 황제는 의심이 많다.
황제가 황궁을 비운 동안 아무리 괴한의 습격이 있었다 하더라도 황후가 태자궁에 며칠씩이나 격리되어 있었다고 하면 분명 황제는 의심할 것이다.
지금 은호가 붙잡아야 할 끈은 황제다.
그런데 그런 황제가 은호를 의심한다면? 20년 전 호련 황후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초오를 써 보셨습니까?”
“초오?”
“독성이 강하긴 하지만, 예로부터 독으로 독을 제압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어르신의 병증이 위중한 듯하니, 초오를 써 보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이 사내가 왜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인지 주이염은 그것이 의심스러울 따름이었다.
왜?
자신을 도와줘서 뭘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