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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23화 (23/108)

23.

“은환궁에 자객이 들었다는 것이냐?”

뜻밖의 소식에 화비가 눈살을 찡그렸다.

“네, 마마. 은환궁의 상궁과 궁녀들이 모두 목숨을 잃고 황후마마만 살아나셨다 하옵니다.”

“허, 참…….”

기가 막힌 소식에 화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황궁에서 3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화비는 아직까지 황궁 안에서 그런 식의 참변이 일어난 것은 보지 못했다.

황궁 안에서 암투를 벌이느라 독을 사용하거나 모함을 해서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은 비일비재했어도 이 황궁 안에서 칼을 쓰는 자객이, 그것도 은환궁에 침범해서 사람을 죽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대담한 자로구나.”

황궁 내부인의 소행이다.

외부에서는 황궁의 담을 넘어올 수가 없다.

황제는 형제들을 죽이고 옥좌에 올라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옥좌를 찬탈할 수 있다는 의심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

황제의 눈에는 아마 모든 이들이 자신의 옥좌를 빼앗으려는 자로 보일 것이다.

그런 황제이기 때문에 황궁의 수비는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문이 아니고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높은 성벽, 그리고 그 문마저도 이중으로 만들어져 문을 통과해야 또 다른 문을 통과할 수 있다.

수상한 외부인은 절대로 황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게다가 황궁 내부에 번을 서는 위군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거기에 다른 곳도 아닌 은환궁.

황제가 머무는 금환궁 다음으로 황궁 안에서 경비가 삼엄한 곳이 은환궁이다.

그런데 은환궁의 위군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은환궁의 궁녀들을 죽이다니, 황궁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도 남을 일이다.

만약 황제가 황궁을 비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황궁 전체가 들쑤셔지고 있을 것이다.

황제의 성격상 범인을 색출할 때까지 황궁 안의 위군들과 상궁들이 주검이 되어 수레에 실려 나가고 매일 인두로 살을 지지는 냄새가 황궁을 뒤덮고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황제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옥좌에 대한 도전’

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징벌 역시 참혹하다.

황제의 치세 기간 동안 초한 전역에서 크고 작은 반란들이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그 반란을 진압하며 황제는 반란이 일어났던 땅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일절의 용서는 없었다.

아마 서북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전부 태워 버릴 것이다.

그런 황제가 만약 은환궁이 습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옹주 친정에서 황제가 돌아오게 되면 황궁은 발칵 뒤집히겠지.

그때 괜히 불똥이 튀기라도 하면 공든 탑이 무너지게 된다.

‘아버님은 아니시겠지?’

화비가 은근히 걱정하는 것은 친정 아비인 허연이 이 일에 연루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허연은 황후의 아비인 주이염과는 정적이다.

그리고 주이염의 딸이 황후가 되는 것을 무척 못 마땅해했었다.

아비가 그런 짓을 저지를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어리석은 짓을 하기 마련이다.

진짜 아비 허연이 배후에 있는 것이라면 이건 또 다른 화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 괴한은 잡았느냐?”

“아직 잡지 못하였다 하옵니다.”

“잡지 못해? 황궁 문을 걸어 잠그고 황궁 안의 모든 이들을 수색하면 찾아낼 수 있는데 그걸 찾지 못해?”

“지금 태자 전하께서 황궁 내에 계엄을 선포하시고 황후마마를 태자궁으로 옮기셨습니다.”

“태자가?”

이건 또 무슨 말일까?

화비의 눈매가 살짝 의혹으로 물들었다.

‘태자가? 황후를 습격한 배후가 태자가 아니라는 걸까? 아니면 황후를 죽이려던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리기 위해 황후를 태자궁으로 들였나?’

지금 태자 하진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황제가 아닌 황후다.

주이염을 등에 업은 황후는 태자가 장차 옥좌를 이어받는 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이다.

황후가 마음만 먹으면 태자의 즉위를 충분히 방해할 수 있다.

황후가 어리고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그 뒤에는 주이염이 있다.

늙은 여우 같은 주이염이 황후를 움직여서 태자의 즉위를 방해하고, 후궁들 중 제 말을 잘 듣는 후궁의 나이 어린 아들, 예를 들면 운 귀인의 일곱 살짜리 왕자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왕자를 옥좌에 올리는 일도 충분히 시도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태자의 입장에서는 누가 장애물이겠는가, 황후다.

후궁들 중에서 누군가 황후를 죽이려고 했다? 그런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있을 수 없다.

황후를 죽여서 득을 보는 후궁은 아무도 없다.

그건 화비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황후가 살해당하면 제일 먼저 의심을 받는 것이 후궁들이다.

특히 화비 자신이 제일 먼저 그 배후로 의심받을 것이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왜 굳이 황후를 죽여 스스로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가겠는가.

‘태자가 왜…….’

물론 황제가 황궁을 비운 지금 황궁은 태자의 소관이다.

그런데 태자가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유가 있을까?

‘은환궁의 경비를 더 강화하면 될 것을 왜 굳이 태자궁으로 옮겼을까? 옆에서 구워삶으려고?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겠군.’

황후는 심약한 성격이라고 들었다.

가까이에 두고 협박을 해서 제 편으로 삼을 수도 있다.

태자궁에 있으면 태자의 허락이 없는 이상 누구도 황후를 만날 수 없다.

은환궁에서 일어난 일을 핑계로 주이염과 황후를 만나지 못하게 하고 황후를 다른 이들과 완전히 격리시킨 다음 압박을 가하면 황후는 겁을 먹은 나머지 태자의 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그것도 허사가 될 터인데…….’

황후를 태자궁에 가둬 두고 협박하는 것도 황제가 돌아오기 전까지다.

황제가 돌아와서 황후가 다시 은환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황후는 오히려 악심을 품고 태자가 제게 한 일을 황제에게 일러바칠 것이고 그러면 오히려 태자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태자는 절대로 어리석은 성격이 아니다.

만약 정말 일을 꾸미고 있다면 그것까지 전부 예상하고 일을 꾸밀 것이다.

‘설마?’

불현듯 화비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걸 전부 태자가 꾸민 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소름이 돋긴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은환궁을 습격한 배후가 태자고, 습격을 핑계로 일부러 황후를 은환궁에서 태자궁으로 옮긴 다음 외부와 격리시키고 협박한 다음, 옹주에 친정을 나가 있는 황제를 죽인다면?

‘서북의 반란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구나……!’

싸움터만큼 누군가를 죽이기 좋은 곳은 없다.

딱 좋은 시기에 서북에서 일어난 반란, 그리고 황제의 친정.

황제의 친정을 이끌어낸 것은 태자의 도발이었다.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서북의 반란은 아마 오래전부터 계획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황후 책봉으로 앞당겨졌을 뿐, 태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군. 그랬었어…….’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화비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만약, 그 계획대로 된다면 나와 내 아들은 제일 먼저 죽겠지. 하지만…….’

그러나 반대로.

‘폐하께서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그러면 당하는 것은 도리어 태자가 될 거야. 폐하만 무사히 돌아오신다면 태자는 폐위되고 그러면 진원이 태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 지금 진원이 폐하를 모시고 출정했으니 폐하의 의중이 진원에게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화비의 머릿속에서 온갖 가능성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는 화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었지만 그 입술만큼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요컨대, 황제만 살아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

이른 아침부터 태자궁 앞은 소란스러웠다.

“왜 황후마마를 알현할 수 없다는 것이오!”

목소리를 높인 것은 주이염이었다.

어젯밤 은환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새벽에 전해 들은 주이염이 그 소식을 듣자마자 입궁하려고 했지만 계엄으로 인해 황궁의 문이 아침까지 열리지 않아 황궁 문 앞에서 새벽이슬을 맞으며 밤을 새워야 했다.

아침 일찍 황궁 문이 열리고 몇몇의 대신들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후 주이염이 서둘러 입궁해서 황후를 만나고자 했지만 지금 이렇게 거절을 당한 것이다.

황후는 지금 태자궁에 머물고 있었고 태자 하진이 태자궁의 모든 출입을 엄금하고 있어서 주이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황후마마의……!”

“마마의 아버님이라 하여도 예외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홍문이 허리를 굽혀 주이염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그 얼굴에선 전혀 미안한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다.

“황후마마께서는 무사하십니다. 그리고 태자 전하께서 황후마마의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게 지키실 것이니 어르신은 부디 마음을 놓으십시오.”

“이건 나에 대한 협박이오?”

“협박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일전에 내게 폐하와 전하, 두 분 중에 한 분의 편에 서라고 하지 않았소. 그 일에 대한 협박이냔 말이오.”

“어르신.”

홍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태자 전하와 황후마마께서는 한때 혼담이 오갔던 사이. 그런 분을 협박의 도구로 이용하실 정도로 전하께서 궁지에 몰리진 않으셨습니다. 전하께서는 마마를 진심으로 보호하길 원하시고, 마마께 해를 끼칠 마음은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것이 전하의 본심이십니다.”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오?”

“어르신, 은환궁을 습격한 괴한을 잡아 그 배후를 알아내면 곧 마마께서도 은환궁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만나시는 것은 그때로…….”

그때였다.

홍문의 눈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어르신?”

그의 일그러진 눈을 보며 주이염이 그제야 제 코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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