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7화 (7/108)

7.

[명심하거라. 황궁은 승냥이와 늑대가 가득한 곳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거라. 누구도 믿지 말고, 누구에게도 진심을 말하지 말거라, 누구에게도. 속마음만 감추면 적어도 약점을 물어뜯기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입궁 전 신신당부를 하던 부친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은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도무지 가슴이, 심장이 진정이 되지 않는다.

오늘 은호는 황궁에 들어왔다.

정식 책봉식까지는 아직 닷새가 남았다.

닷새 동안 은호가 할 일은 별궁에서 몸을 정결하게 하며 황궁의 예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닷새 만에 황궁의 예법을 전부 익힐 리는 없지만 적어도 책봉식에서 실수를 하지 않을 정도의 예법은 익혀야 하기 때문에 책봉식에 앞서 닷새 전인 오늘 입궁을 했다.

책봉식이 끝나면 황후전으로 거처를 옮기겠지만 그때까지는 이 별궁이 은호의 거처다.

훈육 상궁이 이 별궁에 같이 머물며 은호의 예법 교육을 맡았다.

훈육 상궁은 중년의 여성으로 후덕한 몸집을 가졌지만 눈매는 매서웠다.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이 금지옥엽으로 키운 은호는 황궁의 이런 엄숙하고 긴장된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았다.

숨이 막힌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황궁의 공기는 사가의 공기와 달랐다.

그리고 황궁의 사람들은 마치 얼굴에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무표정했다.

어린 나인부터 시작해서 상궁, 그리고 번을 서는 위병들까지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그것이 은호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너무 무서웠는데…….’

일전에 딱 한 번 본 적 있는 황제를 은호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탐욕으로 가득 차 있던 그 눈을 떠올리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주름 가득한 얼굴, 그리고 노쇠한 손. 그 손이 자신을 만지고 그 입술이 자신의 몸을 탐할 거라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이 맛을 기억하거라.]

문득 그 사내가 생각났다.

곧 데리러 오겠다던 그 사내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때는 그렇게 호기롭게 데리러 오겠다 장담하더니 막상 겁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허세였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겁이 많은 자신에게 허세를 부려 겁을 주고 놀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귀족의 자제라고 해도 승상인 부친에게 당당히 찾아와서 딸을 내달라 할 수 있는 용기는 쉽사리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그 사내는 처음부터 자신을 데리러 올 생각이 없었던 것이리라.

처음부터 그저 자신을 희롱하고 끝낼 생각으로 그랬던 것이 틀림없다.

그걸 모르고 거기에 휘둘려 그 사내가 진짜 찾아오면 어쩌나 하고 겁을 먹고 있던 자신이 그저 어리석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

오늘 이후로 자신이 황궁 밖으로 나갈 일은 없고 그 사내와 마주칠 일도 두 번 다시 없다.

그 사내는 칠석날의 좋지 않았던 기억으로 치부하고 지워 버리면 그만이다.

“이 황궁에서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 마마께서 고개를 숙이셔야 하는 신분의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마마께서는 황제 폐하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시면 아니 되십니다.”

훈육 상궁의 목소리는 엄격했다.

“알겠습니다.”

“마마, 아랫것들에게는 하대하셔야 하옵니다.”

승상의 딸로, 귀한 신분으로 자랐지만 은호는 집안 하인들에게도 함부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또래의 하인이나 하녀들에게는 동무처럼 대해 주었지만 나이가 지긋한 하인들에게는 하대를 한 적이 없다.

그들이 살아온 날수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황궁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훈육 상궁은 가르치고 있다.

황후라는 자리가 그런 것이라고, 더는 이전의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알았다.”

은호가 겨우 대답했다.

어깨가 무거웠다.

입고 있는 옷은 잠자리의 날개처럼 가볍지만 이 황궁의 공기가 은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내일부터는 황궁을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거하시는 금환궁, 앞으로 마마께서 거하실 은환궁, 그리고 후궁들의 처소가 있는 연환궁과 왕자마마들의 궁이 있는 서환궁까지를 내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태자 전하를 비롯하여 왕자마마들은 혼인을 하면 황궁 밖으로, 혼인을 하지 않으면 황궁 안에 거처를 두시기 때문에 책봉식이 끝나고 나면 마마께서는 매일 태자 전하와 왕자마마들, 그리고 후궁들의 문안 인사를 받으셔야 하옵니다.”

“매일?”

“네, 마마. 매일 문안을 받으심으로 이 황궁의 안주인이 마마라는 사실을 저들로 하여금 한시도 잊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후궁들과 왕자들, 그리고 태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신분의 이들이 이제 자신 앞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문안을 아뢰게 된다.

그 광경을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찔했다.

“마마, 후궁들을 겁내지 마시옵소서. 후궁들이 아무리 왕자를 낳고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황후는 마마이시옵니다. 후궁들의 생사는 폐하가 아니라 마마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옵니다.”

“그게 무슨…….”

“황궁의 내명부의 수장은 황후마마이시옵니다. 내명부에 속한 모든 이들은 전부 황후마마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첩지를 내리는 것도, 품계를 올리는 것도 황제 폐하가 아니라 마마이십니다. 황궁의 주인은 폐하이시지만 내명부의 주인은 마마라는 것을 기억하시옵소서.”

훈육 상궁의 말은 은호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이렇게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싶었던 건 아니다.

은호가 바라던 것은 잔잔하고 소소한 행복이었다.

저를 사랑하고 아껴 주는 사내의 아내가 되어 그 사내의 아이를 낳고 그 사내의 의복을 짓고 수를 놓으며 그 사내와 더불어 웃으며 살아가는 것이 은호가 바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앞에 놓인 것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권력이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력, 모두가 자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그런 권력.

이 권력을 자신이 사용할 수 있을까.

[힘은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그 힘에 먹히는 법이다. 그래서 다스릴 수 없는 힘은 없느니만 못하다는 거다.]

부친은 항상 그렇게 말하고는 했었다.

다스릴 수 없는 힘은 없는 것만 못한 것.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 힘에 잡아먹힌다.

자신은 이 힘을 다스릴 수 있을까, 아니면 잡아먹힐까.

[염려 마라. 아직은 이 아비가 네 곁에 있지 않느냐. 이 아비가 숨이 붙어 있는 한 너를 지켜 줄 것이니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마라.]

‘아버님…….’

은호가 지금 믿고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부친 외에는 없다.

부친 외에 누구도 의지할 대상은 없다.

망망대해와 같은 이 황궁에 홀로 버려진 이 무서움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끈은 부친이다.

‘아버님……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은호의 눈매가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

“쿨럭―!”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주이염이 소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소맷단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하아…… 하아…….”

입술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으며 주이염이 비틀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여 의자까지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낯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의자를 붙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그가 애써 진정시켰다.

“아직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주이염이 눈을 감았다.

[약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소인도 장담을 해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은밀하게 불러왔던 의원은 단 1년도 장담해 주지 못했다.

지금 주이염은 죽어 가고 있다.

다만 제 목숨이 이제 얼마 남았는지 그걸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곤혹스러울 따름이다.

목숨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목숨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는 건 또 아니다.

사람으로 살며 누릴 수 있는 권력은 다 누려 봤다.

한낱 미천한 신분에 불과했던 자신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승상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권세도 명예도 누려 본 지금 그에게 남은 미련은 딸이다.

자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제가 죽은 후에 홀로 남겨질 딸이 걱정이 되어 쉽게 죽어 줄 수도 없다.

독한 약을 먹어 가며 생명을 연장하는 이유도 딸 때문이다.

태자와 혼인을 시키면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으려나 했더니 뜻밖에도 딸은 황후로 간택을 받았다.

태자비보다는 황후가 더 낫다는 판단을 내려 황제에게 딸을 내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귀하디귀한 딸이라 온실 속의 꽃처럼 키운 것이 지금은 도리어 걱정거리가 되었다.

딸은 세상 물정도 모를뿐더러 황궁의 암투에는 더없이 무지하다.

성품은 여리고 눈물도 많다.

사람을 쉽게 믿고 의심할 줄을 모른다.

그런 딸은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황궁에서 살아가는 것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딸이 황궁에서 제 입지를 굳힐 때까지는 자신도 살아 있어야 한다.

살아서 딸의 힘이 되어 주어야만 한다.

1년, 혹은 2년.

딸이 황후로서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고 황궁 안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 확인하면 자신은 그때 가서 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절대로 죽어 줄 수가 없다.

“조금만 더 버티자…….”

주이염이 고통스럽게 헐떡이던 숨을 고르게 잠재웠다.

처음에는 거칠던 숨이 점점 잦아들더니 이내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

그러나 고통의 흔적처럼 피가 묻은 옷을 벗으며 주이염이 텅 빈 침소 안을 둘러봤다.

이제 이 집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도, 딸도, 더 이상 아무도 남지 않았다.

문득 가슴에서 밀고 올라오는 쓸쓸함에 주이염이 탄식 섞인 숨을 내쉬었다.

딸을 입궁시킨 첫날 밤이었다.

금단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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