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18화 (18/108)

18.

‘안 돼…… 들키면…….’

옷깃으로 가려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은환궁의 상궁도 제법 신경을 썼고 분명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것이라 여겼는데 황제의 눈에 띄어 버렸다.

술잔을 들어 올리며 손을 앞으로 내민 탓에 소매에 밀려 옷깃이 뒤로 젖혀지며 감춰져 있던 목덜미의 흔적이 드러난 것이리라.

황제는 의혹이 담긴 눈으로 은호를 노려봤다.

그 시선이 제 목덜미를 집요하게 훑고 저를 노려보는 탓에 은호의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애써 질끈 깨물었다.

시선을 피하지도 못했다.

지금 여기서 시선을 피해 버리면 더 의심을 살 것이다.

“폐, 폐하. 부, 부디 무탈히…….”

무사 귀환을 바라는 말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떨려 말이 자꾸만 끊어졌다.

“황후에게.”

늙은 황제의 입술에서 쇳조각이 끓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술을 내려야겠다.”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술잔을 올리면 그 답례로 황제는 황후에게 은덕의 술잔을 내리는 법이다.

내관이 두 손으로 받쳐 든 술잔을 들어 올린 황제가 저를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는 은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그 시선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뱀처럼 섬뜩한 시선이 제 몸을 두루두루 훑는 것 같은 오싹한 감각에 떨며 은호가 겨우 손을 내밀어 제게 내리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술잔을 받아 드는 순간, 은호의 손가락 위에 황제의 손가락이 겹쳐졌다.

“못된 벌레가 꼬였구나.”

그 속삭임은 낮고, 은밀했다.

술잔을 받아 들기 위해 황제를 향해 몸을 숙인 아주 짧은 순간 은호의 귓가에 황제가 속삭였다.

은호만 들을 수 있는 낮은 속삭임이었다.

못된 벌레.

순간 은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챙그랑―!

은호의 손에서 떨어진 술잔이 바닥에 부딪치며 그 파편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그리고 비틀거리던 은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꺄아악!”

“마마―!”

갑자기 혼절하듯 쓰러지는 은호의 모습에 은환궁의 상궁들과 나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마!”

뒤로 쓰러지는 은호의 몸을 받아 낸 것은 그녀의 곁에 서 있던 태자 하진이었다.

은호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은 하진도 이미 눈치를 챘었다.

황제에게 술잔을 건넬 때부터 이미 이상한 조짐이 엿보였었다.

위태롭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은호가 혼절했다.

혼절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하진이 제 팔 안에서 축 늘어진 은호를 향해 소리쳤다.

“마마!”

혼절한 은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은호를 끌어안은 하진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은환궁의 상궁을 향해 소리쳤다.

“마마를 모시어라!”

황제의 출정식을 위해 금환궁에 모인 이들 모두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출정식에서 황후가 혼절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더군다나 어제 책봉식을 치른 황후다.

“뭣들 하느냐! 마마를 모시지 않고!”

정신이 든 상궁과 나인들이 허둥지둥 달려와서 하진의 품 안에 축 늘어진 은호를 넘겨받아 한 나인이 그녀를 등에 업었다.

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나인에게 업혀 가는 은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하진의 귀에 황제의 목소리가 파고들어 왔다.

“네가 어미를 잃었을 때 그리 슬피 울더니, 지금 황후가 쓰러지니 네 어미 생각이 났나 보구나.”

어느새 황제가 하진의 곁에 서 있었다.

“첫 번째 어미는 그리 잃었지만, 두 번째 어미는 네가 잘 살펴 주거라.”

목소리에는 조소가 담겨 있었다.

황제의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특유의 뱀 같은 표정일 것이다.

‘이제 와서 알아차린들.’

하진이 비웃음을 삼켰다.

자신과 은호의 관계를 황제가 알아차려도 상관은 없다.

이미 대세는 자신에게로 기울었다.

그리고 알아차린다 한들 증거가 없다.

아니, 황제는 이번 출정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이것이 마지막이니 이제 와서 알아차렸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망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법이니 말이다.

“황궁에 못된 벌레들이 많으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네 어미에게 벌레가 꼬이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네, 아바마마.”

고개를 숙이는 하진의 눈에 흩어진 술잔의 파편들이 들어왔다.

깨진 조각은 이어 붙인다 한들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하는 법이다.

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한 번 깨진 관계는 이어 붙일 수가 없다.

황제와 자신의 관계가 그렇다.

한 번 산산조각이 나서, 이제 더는 이어 붙일 수도 없고, 이어 붙인다 한들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벌어지고야 마는 그런 관계다.

아버지와 아들.

그러나 서로를 한없이 미워하고, 서로를 가장 두려워하며,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어서 이제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그런 관계다.

마치 살모사의 어미와 새끼가 서로를 잡아먹으려 들듯이.

황제는 뱀이고, 자신은 뱀의 새끼다.

결국 이렇게밖에는 될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

[참형을 내릴 것이다!]

“아아악―!”

무시무시한 음성에 놀란 은호가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하아…… 하아…….”

은호의 전신이 땀에 물들었다.

악몽을 꾼 탓이다.

“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은환궁의 천장 무늬였다.

자신이 왜 침전에 누워 있는 것인지 은호가 바로 깨닫지 못했다.

금환궁에서 황제가 내미는 술잔을 받아 들다가 혼절한 것을 기억해 낸 것은 조금 후였다.

“아아…….”

은호가 다시 눈을 감았다.

기억이 났다.

저를 노려보던 황제의 시선, 그리고 제게 속삭여 오던 그 섬뜩한 음성.

‘다 알고 계신 거야…….’

깨기 직전에 꾼 악몽은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꿈이었다.

태자와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이 들통나 황제의 앞에 끌려가 자신과 태자의 목이 달아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무시무시한 칼날이 저를 향해 내려오는 것을 보며 잠에서 깨 버렸다.

그러나 황제가 이미 자신의 부정을 눈치챈 이상, 악몽은 예지몽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황제가 군사들을 이끌고 옹주로 친정을 떠났지만 머잖아 그가 돌아오면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다.

아직 부정의 상대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부정의 상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변명도 하지 못하겠지…… 아버님도 벌을 받게 되실까…….’

자신은 부정을 저질렀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부친은 무슨 죄란 말인가.

[너는 숨죽이고 나만 보고 있으면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귀를 막고,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말고 나만 보는 거다. 그렇게 나만 보고 있으면 폭풍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 있을 테니 말이다.]

폭풍.

이미 은호의 안에서 폭풍은 시작되었다.

도저히 이 폭풍 속에서 눈을 감고 있을 수가 없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을 날을 기다려야 하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온한 삶이었다.

이런 폭풍우는 상상조차 못한, 평온한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누구보다 다정한 아버지의 품 안에서 세상이 험하다는 것을 모르며 살아왔다.

담장 안의 삶은 너무나 평온하고 아늑해서, 세상이 전부 그런 것이라 여겼다.

자신이 행복한 것처럼 담장 너머의 사람들도 다 그렇게 행복하고, 자신의 부친이 다정한 것처럼 세상의 모든 이들이 다 다정한 사람들이라 생각했던 자신은 얼마나 바보인가.

자신은 그저 아버지의 소매 안에 눈이 가려져 보지 못했던 것뿐이다.

세상의 험한 것들, 사나운 것들, 그리고 모진 것들은 전부 아버지의 등이 막아 주었기 때문에 자신은 바람이 부는 것도 모르고 살아왔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곳은 더 이상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 줄 수 없는 곳.

스스로를 지키기에 자신은 무력하고 그저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저를 지켜 준다는 사내의 말에 흔들렸다.

그러나 이제 그 말마저도 믿지 못하게 된 지금, 길을 잃은 것처럼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내가 죽는 건 상관없지만 아버지까지 휘말리게 할 수는…….’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 줬다.

그러나 이제 마냥 지켜 주기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

무엇이든 해야 하고, 그 이전에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독해질 수 있을까…….’

자신은 없다.

하지만 이미 막다른 골목이다.

뒤가 천 길 낭떠러지라면, 이대로 추락할 것인가 아니면 저를 떠밀려는 이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기어이 살아남을 것인가.

타인을 죽이고 자신이 사는 삶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지만, 이제 자신은 그런 곳에 서 있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다시 눈을 뜬 은호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옷을 갈아입고 싶었다.

조금 전의 악몽으로 속옷까지 전부 흠뻑 젖어 버렸기 때문이다.

“누구 있느냐?”

소리를 내어 상궁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밖에 누구 있느냐?”

불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덜컥 겁이 났다.

“누가…….”

그때 침전의 문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상궁의 그림자는 아니었다.

‘태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 문이 열리고 바람이 불어 촛불이 꺼졌다.

순식간에 밀어닥친 어둠에 비명을 지르려는 그녀의 입술을 거친 손이 틀어막았다.

“읍……!”

그녀의 입을 막은 손이 그대로 그녀를 침상으로 쓰러뜨렸다.

“쉿.”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이 무엇인지 은호가 알아차렸다.

제 입을 틀어막은 사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사내가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 서늘하게 빛나는 그것은, 칼이었다.

지금 이 사내는, 저를 죽이려는 것이다.

‘죽는다……!’

죽는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 사내 하진이었다.

‘안 돼……!’

“읍! 으읍!”

위로 치켜드는 칼날을 보며 은호가 몸부림을 쳤다.

두 손을 저으며 제 입을 틀어막은 사내를 뿌리치려 해도 소용은 없다.

사내의 완력을 당해 낼 도리가 없다.

그리고 칼날이 그녀를 향해 내려왔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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