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은호의 잠을 깨운 것은 지저귀는 새소리였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맑고 경쾌한 새소리에 은호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른해…….’
눈은 떴지만 전신이 나른했다.
아직 잠이 덜 깬 것처럼,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나른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며 옆으로 돌아눕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짙은 보라색의 꽃잎을 가진 꽃창포였다.
‘예쁘다…….’
화병에 소담하게 꽂혀 있는 꽃창포를 보며 은호가 눈을 깜빡였다.
꽃창포는 은호가 좋아하는 꽃이다.
향기는 없지만 그 아름다운 보라색의 꽃잎이 너무나 예뻐서 꽃 중에서는 꽃창포를 가장 좋아했다.
언젠가 부친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손에 꽃창포 몇 송이를 들고 왔었다.
그것을 집안 뜰에 심어 놓고 부친은
‘지금 강변에는 꽃창포가 흐드러지게 폈더구나. 너도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 가져왔다.’
라고 말씀하셨었다.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 딸을 위해 강변에 아름답게 핀 꽃을 가져와 집 안에 심어 주던 그런 부친이었다.
집밖 출입을 금한 것은 하나밖에 없는 딸이 행여나 나쁜 사람들을 만나 해를 입을 것을 염려해서였다.
부친은 항상 노심초사 자신을 걱정했었다.
겨울이면 눈이 와서 춥다고 걱정, 여름이면 날이 더워 쓰러질까 걱정, 가을이면 찬바람이 불어 고뿔이 들지 않을까 걱정.
항상 그랬었다.
승상 정도의 직위면 후처를 얻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부친은 후처를 들이지 않았다.
일찍 죽은 어머니에 대한 마음과, 어머니가 남기고 간 딸을 보살피는 것이면 족하다는 것이 부친의 생각이었다.
일생 한 여인밖에 사랑하지 않은 부친이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면 부친 같은 사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부친처럼 일생을 오롯이 한 여인만 바라보는 사내.
다른 여인에게는 곁눈을 주지 않는 사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꽃창포를 꺾어다 주는 사내.
‘여기는…… 태자궁이었지…….’
어젯밤에 은환궁에서 태자궁으로 거처를 옮겨 왔다.
밤에 그 소란이 있은 후에 이곳으로 옮겨 와 새벽녘이 되어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잠이 늦게 든 것은 그 사내 하진이 저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몰라…….’
은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새벽까지 자신을 끌어안고 몇 번이나 제 몸 안에 씨물을 쏟아 내던 사내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 숨소리와 제게 닿아 오던 살결의 온도, 그리고 저를 만지던 손, 제 몸 안을 들락거리던 뜨겁고 굵은 사내의 양물까지 전부 기억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품에 안겨 잠이 들었었다.
‘누가 옷을 입힌 것일까…….’
지금 은호는 야장의를 입고 있다.
분명히 알몸으로 잠이 들었었는데 누가 자신의 몸에 옷을 입힌 것일까.
게다가 온몸에 사내의 타액과 씨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들이 전부 말끔하게 닦여진 채다.
‘상궁을 시켰을까 아니면…….’
그 사내가 직접 닦았을 리는 없다.
그러면 상궁을 시켰을까?
태자의 품에 벌거벗은 채로 안겨 온몸에 음란한 것이 얼룩진 자신을 보며 상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치도 모르는 계집이라고 생각했을까?
‘부끄러워…….’
이미 지나간 일이고, 잠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낯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때였다.
창가의 휘장이 너풀거렸다.
그 너풀거림을 보며 그제야 은호가 창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너풀거리는 휘장 사이로 창턱에 누군가 팔을 기대고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람이 부는 휘장 사이로 보이는 사내는 하진이었다.
“오늘 날씨가 유난히 좋은데, 나와 보겠느냐?”
햇살을 등지고 서 있어서 그런 것일까?
하진의 얼굴이 유난히 눈부신 까닭은 그의 얼굴에 햇살이 비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햇살이 얼굴에 내려앉아 저를 향한 눈빛이 따뜻하게 보인 건지도 모른다.
“꽃창포가 흐드러지게 폈는데, 보고 싶지 않으냐?”
사내의 웃음이 꼭 바람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휘장을 흔드는 바람처럼 사내의 웃음이 은호의 가슴을 간지럽게 흔들었다.
따사로운 바람이었다.
*
“저어…… 아버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하진과 함께 뜰을 걷던 은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쯤이면 지난밤에 있었던 일이 부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분명 걱정하고 계실 거야. 그러니까 만나서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려 드려야 하는데…….’
딸밖에 모르는 아버지다.
분명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며칠만 기다려라.”
“하지만 걱정하실 겁니다.”
“너는 무사하다고 벌써 알려 드렸다.”
“하지만…….”
“범인을 잡기 전에는 이 태자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태자궁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물과 음식은 철저하게 기미를 한 후에 들여보내라 했다. 한 번 죽이려 든 놈들이 두 번 해코지를 못하겠느냐. 그러니 안전하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는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태자궁 밖으로는 단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
하진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부친은 절대로 자신을 해칠 분이 아니다.
부친은 만나게 해 줘도 되지 않을까?
“잠시 얼굴만 뵙는 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까?”
“며칠 사이에 아비가 죽기라도 하겠느냐?”
“그건 아니지만…….”
“편지를 쓰면 그건 전해 줄 수 있다.”
편지.
직접 만나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가장 좋지만 편지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한 달만 참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진은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그제 저와 보폭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것을 은호도 알고 있다.
저보다 훨씬 보폭이 넓은 사내가 저를 위해 지금은 보폭을 좁히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분명 이 사내가 화병에 꽃창포를 꺾어다 놓았을 것이다.
저를 위한 사소하지만 다정한 배려다.
무섭기만 한 황궁에서 이 사내는 은호가 알고 있는 유일한 다정함이다.
이 사내도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지금은 다르다.
눈이 그치고 처음 만나는 바람이 무섭고 차가운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바람이 머물다 간 가지 끝에 연한 새순이 맺히는 것처럼 이 사내도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무섭고 차가운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이 사내의 눈 끝에, 입술 끝에, 그리고 손끝에 다정한 배려가 맺히는 것을 알았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꽃망울이 맺히듯이 이 무서운 황궁이라 할지라도 사내의 곁에 있으면 봄이 오지 않을까.
지켜 주겠다는 이 사내의 약속 그대로, 눈을 감았다 뜨면 봄이 성큼 다가와 있지 않을까.
사내의 곁에서 얌전히 걷던 은호의 발이 멈췄다.
사내가 말한 꽃창포가 흐드러지게 핀 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뜰 가득 아름다운 보라색의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초록의 잎에 보라색의 아름다운 꽃잎이 넘실거리는 풍경을 말도 못 하고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은호의 손을 사내가 살며시 잡아 온 것은 그때였다.
제 손을 잡아 오는 단단하고 큰 손에 은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은 꽃창포를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잡은 손에 머물렀다.
심장의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리지 않을까 괜한 걱정까지 들었다.
꽃이 아름답다는 말도 못 했다.
귀까지 달아올라 꼭 다물고 있는 입술 사이로 숨을 작게 내쉬는 것이 전부였다.
가슴이 터질 것 같고, 잡은 손이 뜨거워서 자꾸만 땀이 차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은 어젯밤의 정사가 너무 격렬했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댈 수 있을까.
“내가 무섭겠지만.”
하진의 목소리가 가슴과 등줄기와 다리를 울려 그만 주저앉을 뻔했다.
“그렇다고 손만 잡았는데 이렇게 떨 것까지야 없을 텐데.”
무서워서 떠는 것이 아니다.
“설마 내가 널 잡아먹겠느냐?”
무서워서 떠는 것도 아니고, 싫어서 떠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건 오해’
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떠는 것이라고 어찌 말한단 말인가.
“언제쯤 되어야 네가 나를 무서워하지 않을까?”
무서워하지 않아요.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그 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다.
결국 은호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고 입술만 달싹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그때였다.
사내가 잡고 있던 손을 놓아준 것이다.
‘아…….’
제 손을 놓는 사내의 손에 은호가 크게 당황했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더 잡고 있고 싶었다.
‘손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저를 놓는 사내의 손을 꽉 붙잡았다.
매달리듯 그 손을 꽉 잡자 사내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왜?”
사내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꼭 꽃잎 위로 부는 시원한 여름날의 바람 같은 미소가 섞인 목소리였다.
“나와 줄다리기라도 하고 싶은 것이냐?”
짓궂고 장난스런 목소리.
“내가 잡으면 도망치고, 내가 놓으면 네가 잡고. 이건 줄다리기냐 아니면 술래잡기냐?”
“…….”
속마음을 들켰다.
놓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전부 들킨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를 어쩌지?”
사내가 저를 꽉 쥐고 있는 은호의 손가락을 풀었다.
다시 놓쳐 버린 사내의 손을 은호가 다시 붙잡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내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나는 밀고 당기는 것보다는 내 쪽으로 확실하게 당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사내의 손에 허리가 감긴 채로 은호의 얼굴이 위로 올려졌다.
사내가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린 것이다.
“나는 애초에 술래가 숨을 곳을 전부 부수고 내 눈 앞에서 절대로 숨지 못하게 하는 것을 더 즐기는데, 이를 어쩌지? 나와는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도, 술래잡기도 못 할 텐데.”
“그런 것이 아니라…….”
입술을 열자 은호의 목소리가 더운 숨을 머금고 흘러나왔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손이 따뜻하고…… 손이 그냥…….”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입술에서 의미가 없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 눈을 마주치고 있는 사내에게 혼이 나간 듯 입술은 제멋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내 술래는, 도망치지도 못하지. 내가 그걸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멍하니 바라보는 은호의 눈동자에 사내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입술이 포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