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좀 진정이 되었느냐?”
주위에 아무도 없기 때문일까.
하진의 이런 온도 차가 이제는 낯설지 않다.
타인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할 때는 이 사내는 정중한 예의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처음 만났던 날의 사내로 돌아간다.
칠석의 밤에 처음 만났던 이 사내는 무섭고 사납고 두려움 그 자체였었다.
하진이라는 이름은 은호에게 있어 항상
‘모르는 상대’
다.
폭풍을 몰고 오는 사내.
어디로 몰아갈지 알지 못하는 그런 폭풍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사내.
때로는 강압적이고, 때로는 자신에게 끈질기게 구애를 하는 사내.
어느 쪽의 모습이 진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사내가 하진이다.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이 사내의 진심조차 알 수 없어서 불안에 휩싸여 천 길 낭떠러지 위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까까지는 머릿속에서 이 사내가 제게 했던 모든 말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말들은 전부 사라지고 단 하나의 목소리만 남았다.
[네가 나를 미치게 만든다. 그러니까 너도 내게 미치는 거다.]
미칠 수 있을까.
이 사내에게 미친 듯이 빠져들 수 있는 것일까.
아직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사내에 대해 알지 못하던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되면 이 사내를 지금보다 더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마음이 커다란 항아리와 비슷한 거라면, 이 사내의 마음이 자신의 안에 가득 채워지고 또 채워져서, 마침내 넘치도록 채워지게 되면 그때는 자신의 마음도 같이 흘러넘치며 이 사내의 안에 부어지는 그런 날이 오게 되는 것일까.
마음이 바람처럼 숨결처럼 흐르는 것이라면 제게로 흐르는 이 사내의 마음이 저를 통과해서 다시 사내에게로 흐르는 그런 날이 오게 될까.
그런 날이 온다면, 지금 저를 향한 이 사내의 마음을 자신도 이해할 수 있을까.
아직은 이 사내의 마음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직은 자신을 향한 사내의 이 사나운 집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왜 하필 자신일까.
왜 자신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한 사람의 여인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라면, 이 사내의 안에서 자신을 향한 사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까.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모든 것들이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이해할 날이 오게 될까.
“괴한은…… 잡으셨습니까?”
“아, 그놈.”
하진이 슬쩍 미간을 찡그렸다.
“놓쳤다.”
“또 저를 죽이려 할까요?”
“그럴지도.”
하진의 말에 은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황궁은 절대로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겁이 와락 났다.
“내 곁이 가장 안전하니, 내 곁에만 있거라.”
“하지만 보는 눈들이 많은데 어찌…….”
하진의 말이 맞다는 건 은호도 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잡히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진의 곁이다.
하진과 함께 있으면 이 사내는 밤낮으로 자신을 지켜 줄 것이다.
“은환궁을 습격한 놈이 누군지 잡아내지 못했으니 이 황궁 안의 모든 이들이 용의자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이 태자궁인 까닭에 아들인 내가 어마마마를 태자궁으로 모신 것을 누가 이상하게 여기겠느냐. 아바마마께서도 출정하시기 전 내게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 준엄하게 명하시고 가셨거늘.”
하진의 입에서 나오는
‘어마마마’
라든지,
‘어머니’
라는 말이 은호에게는 그저 거북스럽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들이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관계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런데 굳이 그런 말을 해서 자꾸만 환기시키는 것이 부담스럽다.
“다치셨습니까?”
하진의 옆구리에 붉은 핏자국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붉은 흔적을 보는 순간 은호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 놀랐던 나머지 이 사내가 괴한을 쫓아갔을 때 칼 소리가 들렸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괴한과 싸우다가 다치기라도 한 것일까.
“칼이 조금 스치긴 했지만…….”
“어의를 부르셔서 상처를 치료하셔야지요.”
“이 밤에 어의를 부르는 것보다는, 네가 치료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하진이 입고 있던 겉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침상 위로 올라가 앉았다.
상의를 살짝 벌리자 옆구리의 상처가 드러났다.
피가 멎었지만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는 순간 은호의 가슴이 뜨끔거렸다.
저 때문에 다친 상처였다.
“한번 보겠느냐?”
하진이 은호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와서 상처를 보라는 뜻이다.
그 손짓을 거부할 수 없는 은호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
“전하께서 자해를?”
이루의 말에 홍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의 자작극에서 하진이 자기 칼로 옆구리에 자해를 했다고 이루가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예정에 없었다.
하진과 홍문이 계획한 것은
‘은환궁에 자객이 들어 황후를 살해하려고 했다, 그리고 자객은 놓쳤다,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황제가 돌아올 때까지 태자가 태자궁에서 황후를 보호한다.’
이것이었다.
이 계획 안에 태자가 다치는 일은 전혀 넣은 적이 없다.
그런데 자해? 그것도 옆구리에?
“쓰윽, 하고 베셨는데 상처가 얕게 나셨어.”
“역시, 고단수이시군.”
“고단수? 무슨 말이야?”
홍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루는 칼과 태자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다.
특히 남녀 관계에 관해서는 숙맥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니까 설명을 해 줘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이 정도는 말해 줄 수 있다.
“자신을 위해 다친 사내를 보면 여인의 마음이 무장 해제가 되는 법이거든.”
“왜?”
“바보냐? 저를 위해 목숨을 걸어 준 사내를 어떤 여자가 거부하겠어. 피까지 흘렸는데.”
“하지만 두 분은 이미 합방까지 하셨는데 굳이 그러셔야 할 이유가…….”
“몸이 합방했다고 마음까지 합방했겠어? 몸부터 손에 넣고 마음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손에 넣어야 하는 법이지.”
“응?”
몸 따로 마음 따로라는 것을 애초에 이해를 하지 못하는 이루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자 결국 홍문이 대답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모르는 인간에게 계속 말해 봤자 입만 아픈 법이다.
“옹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황제는 오늘 옹주로 떠났다.
빠르면 내일 저녁, 혹은 모레 아침에는 옹주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경악하리라.
서북에서 홍수처럼 밀고 올라온 반란군의 세력을 옹주에서 직면하는 순간, 황제는 저의 세상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상처는 붉게 벌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피가 멎었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상처 안에서 여전히 붉은 피가 배어나는 중이었다.
상처에서 스며 나오는 피를 닦을 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밖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진이 주위를 전부 물리는 소리를 들었었다.
‘소매로…….’
어쩔 수 없이 소매로 피를 닦으려고 했지만 하진의 손이 은호의 손목을 살짝 걷어 냈다.
“의복을 더럽히면 안 되지.”
“피가 아직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피를 멈추게 해야…….”
“예로부터 상처에는 침이 약이라고 했지.”
“네?”
무슨 말일까?
상처에는 침이라고?
“모르는 것이냐? 넘어져서 무릎이라도 깨지면 약보다는 침을 바르고는 했는데, 그런 적이 없나 보지?”
“그런 것은…….”
은호도 작은 상처에 침을 바른 적이 있다.
수를 놓다가 바늘에 찔리면 제일 먼저 손가락을 입에 물고는 했었다.
꽃나무 가시에 찔렸을 때도 약보다 침을 먼저 발랐었다.
그건 일종의 작은 습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칼에 베인 상처에 침이라니.
어떻게 이런 큰 상처에 약 대신 침을 바를 생각을 하는 것일까?
‘상처에 침…….’
그런데 어렴풋하게 뭔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아주 오래전에 이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다른 이의 상처에 침을 발라 주는 그런 일이 아주 예전에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척이나 오래전의 일이라 그런 것일까.
“이 혀로.”
하진의 손이 은호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리고 입술을 비집고 들어간 손가락이 그녀의 혀를 쓰윽 문질렀다.
“피를 멎게 해 보거라.”
자신의 혀로, 상처의 피가 멎게.
그 말은 상처에 입술을 대라는 뜻이다.
이 사내의 몸에 제 입술을 대고 혀로 핥으라는 뜻이다.
“이보다 더한 것도 빨았으면서, 왜? 내 양물이 아니라서 빨기가 싫은 것이냐?”
은호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칠석의 밤, 이 사내의 음경을 제 입으로 빨았던 것이 떠올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은호가 허둥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따, 따가울 수도 있습니다.”
고작 하는 말이 이것밖에 없다.
따갑다니.
칼에 베인 사내에게 따가울 수 있으니 각오하라니.
아아, 자신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말만 하는 것일까.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고 은호가 사내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작은 상처에 조심스럽게 혀를 내렸다.
할짝.
혀끝으로 상처를 조심스럽게 핥자 은은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러나 피맛보다 더 진한 것은 사내의 체취였다.
낯선 체취가 혀끝을 통해 은호의 입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상처를 혀로 할짝이던 은호가 살짝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사내의 바지 앞섶이 불룩하게 솟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저, 저것이 왜…….’
자신은 상처만 핥았을 뿐인데 왜 사내의 중심이 솟은 것일까.
게다가 그 솟은 곳이 꿈틀거렸다.
“이놈이 지랄발광을 하는구나.”
하진이 손을 내려 제 바지 중심을 붙잡았다.
그 손의 끝에서 천이 얼룩지며 젖어 들고 있었다.
“네 입을 쑤시고 싶다고 말이야.”
하진의 또 다른 손이 은호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손바닥이 뜨겁다.
보진 않았지만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도 뜨거울 게 틀림없었다.
“네 스스로 빨겠느냐, 아니면 내가 쑤셔 줄까?”
결국 똑같은 것이다.
스스로 빠는 것이나 입 안이 쑤셔지는 것이나 결과는 똑같다.
어차피 똑같다면, 오늘은 이 사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
자신을 위해 다쳤으니 오늘은 이 사내가 원하는 대로 전부 해 주자.
자신이 사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니까.
사내의 옆구리에 입술을 내렸던 은호가 제 손으로 사내의 허벅지를 눌렀다.
그리고 떨리는 손끝으로 사내의 바지를 천천히 끌어 내렸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귀두를 드러낸 채로 불끈거리는 기둥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의 음경이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