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퍼억―!
거친 소리와 함께 은호에게 칼을 꽂으려던 괴한의 몸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웬 놈이냐?!”
괴한을 쳐 낸 것은 다름 아닌 하진이었다.
벽에 처박혔던 괴한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대로 창문을 부수고 달아났다.
요란하게 창문이 부서지고 그 사이로 몸을 날린 괴한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하진이 그를 뒤쫓아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남겨진 은호가 덜덜 떨고 있을 때 부서진 창문을 넘어 하진이 되돌아왔다.
“괜찮으십니까? 마마.”
쓰러진 채로 덜덜 떨며 은호가 저를 구해 준 사내를 올려다봤다.
정말 죽을 뻔했다.
이 사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자신은 괴한의 칼에 찔려 죽었을 것이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저, 저는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몸을 일으키려던 은호가 휘청거리자 하진이 얼른 그녀를 떠받쳤다.
“아…….”
하진의 팔에 안긴 은호가 저를 부축하고 있는 사내를 쳐다봤다.
기억이 났다.
오늘 오후에 혼절했을 때도 이 사내가 저를 받아 줬었다.
이 단단한 팔이 저를 끌어안고, 이 사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저를 부르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 사내는 항상 자신을 구해 준다.
칠석의 밤에도 그랬었고, 오늘 낮에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물론 이 사내가 그 대가로 요구하는 것이 음란하고 배덕한 짓이지만, 그럴지라도 이 사내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물어보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일까.
이 사내는 어젯밤에도 자신의 몸을 탐하기 위해 이곳에 왔었다.
황제가 황궁을 비운 지금, 사내는 분명 자신을 안기 위해 왔다가 괴한에게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 준 것이리라.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마마께서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 살펴보기 위해 잠시 들렀던 것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출정하시기 전 마마를 소자에게 부탁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내의 말투가 이상하다.
이 사내답지 않게 정중하게 예의를 지키고 있다.
“태자님?”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시끄러운 발소리들과 함께 위군들이 침전의 문 앞에 모여들었다.
“마마께서 습격당하셨다. 대체 은환궁의 호위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이냐?!”
위군들을 향해 하진이 격노하여 소리쳤다.
“만에 하나 마마께서 해를 당하셨으면 네놈들의 목을 전부 쳐 버렸을 것이다.”
하진이 제가 부축하고 있던 은호를 놓아주었다.
위군들의 뒤로 잔뜩 겁먹은 얼굴로 들어온 나인들이 하진이 놓아준 은호의 몸을 부축했다.
이런 소란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상궁과 야간 당번을 서는 나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밝혀졌다.
“마마. 마마를 모시던 상궁과 궁녀들이 모두 피습을 당해 숨이 끊어졌습니다. 이 황궁에 마마를 노리는 극악한 무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으니 마마를 제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상궁과 나인들이 전부 살해당했다.
그 충격적인 사실에 은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대체 누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일까.
자신만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은환궁의 궁녀들까지 전부 죽이려 한 이는 대체 누구일까.
“마마를 태자궁으로 모실 것이다. 마마께서 타고 가실 연을 준비하거라.”
그때까지 은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침전 문 밖에 난자한 피와 쓰러져 있는 상궁과 궁녀들의 주검에 혼이 나가 지금 제 귀에 들리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연이 준비가 되고, 그 흔들리는 연 위에 몸을 싣고 밤의 어둠이 내린 은환궁의 뜰을 벗어나 태자궁으로 향할 때에도 은호는 깨닫지 못했다.
일의 절차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습격이 있었다면 응당 그 범인을 잡기 위해 황궁의 모든 문을 닫아걸고, 출입을 막고 수상한 자를 색출해 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되었다는 것을 은호는 깨닫지 못했다.
괴한의 습격이 있었다면 은환궁의 경비를 더 엄중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거처를 태자궁으로 옮기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처음으로 눈앞에서 사람이 죽은 것을 봤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다.
피를 흘리며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그리고 저 역시 죽을 뻔했다.
그 충격에 휩싸인 채로 은호가 멀어지는 은환궁을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은환궁의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
“괜찮아?”
복면을 벗는 이루를 향해 홍문이 피식 웃었다.
“멍이 들었어.”
이루가 옷을 걷어 올려 제 복부를 확인했다.
하진에게 걷어차인 복부에 멍이 들어 있었다.
“전하께서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걷어차셨어. 나 충격받아도 되는 거지?”
조금 전 은환궁의 은호를 습격한 것이 바로 이루다.
물론 정말 해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확실하게 다 죽였어?”
“오늘 밤 은환궁에 있던 상궁과 궁녀들은 전부 죽였어. 또 죽일 사람이 남아 있나?”
“충분해.”
이 일을 꾸민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황후의 거처를 합당한 핑계로 태자궁으로 옮기기 위함이다.
황제가 하진과 은호의 관계를 눈치챘다.
황제는 출정을 하며 은환궁의 궁녀들을 전부 교체하라는 명을 내리고 갔다.
은환궁에 심어 놓았던 이쪽의 사람들은 전부 다른 궁으로 옮겨 가고 황후를 감시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은 궁녀들로 은환궁의 나인들이 교체되었다.
그들은 감시자인 동시에 나중에 증언을 서 줄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처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하진이 은호와 떨어져 있기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뭘?”
“전하께서 은호 아가씨를 칠석의 밤에 처음 본 것이 맞아?”
“그날 같이 있었다며.”
훙문이 시침을 뚝 떼고 대답했다.
“한 번 본 여인에게 저렇게 집착하시는가 싶어서. 그런 성격은 아니신데…….”
“남녀 관계는 마른 풀에 불이 붙듯이 화르륵 타오르는 법이잖아?”
“…….”
못 믿겠다는 이루의 표정을 무시하고 홍문이 슬쩍 웃음을 삼켰다.
이루에게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하진이 은호를 처음 본 것은 칠석의 밤이 아니다.
이루는 하진의 호위를 맡아 하진이 어디를 가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루가 하진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다.
오히려 황궁 안에 있는 홍문 자신이 이루보다 하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하진이 꽤 오래전부터 은호를 알고 있었고, 조금만 더 얌전히 몸을 숙이고 있으면 옥좌를 물려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이염을 만나며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이유도 실은 주은호 때문이라는 것을 오직 홍문만 알고 있다.
주은호는 하진에게 있어서 불씨와 같은 존재다.
그녀는 발화점이다.
하진과 주은호,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는 먹고 먹히는 고의 항아리 같지만 그 속에서 주은호를 향한 하진의 본심은 어찌 보면 독하고 어찌 보면 순결하다.
[황궁에는 꽃이 피지 못한다. 내 꽃도 황궁에서는 시들어 버리겠지.]
예전에 제게 들려주었던 하진의 말을 홍문은 기억하고 있다.
황궁에는 꽃이 피지 못한다.
아니, 가시 없는 꽃은 피지도 못하고, 설령 핀다 할지라도 곧 시들어 버린다.
시들어 버리지 않으면 타의에 의해 꺾이기 마련이다.
황궁의 독이 꽃을 죽인다.
그런 이 황궁에서 태자는 기이어 꽃을 피우려는 것이다.
가시 없는 꽃, 독 없는 꽃.
비록 그 꽃이 금단이라는 이름으로 핀다 하더라도 하진은 그 꽃을 피우고 싶은 것이리라.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위한 꽃을.
*
드르륵.
문이 열리자 은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직 습격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은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제와 오늘, 자신에게 몰아친 이 엄청난 일들이 아직도 꿈처럼 느껴졌다.
깨어나면 모두 하룻밤의 꿈이었다더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황제의 청혼을 받은 것도, 황후가 된 것도, 태자에게 몸을 허락한 것도, 그리고 제 주위의 사람이 죽은 것도 전부 꿈에 지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을 떴더니 칠석의 날 아침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더라면 밤에 부친 몰래 외출을 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칠석의 밤 풍등을 보겠다며 집 밖으로 나가는 짓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면 무뢰배를 만나는 일도, 하진을 만나게 되는 일도 없겠지.
그랬더라면 황궁에 들어오게 되는 일도 없었을까.
아니, 황궁에 들어왔더라도 하진과 엮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부정을 저지르고 그 죄가 발각될까 두려워서 덜덜 떠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하진과 상관없이 자신을 죽이려는 이가 있다면 오늘 자신은 하진 덕분에 살아났다.
그가 아니면 분명 상궁이나 궁녀들처럼 그렇게 피투성이 주검이 되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첫 만남은 최악이었고, 두 번째 만남은 두려움을 안겨 줬지만 지금은 그가 자신을 살렸다.
지켜 주겠다는 말을 그는 지켰다.
문득 그에게 숨은 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의심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하진이 자신을 진심으로 연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어서 자신에게 매달리는 척, 집착하는 척, 연모하는 척한다고 의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의심을 해서 부친을 만나 상의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 사내가 다른 목적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자신을 연모하고, 그래서 지켜 주려는 것이라면 그에게 마음을 열어도 좋지 않을까.
부친은 이 황궁에서 누구도 믿지 말라고 했지만 하진은 믿어도 되지 않을까.
그의 마음을, 그의 연심을 믿어도 되지 않을까.
“마마께서 조용히 쉬실 수 있도록 주위의 사람들을 모두 물리거라.”
문에 선 사내가 문밖을 지키고 섰던 태자궁의 상궁에게 엄한 목소리로 이르고 있었다.
사내의 모습을 보는 순간 잔뜩 긴장하고 있던 은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비로소 안심이 된 것이다.
하진을 보는 순간
‘안전하다’
는 생각이 들며 은호의 마음이 풀어졌다.
어느새 자신의 몸은 하진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으로 각인해 버린 것이다.
두려움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 사내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은호의 귀가 뜨거워졌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안도하는 사이에, 마음을 여는 사이에 또 다른 마음이 틈탄 것처럼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귀가 달아올랐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