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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17화 (17/108)

17.

“막았어야지요!”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 것은 오랫동안 황궁의 안주인 노릇을 해 온 화비였다.

세월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고 젊었을 때는 눈부신 미모를 자랑했던 화비지만 지금은 눈 밑의 주름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화비.

지금의 황제가 막 즉위한 직후 세력을 넓히려고 할 때 부친 허연의 위세를 등에 업고 후궁이 되었다.

그때가 열여섯 살이었다.

그 후로 30년을 황궁에서 살며 황제의 장자를 낳았고 황후가 죽은 후에는 황궁의 안주인 노릇을 해 온 여인이다.

지금은 마흔 중반에 눈가의 주름을 감추지 못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이 든다 하여 권력에 대한 욕망이 사그라드는 건 아니다.

미모가 시들고 나이가 들수록 권력에 대한 욕망은 더 강해지는 법. 지금의 화비가 그랬다.

자신이 낳은 왕자가 태자가 되지 못한 그때부터 화비는 독기를 품기 시작했다.

저보다 어리고 나중에 황궁에 들어온 황후가 자신보다 늦게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태자로 책봉되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아 온 세월이 기십 년이다.

하지만 황궁의 법으로 후궁은 황후가 될 수 없다.

몇 대 전의 황제 치세 때, 총애를 받던 후궁이 황후가 되기 위해 황후를 독살한 사건 이후로 후궁은 황후가 될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황후는 될 수 없지만 태후는 꿈꿀 수 있다.

화비가 꿈꾸는 것은 자신이 태후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되고, 자신은 태후가 되는 것. 그것만이 황궁에서 30년을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이 된다고 믿고 있다.

그 세월이 만만찮았던 것은 아니다.

호련 황후가 살아 있을 때, 그 친정 가문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호련 황후가 죽고 그 가문이 몰락한 후에 그 아들도 태자에서 폐위될 것이라 여겼지만 황제는 어미와 외가를 잃은 태자를 끝까지 폐위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대한 견제 때문이라는 것을 화비는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황제는 늙었다.

남아 있는 시간이 없다.

태자는 젊고 강건하고 황제는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태자는 동묘의 신진 귀족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함으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고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도 태자의 편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후까지 새로 들어왔다.

나이가 어린 계집이지만 황후는 승상 주이염의 딸이다.

주이염의 입김이 고스란히 황후를 통해 나올 것이다.

최악의 상황은 황후와 태자가 손을 잡는 경우고, 차악의 상황은 황후가 아들을 낳는 것이다.

물론 후자는 가능성이 미비하다.

이미 황제는 노쇠해서 더는 자식을 생산할 기력이 없다.

그러나 방심할 수 없는 것은 황후가 후궁의 자식들 중 한 명을 양자로 삼는 상황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대 황후들 중에는 그런 경우도 있었다.

자식을 낳지 못한 황후가 후궁의 자식을 양자로 들여 그 양자로 옥좌를 잇게 한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이게 전부 황후에게 차기 황제의 지명권이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렇게 점점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황제가 서북에서 일어난 반란을 친히 진압하기 위해 옹주로 출발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 화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친정은 막으셨어야죠! 아버님은 대체 뭘 하셨습니까!”

화비의 노기 가득한 외침에 그 친정 아비인 좌복야 허연도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 상황에서 친정은 불가하다고 반대하고 나섰으면, 폐하께서 내가 태자의 편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태자가 직접 군사를 끌고 나가겠다는 말에 폐하께서 심기가 언짢아지셔서 친히 친정을 가시겠다고 하신 의도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태자에게 공을 세우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니냐. 그런데 내가 거기서 태자에게 맡기라고 하면, 당연히 내가 태자의 편처럼 보일 것 아니겠느냐.”

“태자…… 빌어먹을 태자…….”

화비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항상 눈엣가시였던 태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다.

“태자가 황제가 되는 날에는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내가 그걸 모르겠느냐. 하지만 어쩌겠느냐. 자객도 통하지 않고 독살도 통하지 않는데.”

지금까지 태자를 죽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봤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다.

태자는 이 괴물의 소굴 같은 황궁에서 20년을 기어이 살아남은 괴물 중의 괴물이다.

그리고 그 괴물이 황제가 되는 순간 이 황궁에는 피바람이 일 것이다.

“황후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만나 주겠느냐?”

허연과 주이염은 상극의 정적이다.

대립의 극과 극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이염의 딸인 황후가 제 딸인 화비를 만나 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문안 인사는 가야 하니까요. 딸이 아비의 뜻대로 움직이라는 법도 없지 않겠어요? 때로는 살기 위해서 딸이 아비를 버릴 수도 있고, 아비도 딸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니까요.”

화비가 허연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건 일종의 경고다.

자신과 아들의 입지가 위태로워지면 지금까지 정치적 동반자가 되어 준 아비 허연도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다는 경고를 풍기고 있을 때 상궁이 고하는 소리도 없이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화비의 아들이자 황제의 장자인 왕자 진원이었다.

“왔느냐?”

“소식 들으셨습니까, 어머님?”

“소식이라니?”

“폐하께서 친정을 나가신다는…….”

“아, 그것?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네 외조부와 의논 중이었다.”

“폐하께서 소자에게 친정에 동행하라는 황명을 내리셨습니다.”

“네게?”

뜻밖의 이야기에 화비의 눈이 커졌다.

허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친정에 동행하는 것은 주로 태자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 역할을 태자 하진이 아니라 장자 진원에게 맡겼다는 것은 황제의 의중이 태자에게서 진원에게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

“지금 옹주의 상황이 심각한지라 지체할 틈이 없어 병력이 정비되는 즉시 출정을 하신다고 합니다. 하여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진원이 화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머님, 소자 다녀오겠습니다.”

“위험한 곳에는 나서지 말거라.”

제게 절을 하는 아들을 화비가 걱정 어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제 속으로 낳은 아들이지만 저를 닮지 않아 착하고 어진 성품의 아들이다.

어떻게 이런 아들이 태어났는지 화비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그런 아들이다.

황제를 닮은 것도 아니고 자신을 닮은 것도 아니다.

황제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탐욕이 아들에게는 없다.

아들은 그랬다.

어려서부터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다른 형제들과도 우애가 좋았지만 화비의 눈에 그것은 늘 불만이었다.

황궁은 욕심 없는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더 많은 욕심을 가지고 있어야 기어이 살아남는 이곳에서 바보처럼 착한 아들은 도태될 것이 분명했다.

기를 쓰고 아들을 태자로 만들어야 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들의 이런 성품 때문이다.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절대로 앞장서지 말고. 알겠느냐?”

“병사들을 앞세우고 어찌 저 한 몸 살겠다고 뒤로 물러나 있겠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어머님. 소자, 승전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들의 말을 들으며 화비의 안에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

상상하면 안 되는 일이지만,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만약 아들이 변을 당한다면.

‘아니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출정하는 아들에게 걱정거리를 안겨 줄 수는 없었다.

“네 무사 귀환을 위해서 내가 천신께 기도를 드리마.”

고작 이런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황제의 출정을 앞두고 금환궁에 황후를 비롯한 태자, 왕자와 공주들, 그리고 후궁들까지 전부 모습을 드러냈다.

황제의 친정에는 반드시 출정식이 치러지고 출정식은 금환궁에서 황족들에 의해 치러졌다.

황제의 무사 귀한과 승전을 위해 모두를 대표해서 황후가 술잔을 올리는 것이 법도였다.

이변은 이변이었다.

하루 전날 황후의 책봉식이 있었고 그다음 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황제의 출정식이 연잇는 것은 누가 봐도 이변이었다.

민란이야 잊을 만하면 일어나는 것이지만 이번 서북에서 일어난 반란은 누가 봐도 심상찮은 기세였다.

시작은 서북이었지만 그 반란의 세력이 북상하며 점점 반란군에 합류하는 지방들이 많아졌고 지금껏 그 어떤 반란군도 입성하지 못한 옹주까지 밀려든 것이 이미 위기의 징조였다.

옹주가 무너지면 그다음은 동묘다.

옹주는 개국 이래 단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이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다.

이번 반란의 진압에 황제가 직접 친정을 나가는 것 역시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황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친정을 한 적이 없다.

그런 황제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친정에 나서는 것은 태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만약 이번 반란을 태자가 진압한다면 태자의 위상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고, 황제가 직접 진압하게 되면 반대로 아직은 황제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동묘의 모든 귀족들에게 보여 줄 수 있게 된다.

이번 반란군의 진압은 초한의 흐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시험하는 척도가 될 것이 분명했다.

“폐하, 승전을 기원하옵니다.”

황궁의 법도에 따라 출정하는 황제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술잔을 올리는 것은 황후인 은호의 몫이었다.

[지금 폐하의 출정식으로 인해 승상께서는 은환궁에 들지 못하신다 하였습니다.]

부친을 만나고자 했던 은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물론 부친의 얼굴은 먼발치에서 보긴 했다.

황후로 책봉되고 하루 만에 치르는 공식적인 출정식이라 이렇게 손이 떨리는 것은 아니다.

술잔을 건네는 은호의 손을 떨게 만드는 것은 금환궁에 모인 이들이 아니었다.

바로 곁에 서 있는 태자 하진의 존재로 인해 지금 술잔을 받쳐 든 은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덜덜 떨리는 술잔을 받아 든 황제가 잔에 담긴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술잔을 내리던 황제의 눈빛이 살짝 일그러진 것은 그때였다.

황제의 시선이 제 목덜미에 꽂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은호의 숨이 멎었다.

목덜미.

그곳에는 하진이 제게 새긴 흔적이 남아 있다. 입술로 물어뜯은 자국이.

황제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은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제의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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