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머리에 얹은 가채의 무게에 은호의 다리가 비틀거렸다.
가채만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가채 위에 얹어진 황후의 관은 가채만큼이나 무거웠다.
겹겹이 껴입은 붉은색의 화려한 예복은 발을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거추장스러워서 한 걸음을 내딛는데 궁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였다.
황후의 책봉식은 황궁 내궁이 아닌 외궁, 즉 황제가 정사를 보는 외궁의 인정전에서 치러진다.
보통 내궁에서 머무는 황후가 거의 유일하게 내궁이 아닌 외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책봉식이다.
섭정이 아닌 이상 황후는 외궁에서 정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외궁으로 나갈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문무백관들과 황실에 속한 이들이 전부 외궁에 모여 20년 만에 책봉되는 황후를 보게 된다.
그 모든 시선이 모이는 중심에 자신이 선다는 것만으로도 은호의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리 심약해서야…….’
그런 은호를 지켜보던 훈육 상궁이 속으로 혀를 찼다.
훈육 상궁은 닷새 동안 은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다.
황궁에서 30년 가까이 궁인으로 지내 오며 온갖 부류의 인간들을 봐 왔던 상궁으로서는 새 황후인 은호가 그저 위태롭기만 했다.
저렇게 심약한 성품으로는 이 황궁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물론 아비가 주 승상이니 아비의 권세 때문에라도 후궁들이나 왕자들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만큼 주 승상의 권세가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아비의 권세에 기댈 수는 없다.
이 황궁에서는 스스로 서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20년 전에 죽은 호련 황후가 그랬다.
막강한 친정 가문이 있었지만, 가문만 강력했을 뿐 정작 황후 자신은 심약했었고, 결국은 그 심약한 성품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호련 황후는 병으로 죽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건 극소수만 알고 있는 진실이다.
그녀는 결국 황궁의 어둠에 잡아먹혔다.
그렇다면 이 어리고 심약한 새 황후는 어떨까.
이전 황후의 전철을 밟게 될까?
“저어, 잠시만…….”
은호가 훈육 상궁을 돌아보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은 것은 그때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마마.”
“숨이 막혀서 그런데, 잠시만 앉았다 가도 될까?”
은호의 말에 훈육 상궁의 눈매가 살짝 구겨졌다.
“아직 책봉식까지는 여유가 있으니 조금만 쉬셨다 가시지요.”
상궁의 눈짓에 궁녀들이 부축하고 있던 은호를 전각 앞의 돌로 만든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게 해 주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는 절대로 혼자서 앉고 일어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긴장을 푸십시오, 마마.”
“그러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가 않네…….”
여간 힘들어하는 것이 아닌 은호의 표정을 보며 훈육 상궁이 궁녀들에게 물러나라 손짓을 했다.
“하오면 마마, 저희들은 잠시 물러가 있겠습니다. 숨을 돌리신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잠시 후면 책봉식이다.
그런데 지금 은호의 낯빛으로 봐서는 이대로 강행한다면 책봉식 도중에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만약 황후가 책봉식 도중에 쓰러지는 일이 일어난다면 황후를 모시던 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궁녀들의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긴장하고 있는 황후를 몰아붙이면 더 긴장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때는 오히려 황후를 혼자 있게 해 주고 조금은 마음을 느슨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마침 오늘은 바람도 좋고 햇볕도 좋다.
전각 주위의 풍경이 아름다우니 이 전각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긴장한 마음을 풀게 해 주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훈육 상궁이 궁녀들을 이끌고 뒤로 물러났다.
‘너무 무거워…….’
전각의 돌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은 은호가 제 몸을 감싼 화려한 장신구와 의복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마디마다 끼워진 가락지가 손을 무겁게 만들었다.
목에 건 목걸이와 귀걸이는 또 어떠한가.
금관의 무게도 목이 부러질 것처럼 무거웠다.
그러나 가장 무거운 것은 황후라는 자리다.
황제와 더불어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게 되는 자리에 자신이 선다는 것이 너무 무겁다.
압박감을 견뎌 낼 수 있을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라면 오늘 책봉식이 끝나면 부친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책봉식 전에는 별궁에서 외부인과의 접촉이 일절 금지되었지만 이제 책봉식만 끝나면 은환궁에서 자유로이 부친을 만날 수 있다.
사가의 몸종이었던 사비도 입궁시켜 함께 지낼 수 있다고 들었다.
사비가 곁에 있으면 한결 나을지도 모른다.
‘얼른 사비를 데려오고 싶어…….’
은호와 동갑인 사비는 어려서부터 동무처럼 자란 몸종이다.
가장 말이 잘 통할뿐더러 힘들고 어려운 것도 전부 사비에게 털어놓고는 했다.
어려서 모친을 잃은 은호에게 있어서 사비는 친구이자 언니였다.
그때였다.
부스럭.
풀잎이 움직이는 소리에 눈을 감고 있던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
찰랑―
그녀의 머리에 씌워진 금관의 장식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울렸다.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곳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아…….”
사내를 보는 순간 은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사내가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일까.
자신이 잘못 본 것일까?
너무 어지럽고 답답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내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은호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 갔다.
헛것도 아니고 잘못 본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사내였다.
칠석의 밤, 자신을 희롱하고 제 몸을 탐하던 그 사내.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가 눈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의 그 사나운 눈빛이 지금 바로 앞에 있었다.
자신을 송두리째 삼킬 것 같은 사나운 눈동자.
“어, 어떻게 이곳에…….”
귀족인가?
하지만 귀족 사내가 어떻게 내궁에 들어올 수 있는 걸까.
이 내궁은 황족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다.
“마마.”
사내가 입을 열었다.
굵은 목소리에 담긴 힘이 은호를 짓눌렀다.
사내는 그녀에게 어떤 짓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은호는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사내의 목소리에 담긴 힘 때문인지 아니면 이전에 사내에게 억압당했던 기억이 은호로 하여금 겁에 질리게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은호의 전신이 얼어붙은 채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소, 소리를 지르면…….’
훈육 상궁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소리를 지르면 달려올 수 있다.
입술을 열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애처롭게 달싹거리기만 하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던 사내의 눈꼬리가 휘어지며 서늘한 미소가 그 눈가에 담겼다.
“황후라니, 그런 몸으로 가당키나 하다 생각하셨던 겁니까?”
사내는 존칭을 썼지만 은호에게는 그것마저도 위협처럼 들렸다.
‘그런 몸.’
이 사내는 그때의 일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입술로.”
사내의 손이 은호의 입술에 닿았다.
연지를 바른 도톰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사내가 낮게 속삭였다.
“내 좆을 빨고.”
은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떠오르는 그때의 광경이 머릿속에 선명했다.
이 사내의 양물을 두 손으로 쥐고 빨던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내 손가락을 삼키고 질질 싸던 몸으로 황후가 되려고 하다니.”
“소, 소리를…… 지, 지르겠…….”
“소리? 질러 보지 그래?”
사내의 손이 은호가 입고 있는 예복의 치맛단을 거칠게 걷어 올렸다.
치맛단이 구겨지며 그 안으로 사내의 손이 파고들었다.
“무, 무엄합니다……!”
고작 그렇게 말하는 것이 은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미한 저항 앞에서 사내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지금부터 더 무엄한 짓을 할 텐데, 어쩌나?”
“아……! 읍!”
사내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그 입술이 은호의 입술을 뒤덮었다.
제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사내의 숨결에 은호가 와락 겁을 먹었다.
이곳은 황궁이다.
그것도 내궁. 멀지 않은 곳에 훈육 상궁과 궁녀들이 있고, 만약 그들이 지금 이 광경을 보게 된다면 목이 달아나는 것은 이 사내만이 아니다.
자신의 목도 달아나고, 부친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 안 돼……!’
여기서는 안 된다.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라도 들키면 끝장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밀어 내려고 했지만 그녀의 힘은 사내 앞에서는 무력했다.
거대한 바위 앞에 가늘게 부는 미풍만도 못한 손길로 저를 밀어 내려는 은호를 사내는 오히려 더 지독하게 밀어붙였다.
억지로 비집어 연 입술 안으로 사내가 혀를 찔러 넣었다.
뜨거운 혀가 그녀의 혀를 얽고 휘감았다.
혀가 얽히는 순간 타액이 엉기며 은호의 입 안에 제 것이 아닌 타액이 스며들었다.
치맛단 안으로 파고 들어간 사내의 손이 그녀의 속곳 위를 문질렀다.
그 손이 속곳 위를 문지를 때마다 은호의 허리에 저릿한 감각이 울렸다.
‘안 돼…… 안 된다고…….’
하지만 사내는 그녀를 놓아줄 기색이 없었다.
사납게 그녀의 입 안을 탐하며 치맛단 안을 더듬던 사내가 그 손을 속곳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은 그때였다.
‘아……!’
순간 은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속곳 안으로 파고 들어온 사내의 손이 체모를 헤집고 기어 들어가 그녀의 음문을 쓰윽 문지른 것이다.
‘미친 것이야……!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이 사내는 미친 거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게 아니고서 어떻게 황궁에서 황후를 겁탈할 생각을 품는단 말인가.
이건 명백한 겁탈이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