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천륜을 어기면 하늘이 저를 버리실 겁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며 욕을 할 것입니다.”
선택.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이미 정해졌다.
은호는 천륜을 어기고 싶지 않다.
천륜을 어기면 그건 자신만의 죄가 아니게 된다.
부친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게 되고 가문 전체가 오역을 뒤집어쓸 것이다.
황제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멸문지화는 당연한 것이고 말이다.
그런 위험한 다리를 건널 수는 없다.
이 사내에게 측은지심이 든다 하더라도 그건 잠시 있다 사라질 연민일 뿐이다.
약속을 먼저 저버린 부친으로 인해 가지는 죄책감일 뿐이다.
그러나 그 연민과 죄책감이 한순간이라면, 천륜을 어긴 것에 대한 대가는 평생이다.
선택은 이미 끝났다.
“이제 그만, 돌아가 주세요.”
“하늘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운 것이냐?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것이 무서우냐?”
“저는, 무섭습니다. 태자께서는 무섭지 않을지 몰라도 저는 무섭습니다.”
미친 사내가 무엇을 두려워할까.
하지만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
미치지 않았으니 당연히 두렵다. 무섭다.
“나는 하늘에 버려져도 무서울 것이 없다. 나는 세상이 날 욕해도 조금도 무섭지 않다.”
“저는…… 무서워요…….”
은호의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빨리 이 상황이 끝나는 것이 지금 은호가 바라는 유일한 소망이었다.
빨리 이 상황이 끝나고 이 사내가 돌아갔으면 좋겠다.
자신을 뒤흔드는 이 사내가 제발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나도 무서우냐?”
“무섭……습니다…….”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을 보며 은호는 사내가 화를 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세상의 손가락질과 하늘에 버려지는 것, 그리고 나. 이 중에서 무엇이 제일 무서우냐?”
“그건…….”
뭐가 제일 무섭냐고 묻는다면…….
하늘도 무섭고, 세상의 손가락질도 무섭고, 황제도 무섭고 모든 것이 무섭지만 지금 가장 무서운 것은 역시 이 사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이나 그런 것들보다 지금 당장 저를 범할 수 있는, 저를 해칠 수 있는 이 사내가 가장 무섭다.
“태자님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면 답이 나왔구나. 하늘보다, 세상보다, 그 늙은이보다 내가 더 무섭다면 너는 다른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나만 두려워하면 되는 거다.”
지금 이 사내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내가 세상 손가락질에서도, 하늘에게서도, 늙은 황제에게서도 널 지켜 줄 테니 너는 나만 두려워하거라. 내 품에서만 떨고, 나로 인해서 울고, 나만 생각하고, 나만 바라보고, 오롯이 내 품에만 안겨라.”
그 말을 한 후 사내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같기도 하고, 비웃음 같기도 했다.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다니.”
웃음을 가장한 한숨 끝에, 사내가
“다른 이들에게 자랑해도 좋을 거다. 네가 태자 하진을 비굴하게 만들었다고. 태자 하진이 고작 여자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비굴하게 구구절절한 말을 털어놓더라고.”
사내의 말이 이상하다, 비굴하다니.
왜 이 사내는 스스로를 가리켜 비굴하다 말하는 걸까.
“어차피 내 것이 될 여자, 힘으로 눌러 가져 버리면 끝나는 것을 그 마음 한 줌 얻어 보겠다고 이렇게 협박도 해 보고, 회유도 해 보고, 애원도 해 보는 나를 보면 다들 하진이 미쳤다고 말하겠지. 그런데 정말 미친 것 같다.”
사내는 더는 웃지 않았다.
눈도, 입매도 더는 웃지 않았다.
“네게 미쳤다고 말하는 거다. 네가 나를 미치게 만든다고 말이야. 그런데 나만 미칠 수는 없지.”
숨결이 은호의 입술에 닿았다.
덥고 축축한 숨결이었다.
“너도 내게 미치는 거다. 이전에는 아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속삭임이 귓가에 번졌고, 축축하게 젖은 혀가 귀에 닿았다.
순간 은호가 몸을 떨었다.
낮의 기억이, 칠석의 밤의 기억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몸이라는 것은 영악해서 그때의 기억을 한순간에 떠올려 버렸다.
“이쯤 하면, 충분히 예의를 갖춘 거겠지? 온갖 구차한 말을 한 것으로 나는 충분히 예의를 차렸고, 그러니 이제는 조금 사나워질 생각이야.”
“읏……!”
사내의 혀가 은호의 귀 뒤를 핥았다.
여전히 머리 위로 손이 묶여 있는 탓에 은호는 사내를 밀어 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손이 자유로웠더라면, 사내를 밀어 낼 수 있었을까? 아니, 밀어 냈을까.
“아!”
사내의 입술이 은호의 귓바퀴를 잘근거렸다.
귀를 덮는 더운 숨에 은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내에게 짓눌린 몸은 움쩍달싹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눈을 껌뻑이고 소리를 내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은 은호의 얼굴이 절망과 수치심에 물들어 갔다.
사내는
‘조금 사나워지겠다’
고 했지만 이미 은호에게 이 사내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사나운 짐승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처음부터 이 사내는 사나운 짐승이었다.
그 사나운 이빨로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내고, 자신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다시금 자신에게 그 이빨을 들이대고 저를 새기려 들고 있다.
지금까지가 생채기, 혹은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것은 송두리째 삼키려는 행위다.
단 하나도 남김없이 송두리째.
지금, 잡아먹힌다, 이 사내에게.
“시……!”
싫다고, 제발 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사내가 더 빨랐다.
“구해 주마.”
사내의 목소리는 귀가 아니라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늙은이에게서 구해 주마. 너를 비웃는 모든 것에서 구해 주마. 너를 죽이려 드는 모든 것에서 구해 주마. 너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내가 너를 구해 주마.”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젖어 있던 은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울컥 터졌다.
터진 것은 눈물이 아니라 내내 참고 있던 서러움이었다.
가슴에 꾹꾹 눌러 담고 있던 서러움이 기어이 터져 버렸다.
이 사내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던 마음이지만 서러움은 가슴 가장 아래쪽에 꾹꾹 눌러진 채로 들어 있었다.
늙은 황제의 황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그때부터 차곡차곡 쌓여 왔던 서러움이다.
부친을 위해서 싫다는 말 한마디 못 하며 그저 가슴으로만 쌓아 온 서러움이다.
황후.
모두가 동경하는 자리이지만 적어도 자신은 단 한 번도 그 자리에 욕심을 부려 본 적이 없다.
명예, 권력, 부귀, 그런 것에 마음을 준 적은 없다.
그래서 더 서러웠었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저를 아껴 주고, 제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사내의 아내가 되어 오래도록 해로하는 것.
고작 그런 것 외에 바란 것이 없었는데 강제로 주어진 황후라는 자리, 늙고 탐욕스런 눈을 가진 황제의 아내라는 자리, 양물이 서지 않아 나무로 만든 도구로 저를 어찌해 보겠다는 그런 늙은 사내의 옆자리. 그런 것은 싫었다.
이 답답한 황궁, 자신을 둘러싼 모두의 시선들, 전부 싫었다.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고, 싫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조차 벙어리가 되어 싫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죽도록 싫었지만 얼굴에 그런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쌓인 감정들이 가슴 가장 깊은 곳에 꾹꾹 들어차서, 서러움이 되었다.
눈물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쌓인 설운 눈물이 사내의 한마디에 울컥 터졌다.
둑이 터지듯, 그렇게 쏟아져 나왔다.
‘구해 주마.’
이 한마디에.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다.
이곳에서, 이 상황에서 저를 구해 주겠다는 말을 가장 기다려 왔다.
부친의 입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의 입에서든.
제발 누구라도 자신을 구해 주기를 바랐다.
누구도 구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 간절히, 그러면서도 더 애타게 열망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그래서 지금 이 사내의 입에서 가장 바라던 말이 나오는 순간, 마음의 둑이 터졌다.
이 사내는 자신의 또 다른 감옥이 될 수도 있다.
이 사내 역시 황제와 다를 것이 없는 사내다.
황제처럼 자신을 탐하고, 황제처럼 자신을 속박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내의 그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황제는 말해 주지 않은
‘지켜준다’
는 말을 해 줬기 때문이다.
이 사내 역시 황제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흔들리는 까닭은 이 사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허락’
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내가 구차하다 표현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구질구질하게 애원한다고 하는 이 행위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제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 구해 준다 말한 것 역시도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이 사내의 방식일 것이다.
첫 만남에서는 사나운 짐승처럼 제멋대로 자신을 탐하고 휘저었지만, 지금 이 사내는 그때와는 다르게 자신에게 다가오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내게 잡아먹히면, 내 일부가 되는 거다. 나와 함께 살고, 나와 함께 죽고.”
이건, 이 사내 나름의 구애다.
너무 늦었지만, 이것은 명백한 구애다.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사내를 바라보던 은호가 젖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것을 사내도 느낀 것일까.
“내가 너를 원하듯이, 너도 나를 원하게 될 거다.”
저를 만지는 것을 허락하는 걸 사내가 알아차린 것이다.
은호의 허벅지를 단단하고 큰 손바닥이 어루만졌다.
사락거리는 야장의를 걷어 올린 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쥐었다 놓으며 그 살결을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얇은 야장의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중심에 사내의 단단한 것이 문질러 왔다.
사내의 것은 이미 잔뜩 성이 나 있었다.
그것이 금방이라도 얇은 천 조각을 뚫고 들어올 것처럼 느껴져 은호가 눈을 감은 채로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내의 입술이 그 떨고 있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