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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꽃-12화 (12/108)

12.

“폐……하……?”

두려움이 떨림으로 목소리에 실려 나왔다.

황제인가 싶어 불러 봤지만 등 뒤의 사내가 황제가 아니라는 것은 은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저를 만지는 손은 황제의 손과 사뭇 느낌이 달랐다.

황제의 손이 비쩍 마른 앙상한 나뭇가지와 같다고 한다면 지금 제 허리를 감싸고 어루만지는 손은 굵은 장작과도 같은 손이다.

“서북에서 난리의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어마마마.”

목덜미에 닿는 목소리는 그 사내, 하진의 음성이었다.

하진의 음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내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와 있을 것일까.

문밖은 은환궁의 상궁과 궁녀들이 수십 명씩 에워싸고 있을 터인데 이 사내는 무슨 수로 이곳에 들어온 것일까.

“그런 까닭으로 아바마마께서는 날이 밝아도 침전으로 돌아오지 못하실 겁니다. 가엾게도 초야에 버림을 받다니…….”

사내는 웃고 있었다.

“음란하게 차려입고 사내를 받아들일 준비를 끝내 놓았는데 이렇게 홀로 밤을 새우게 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가 아니니, 오늘 밤은 소자가 어마마마를 모시겠습니다. 아바마마 대신 말입니다.”

정중함을 갖춰 말하고 있지만 그 정중함 속에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 한껏 들어 있다는 것을 은호도 알고 있었다.

“소자의 손이, 그리우셨습니까 어마마마?”

“아……!”

허리를 어루만지던 사내의 손이 다짜고짜 은호의 하체 중심을 꽉 눌렀다.

정확하게 음부 위를 누르는 사내의 손길에 은호가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밖에서는 누구 하나 무슨 일이냐고 물어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은호가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소리를 질러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은환궁에 있는 상궁과 궁녀들은 전부 이 사내에게 넘어간 것이다.

비명을 질러도, 애원을 해도 누구 하나 도와줄 사람은 없다.

“어마마마.”

등 뒤에서 은호를 꽉 끌어안은 사내의 속삭임이 더운 숨결과 함께 그녀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제발…… 태자님…….”

“자식에게 존칭을 쓰시다니요. 황궁의 법도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태자님, 이런 짓은…….”

“소자는 어마마마께 황궁의 법도대로 해 드리려 했더니, 어마마마께서 소자를 타인처럼 대하시니 어쩔 수 없이 소자도 어마마마를 타인처럼 대해야겠습니다. 주은호, 이렇게 부르겠다는 뜻이다.”

뒤쪽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던 사내가 순식간에 몸을 돌려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사내의 무게에 짓눌린 은호가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칠석의 밤 이후로, 내 생각을 했느냐?”

그 말에 은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칠석의 밤 이후, 단 하루도 이 사내에 대한 생각을 해 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떻게 그런 기억을 잊겠는가.

더군다나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긴 사내를 어떻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좋은 의미로 생각한 건 아니다.

칠석의 밤 이후로 이 사내는 은호에게 있어서 무례한 사내, 나쁜 사내, 제멋대로인 사내였다.

하지만

‘데리러 오겠다’

는 말이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은 사실이다.

칠석의 밤, 같이 밤을 보낸 사내.

원했던 원치 않았던, 인연이든 악연이든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어 버린 사내.

만약 이 사내가 정말 부친을 찾아와 청혼을 하고, 부친이 이 사내의 청혼을 수락했더라면 자신은 어땠을까.

조금 전, 잠들기 전까지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만약 황제가 아니라 이 사내였더라면.

이 사내가 조금만 더 일찍 청혼을 했더라면.

만약, 아주 만약에 정말 그랬더라면 자신은 이 사내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을까.

체념하고? 황제의 신부가 된 것처럼 그렇게 체념하고 받아들였을까?

아니면 조금은 다른 마음이었을까.

“나를 기다렸냐고 묻는 거다.”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주은호.”

하진이 제 아래에 짓눌린 은호의 뺨을 손을 내밀어 어루만졌다.

붉은색 야장의를 입은 그녀는 마치 흐트러진 꽃잎처럼 보였다.

“내 것이었다.”

천천히 허리를 숙인 사내의 얼굴이 은호의 얼굴에 가까워졌다.

제 눈앞에 드리워지는 사내의 얼굴에 은호가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눈동자는 한없이 빨려 들어갈 것처럼 깊고 어두웠다.

사람의 눈동자가 이렇게 깊은 어둠을 품고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내 것이었는데…….”

“저는 이미 혼인을 했고, 황제 폐하를 지아비로 모시게 된 몸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냐?”

“그게 무슨…….”

손을 내린 하진의 두 팔 안에 갇힌 은호의 숨이 가빠졌다.

몸을 짓누르고 있는 사내의 무게, 그리고 제 얼굴을 덮는 사내의 숨결, 달아날 곳은 없다는 듯 저를 가두고 있는 팔. 그 모든 것이 은호의 숨을 막히게 만들었다.

“양물이 서지도 않아 이런 도구나 사용하는 그런 늙은이의 노리개로 살고 싶냐고 물었다.”

“그러는 태자께서도 저를 노리개로 여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노리개로 여기고 있다고?”

“그러니 그때도 지금도 이렇게 저를 희롱하는 것이겠지요. 제가 만만하고 우스워 보이니까. 아무것도 못 하는 연약한 여인이니까.”

“노리개로 여겼다면, 기다리지 않고 그때 범했겠지. 정말 노리개로 생각했다면 조금 전 네가 잠들어 있을 때 강제로 너를 범했겠지.”

“이제 그러실 작정이잖습니까.”

“주은호.”

하진이 제 팔 안에 갇힌 은호의 뺨을 양손으로 건드렸다.

사내의 손가락 끝은 투박했다.

고운 손은 결코 아니었다.

“약속을 깬 것은 네 아비다. 네 아비가 나와의 혼약을 깼다. 너와 나의 혼약 말이다.”

“저는, 들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칠석의 밤 이전에 이미 나는 네 아비와 약속했다. 너를 내 비로 주겠다고 한 약속을 네 아비가 깬 것이지 나는 깬 적이 없다.”

하진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은호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것은, 황제가 자신을 황후로 들이겠다는 황명을 내리기 전에 자신에게 뭔가를 말하려 했던 부친의 모습이었다.

[네게 혼담이 들어왔단다.]

그때 부친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자신은 그 혼담의 주인공이 이 사내가 아닐까 생각했었던 것이다.

[네게 청혼을 하신 분은 보통 분이 아니시다.]

보통 사내가 아니라던 부친의 그 말.

[나는 네가 여인 중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기를 원했지만,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은 들지 않는구나. 네게 청혼하신 분은 다른 분이 아니라…….]

부친의 말은 거기서 끊겼었다.

보통이 아닌 신분의 사내. 자신을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는 그런 사내.

그런 사내는 황제가 아니라면 태자 외에는 없다.

그때 부친은 이 사내의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을까.

정말 자신과 이 사내 사이에 혼약이 이미 약속되어 있었던 것일까.

이 사내의 말대로 정말 부친이 먼저 약속을 깬 것이라면…….

지금 이 사내가 하고 있는 말이 전부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이 사내는 오히려 상처를 입은 걸까?

상처를 입은 나머지 오늘 낮에도 자신에게 그리 모질게 굴고, 저에게 그런 수치심을 안겨 준 것일까.

상처를 입은 까닭에 지금도 이렇게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하느라 이런 식으로 제게 두려움을 안겨 주려는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이라면, 자신이 부친을 대신해서 사죄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죄하면, 이 사내는 이대로 물러나 줄까?

“그런데 말이다, 나는 버릴지언정 빼앗기는 법은 모른다. 버린 적은 있어도 빼앗겨 본 적은 없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빼앗길 생각 따위는 없다.”

“그러면…….”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은호의 눈에 비친 사내는 그저 무섭기만 한 사내가 아니라, 조금은 상처 입은 사내로 비쳐졌다.

짐승도 상처를 입으면 더 사나워지는 것처럼 이 사내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은호의 마음속에 측은지심이 생겨났다.

지금 이 상황은 어디를 어떻게 봐도 자신이 약자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눈에는 사내가 측은하게 보였다.

“빼앗기지 말고, 저를 버리세요. 저에 대한 미련을 버리시고, 약속도 버리시고, 전부 다 버리세요. 빼앗기지 마시고.”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만약 빼앗기는 것이 이 사내에게 상처가 되는 거라면 차라리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 사내와 자신의 사이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다.

수치스런 기억만 있을 뿐, 미련을 가질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러니까 지금 버리면, 이 사내도 살고 자신도 살 수 있다. 지금 버리면.

“빼앗길 생각도 없고, 버릴 생각도 없다고 말했는데?”

“그러면 천륜을 어긴 죄인이 되시겠다는 겁니까?”

자신이 왜 이 사내를 걱정해 줘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리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내의 걱정을 왜 하필이면 제가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사내야 죽든 말든, 힘들어하든 말든, 그의 부친과 갈등이 있건 말건, 그런 걱정을 왜 자신이 하는 것일까.

그래, 이건 이 사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공연히 이 사내와 엮여 자신에게 해가 올 것이 두려운 것일 뿐, 진정 그를 염려하는 건 절대 아니다.

“천륜은, 어기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내의 거침없는 대답에 은호의 숨이 막혔다.

제 몸을 짓누르고 있는 사내가 무거워서 숨이 막히는 것이 아니다.

사내의 말이, 사내의 생각이 지독하고 무서워서 숨이 막혔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지독하게 사나워 숨이 막혔다.

“자식은 아비를 잡아먹고 위로 올라가고, 다음 세대의 황제는 앞선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어떻게 하면 이렇게 무서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잔인하고 부도덕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선택을 해라, 주은호.”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던 사내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그녀의 허벅지를 꽉 붙잡았다.

은호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무슨 말이 이 사내의 입술에서 나올지 무서웠기 때문이다.

“늙은이의 노리개로 살겠느냐, 아니면 내 여자로 살겠느냐.”

선택.

선택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선택을 하려면 황후가 되기 전에 했어야 했다.

지금은 선택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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