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만 기다리거라.”
야장의의 허리끈을 묶어 주며 하진이 제법 다정하게 말했다.
조금 전까지 그리 사납게 허리짓을 하던 사내의 목소리치고는 다정한 음성이라 그것이 은호에게는 또 낯설었다.
“흔적이 남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사내의 손이 살짝 벌어진 야장의 깃 사이로 드러나는 쇄골을 어루만졌다.
사내가 입술로 거칠게 빨아 댄 자국이 꽃물이 든 것처럼 곳곳에 남아 있었다.
흔적이 남았다는 말에 은호가 겁을 먹었다.
다른 사내와 정을 통한 것을 황제가 알게 되면 끝장이다.
몸에 남아 있는 흔적을 보게 되면 황제는 분명 누구와 정을 통했냐고 불같이 화를 내며 물어 올 것이다.
“무서우냐?”
자신은 이렇게 겁을 먹었는데 정작 원인을 제공한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니 그것이 화가 나 은호가 시선을 피했다.
“은호야.”
사내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겁먹지 마라. 내 약조를 믿어라.”
약조.
지켜 준다는 그 약조.
구해 준다는 그 약조.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역심이라도…… 품고 계시는 것입니까?”
두려운 말이다.
제 입으로 꺼냈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태자는, 이 사내는 역심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역모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황제에게서 자신을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정말로 역모를 꿈꾸는 것이라면, 이 사내는 미쳤다.
가만히 있어도 머잖아 황제의 자리가 보장된 사내가 역모라니,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짓이다.
태자로서 당당하게 옥좌에 오를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아비의 자리를 찬탈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다.
“원래 내 것이 될 나라다. 내 것이 될 나라, 내 것이 될 여자. 그것을 조금 더 빨리 가지겠다는 거다.”
“하지만…….”
“너는 숨죽이고 나만 보고 있으면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귀를 막고,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말고 나만 보는 거다. 그렇게 나만 보고 있으면 폭풍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지나가 있을 테니 말이다.”
사내가 다시 은호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넉넉한 품 안에서 은호가 눈을 감았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금단의 열매를 먹어 버린 것은 이 사내만이 아니라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고,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결국 이 사내와 자신은 같은 죄를 짊어지게 되었다.
천륜을 어긴 죄.
부정을 저지른 죄.
하늘이 이런 자신들을 용서할까.
천벌이 내려지진 않을까.
사내의 품 안에 안긴 은호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심장이 뛰는 이유를 은호도 알지 못했다.
천벌이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이 사내가 두려워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이 사내의 심장의 소리에 자신의 심장이 함께 뛰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태자라는 놈이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얼굴을 보이는 것이냐? 쯧쯧, 한심한 놈…….”
잔뜩 성이 난 얼굴로 황제가 편전으로 들어서는 태자를 노려봤다.
황제는 어젯밤 편전으로 온 이후로 이곳에서 나가지 않았다.
나갈 수 없는 중대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제는 경사스러운 날이라 오랜만에 과하게 마신 탓에 아바마마의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나 한밤중에 불려 온 대신들로 이미 편전은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같이 그 얼굴에 깃들어 있는 당혹감으로 미뤄 보더라도 위중한 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했다.
편전 안에는 어제부로 황제의 장인이 된 승상 주이염도 상석에 자리를 하고 있었다.
황제의 바로 아랫자리에 승상 주이염이, 그리고 그 아래쪽의 좌우에 좌복야 허연과 우복야 심창이 마주 앉았고 그 아래로 다른 대신들이 줄을 지어 앉아 있었다.
그 대신들의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 황제의 앞으로 나아간 하진이 주이염의 곁에 앉았다.
그곳이 태자의 자리였다.
제 곁에 앉는 태자 하진을 곁눈으로 바라보는 주이염의 표정은 무척이나 불편해 보였다.
“큰일을 치르느라 고단하실 터인데, 일찌감치 불려 나오신 모양입니다.”
인사를 해 오는 하진에게 주이염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랍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능청을 떨고 있지만 하진이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주이염이 아니다.
오히려 주이염은 지금 하진이 의심스럽다.
너무 시기적절한 때에 난이 일어났다.
마치 기회를 노린 듯, 일부러 이때를 맞춘 것처럼 서북에서 모반이 일어났다.
이것이 정말 우연일까?
더군다나 서북은 태자가 한때 몸을 의탁하고 있던 곳이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면, 이보다 더 무서운 우연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르신. 고는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주인을 공격하는 법이지요. 어르신의 주인이 어르신께 더는 대가를 주지 않게 된다면, 어르신은 주인을 물어뜯을까요 아니면…….]
어젯밤 홍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주이염이 떠올렸다.
더 이상 대가를 공급하지 않는 주인.
그것은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황제가 자신에게 대가를 주지 않을 리가 없다.
‘무슨 속셈일까…….’
태자.
어찌 보면 보장된 자리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가장 위태로운 자리가 바로 태자의 자리다.
가장 공격받기 쉽고 배신을 당하기 쉬운 자리다.
태자 하진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태자의 자리를 견고하게 지지해 줄 외가 세력이 없고, 뒷배가 되어 줄 모후가 없는 하진으로서는 백척간두 위에 홀로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게다가 황제는 의심이 많은 성품이다.
현 황제는 배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서른 살의 나이에 같은 배로 태어난 형제들을 비롯해서 이복형제들까지 전부 도륙을 하고, 죽어 가던 병든 선황에게서 찬탈하다시피 옥좌를 넘겨받아 황제가 된 지 벌써 30년이 넘게 흘렀다.
지독한 피를 흘리며 황제가 된 만큼 타인을 향한 의심 역시 지독하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자식들이 제게 비수를 들이대고 옥좌를 찬탈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 의심병 환자인 동시에 죽는 순간까지도 제 손에 쥔 것은 무엇 하나 놓지 않으려 들 그런 성격이기도 했다.
30년이나 군림하고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으로 항상 뭔가를 탐하려고 드는 성격이라는 것은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해 온 주이염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탐욕스럽고 교활한 늙은 여우다.
그리고 그런 황제를 이용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자신이다.
홍문의 말이 맞다.
자신은 대가만 치르면 누구라도 물어뜯어 죽여 주는
‘고’
다.
신의, 충심, 그런 것은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만약 황제가 제게 대가를 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여전히 황제를 곁에서 도울 것인가.
‘그래서…….’
주이염이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욕을 퍼붓고 싶었다.
이제야 겨우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왜 황제가 자신의 딸 은호를 황후로 달라고 한 것인지 지금 알아차렸다.
황제는 볼모로 은호를 곁에 둔 것이다.
이제 황제는 더는 자신에게 대가를 치르지 않을 속셈이리라.
하지만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되레 역습을 당할 것을 우려해서 은호를 황후로 삼아 곁에 두고 자신의 역습을 봉쇄하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는 것은 황제가 자신과 태자 사이에 오가던 약조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뜻이고, 자신이 태자와 손을 잡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결국 태자도 자신도 황제에게 당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
이제 황제는 순서대로 쳐 나갈 것이다.
그 첫 번째는 태자, 그리고 다음 순서로는 자신일 것이다.
태자를 쳐도, 황제는 외척 세력을 남겨 두는 성격이 아니다.
외척인 자신 역시 반드시 죽이려 들 것이다.
황제에게 있어서는 태자도, 신하들도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옥좌에 사로잡힌 괴물이다.
결국 자신은 제 손으로 딸을 사지로 밀어 넣었고, 이제 딸을 지켜 주지도 못하고 이대로 밀려날 수도 있다.
“서북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어젯밤에 올라왔습니다.”
“서북에서 말입니까?”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진이 무표정하게 상석에 앉은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의 얼굴은 분노가 가득했다.
도전을 용납하지 않고 저를 거역하는 곳은 그곳이 큰 고을이든 작은 고을이든 상관없이 잿더미로 만들어 온 황제로서는 감히 서북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것이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저 단순한 반란입니까? 그 정도로는 한밤중에 폐하께서 초야까지 미루고 나오시지 않으셨을 터인데…….”
“서북의 반란군이 하주를 지나 지금 이곳을 향해 북상 중이라는 파발이 도착했습니다. 빠르게 북상하고 있어서 늦어도 사흘이면 반란군이 도성의 첫 관문인 웅주에 이를 것이라는 게 좌복야의 보고입니다.”
“저런, 사흘이라…….”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도 그 반란군이 도성 근교에까지 이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반란은 그 기세가 심상찮아 한밤중에 모든 중신들이 전부 모인 것이다.
“승상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폐하께서 친정을 하실까요?”
정좌를 하고 앉은 하진이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곁에 앉은 주이염에게 속삭였다.
“친정까지는…….”
“내 생각에는 아직 정정하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친정을 하실 듯한데…… 황후마마까지 맞이하신 차에 이대로 황궁에 숨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으실 겁니다. 내 생각에는 말입니다.”
거기까지 속삭인 하진이 황제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윤허해 주신다면 소자가 군사를 이끌고 옹주로 가서 반란군의 세력을 도말하겠나이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는 젊은 패기가 담겨 있었다.
편전 안을 울리는 태자 하진의 목소리에 신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마치 젊은 호랑이처럼 위풍당당하게 제가 가겠노라고 말하는 태자를 바라보는 신하들의 술렁거리는 분위기를 눈치챈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그때였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