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큰 둑도 개미구멍으로부터 무너지는 법이지.”
기둥에 기대어 서서 편전을 쳐다보며 홍문이 중얼거렸다.
홍문과 이루는 지금 편전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하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제가 모시는 이를 기다리는 이들로 편전 주위의 뜰이 가득 찼다.
모두 한밤중에 불려 와서 지금까지 새벽이슬을 맞으며 서 있는 이들이었다.
그중에 홍문과 이루는 조금 전에 도착한 탓에 새벽이슬을 맞는 것은 피했다.
지각한 태자의 덕을 봤다.
“개미구멍이라…….”
칼을 찬 이루가 이제 새파랗게 동이 터 오는 하늘을 쳐다봤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으려면 멀었다.
아직은 황궁의 지붕 위로 어둠이 남아 있었다.
“30년 동안 황궁을 지배해 온 황제라는 큰 둑을 무너뜨릴 개미구멍에 이제 물을 흘려 보내야 할 때가 된 거지. 때는 무르익었고 이때를 놓치면 전하께서 역공을 당하실 거다. 그러니까 이쪽이 당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 하는 거다.”
“주 승상이 어떻게 나올까?”
“머리가 좋은 인간이야. 주 승상은 상황 판단도 빠르고 머리도 좋아. 그 자리까지 괜히 올라간 게 아니지. 반드시 우리 쪽으로 돌아설 거야.”
“피바람이 불까?”
“옥좌의 주인이 바뀔 때면 원래 옥좌 아래로 피의 강이 흐르는 법이야.”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홍문의 말에 이루가 몸을 떨었다.
피의 강.
피가 강을 이루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것일까.
짐작만으로도 오한이 일어났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은 이루의 얼굴과는 사뭇 대조적으로 홍문의 눈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한 달이 걸리지 않을 거다.”
홍문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낮은 중얼거림에는 억누르지 못하는 희열이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꿈이 이제 머잖아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극한 희열이었다.
제 주군이 황제가 된다.
모든 이들의 위에 제 주군이 군림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희열 넘치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15년이나 기다렸어……. 이날이 오기를.”
옥좌의 주인을 바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황제처럼 자식들을 의심하고 신하들조차 의심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어렵고 힘든 일이다.
황제의 변덕 한 번이면 하진도 태자의 자리에서 어느 날 갑자기 폐위될 수 있었다.
그 변덕스럽고 자식을 믿지 않는 황제가 하진을 지금까지 태자의 자리에 둔 이유는 단 하나다.
다른 왕자들은 생모가 살아 있고 그 외가 쪽의 가문들도 건재한 반면 하진에게는 생모도 외가의 가문도 없었기 때문이다.
즉, 아무도 편들어 줄 세력이 없다는 이유로 황제는 하진을 태자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얕봤을 것이다.
여차하면 태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고, 그렇게 얕잡아 봤을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 늙어 가는 자신에 반해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 가는 태자를 보며 위협을 느꼈을 것이고, 무엇보다 태자가 주이염과 계속해서 접촉을 하는 것을 보며 아차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수를 쳐서 주이염의 딸을 황후로 삼아 볼모를 만들고, 주이염과 태자의 관계를 끊어 놓은 다음에 태자를 내치려는 속셈이겠지만, 이쪽도 이미 준비는 끝냈다.
작은 물줄기가 둑에서 터져 나오면 그때를 기다렸다가 단번에 삽과 곡괭이를 들어 그 견고한 둑을 내려치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그 견고한 둑은 그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이제 곧…….”
홍문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홍문의 얼굴에서 꿈을 꾸는 소년의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이루도 볼 수 있었다.
이루가 보는 홍문은 항상 꿈을 꾸고 있는 자다.
사람들은 홍문을 가리켜서 모사가다, 교활한 여우다, 세 치 혀를 가진 뱀이다 등등의 말을 하고 있지만 이루는 홍문이 그저 꿈꾸는 자라는 것을 안다.
남들이 꾸지 않는 꿈을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꾸고 있는 그런 사내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면 홍문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외모를 가졌다.
번듯한 체격도 없고 잘난 외모도 없다.
그러나 그 초라한 몸뚱어리 안에는 더없이 크고 아름다운 꿈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이루는 안다.
그 꿈이 곧 이루 자신의 꿈이기 때문이다.
태자의 꿈은 홍문의 꿈이고, 홍문의 꿈은 자신의 꿈이다.
자신들의 꿈은 같다.
바라보는 것도 같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용이 날아오르는 것이다.
자신들의 태자가 황제가 되어 이 초한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것이다.
천지개벽.
새로운 세상.
그것이 이루가 바라는 세상이고, 홍문이 바라는 세상이며, 자신들의 주군인 하진이 만들어 갈 세상이다.
“나오시는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편전에서 대신들이 나오는 모습을 보며 홍문이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제법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제 앞으로 지나가는 대신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태자의 측근이라고 하지만 홍문은 정식으로 벼슬을 하사받지 못했다.
황궁 안에서는 그저 미천한 신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루는 정식으로 관직을 하사받았다.
관직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에 따라 황궁 안에서의 입지는 달라진다.
“전하.”
걸어오는 하진을 향해 이루와 홍문이 허리를 숙였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홍문이 조급하게 물었다.
“왜? 내가 옹주로 출정하게 되었을까 봐 겁이라도 나는 것이냐?”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어찌 되었습니까?”
“폐하께서 친정하실 것이다.”
하진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홍문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겨우 참았지만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렇게 기가 막히게 황제가 제 발로 함정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아직 이르다. 또 아느냐? 폐하께서 친정에서 승전을 거두고 개선하실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하진의 얼굴에도 감추지 못하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건 모두 계획된 함정이다.
황제를 끌어들이기 위한 덫이다.
황제가 노골적으로 견제하고 있는 하진 자신이 옹주의 반란군을 치겠다고 선수를 치면 황제가 그런 식으로 나올 것이라 이미 예상을 하고 꾸민 일이다.
대신들과 귀족들에게 하진의 명망이 높아지는 것을 황제는 바라지 않는다.
가뜩이나 최근 하진에 대한 귀족들의 평가가 좋아지는 상황에서 하진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돌아오게 되면 그 흐름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것을 막기 위해 황제가 직접 친정을 나갈 것이라고 홍문이 예상했고 황제는 보기 좋게 그 덫에 걸려들었다.
황궁을 나가면 황제는 두 번 다시 이 황궁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다.
황제는 반란군의 손에 목숨을 잃을 것이고, 태자는 그 뒤를 이어 옥좌에 오르게 된다.
반정이 아닌 정당한 계승을 통해서.
*
황제의 친정 소식이 황궁 전체에 퍼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은환궁의 은호가 아침 수랏상을 받기도 전에 그 소식이 상궁을 통해 전해져 왔다.
“친정이라니…… 그러면 황궁을 떠나 계신다는 것이냐?”
믿을 수 없는 소식에 은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 달만 기다리거라.]
오늘 새벽까지 같이 있던 사내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의 의미가 이것이었을까.
그 사내의 모든 언행에서 느껴졌던 역모의 기운. 그렇다면 서북에서의 반란도 사내가 꾸민 것일까.
‘무서워…….’
은호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오한이 들며 섬뜩한 기분에 은호가 손을 덜덜 떨었다.
이제 자신은 그 사내와 같은 배를 탔지만, 그럴지라도 사내가 꾸미고 있는 일은 무섭기 이를 데 없다.
은호는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던 무섭고 살벌한 일들을 그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는 내 것이다.]
[자랑해도 좋을 거다. 하진이 처음으로 비굴하게 매달리게 만들었다고.]
그 사내는 자신 때문에 저가 비굴해졌다고 말했다.
구차하게 매달린다고 말했었다.
그렇게 구차하게 매달릴 정도로 자신을 가지고 싶다고.
어젯밤에는 그 말에 흔들렸고,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날이 새고 지금 서북의 반란과 황제의 친정에 대한 말을 듣는 순간 은호의 안에서 새로운 의심이 생겨났다.
정말, 그 사내는 자신을 순수하게 바라고 원하는 것일까?
저를 언제 봤다고?
고작 칠석의 밤에 하루를 만나고 자신에게 그렇게 푹 빠졌다는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불안감이 은호의 안에서 기어 올라왔다.
검고 어두운 불안이 안개처럼 전신을 휘감았다.
“마마.”
은환궁의 책임상궁이 은호의 귓가에 속삭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불안해하지 마옵소서. 은환궁의 나인들은 전부 마마의 편이옵니다.”
“아…….”
예상하지 못한 속삭임에 은호의 머리카락이 쭈뼛거리며 섰다.
지금 상궁의 말은, 은환궁의 모두가 태자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상궁을 비롯하여 나인, 그리고 번을 서는 위병까지 전부.
“태자 전하만 믿으시옵소서.”
자신의 불안을 눈치채고 마음을 놓게 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은호의 두려움은 더 거세어졌다.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할 정도로 태자는 자신이 필요한 것이다.
왜?
태자의 자신에 대한 집착이 왜 단순한 사내의 연심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왜 다른 숨은 의도가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일까.
‘아버님을 만나야 해…….’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면 부친과 의논을 하는 수밖에 없다.
황후가 된 몸으로 아들이나 다름없는 태자와 정을 통했다는 사실을 부친께 고하는 것은 죽을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지기 전에 부친을 만나서 이 일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옳다.
“아버님을, 모셔올 수 있겠느냐?”
지금 당장 부친을 만나야만 했다.
차갑게 식어 가는 수랏상 위의 음식들을 버려 둔 은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