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단의 꽃-6화 (6/108)

6.

승상 주이염의 딸 주은호가 황제의 청혼을 받고 황후로 책봉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동묘를 휩쓸었다.

초한의 도읍인 동묘의 유력한 귀족들은 예상하지 못한 소식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20년 가까이 황후를 들이지 않았던 황제였다.

20년 전 지금의 태자를 낳았던 황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황제는 그 빈자리에 다른 황후를 앉히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었다.

죽은 황후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가장 유력한 의견은 외척 세력을 들이지 않으려는 의도라는 것이었다.

전 황후의 경우는 외척의 세력이 막강했었다.

전 황후의 가문이 지금의 황제가 아직 왕자에 불과했을 때 전적으로 그를 지지함으로써 황제는 바로 위의 다른 왕자들을 제치고 태자에 책봉되어 끝내 옥좌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를 옥좌에 올린 외척들은 권한을 행사하려고 했고 그들은 황제를 자기들 입맛대로 좌지우지하려 했었다.

그런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황제가 등용한 것이 지금의 승상 주이염이다.

승상 주이염을 등용하여 가까이에 두고 권력을 줘서 외척을 견제하는 한편 황후의 오라비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유배를 보냄으로써 결국에는 황후의 친정 가문을 몰락하게 만든 것이 황제였다.

그리고 황후가 병들어 죽고 난 후 황제는 더는 다른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강력한 외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황제는 신하들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후궁은 들일지언정 황후는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랬던 황제가 다른 사람도 아닌 승상 주이염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겠다고 선포했다.

다시금 강력한 권력을 가진 외척을 만들겠다는 황제의 선포에 귀족들이 당황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상대가 주이염이다.

이미 황제 다음으로 초한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주이염.

그런 주이염의 딸이 황후가 되면 가장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 태자 하진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두 명의 권력자.

황후의 아비와 태자.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머잖아 태자와 주이염 간에 싸움이 시작될 것을 짐작했다.

그건 피해 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건 형님 전하를 견제하려는 아바마마의 술수입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소리를 지른 것은 하진의 이복 아우 위연이었다.

평소 다혈질이지만 그만큼 솔직하다는 평을 듣는 왕자로 후궁 강비의 소생이다.

강비는 궁인 출신으로 황제의 승은을 입어 후궁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뒤를 받쳐 줄 세력이 없어 일찌감치 죽은 황후의 그늘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황후의 사후에도 강비의 아들 위연이 황후의 아들 하진을 마치 동복형을 대하듯 따르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까지 이어졌다.

“형님! 절대로 가만히 계셔서는 아니 되십니다!”

“가만히 있지 않으면, 지금 전하께서 주 승상과의 선약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미 폐하의 심기를 거스르게 되는 일이라는 걸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잔뜩 흥분한 위연을 혀를 차며 쳐다보는 사내는 홍문. 하진의 책사다.

다혈질인 위연과는 반대로 차분하고 조용한 성품의 사내로 그 속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소문이 난 사내이기도 했다.

동학의 학동으로 있던 그를 하진이 일찌감치 발탁하여 곁에 둔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태자 하진의 측근으로 불리는 삼인방이 있다면 바로 왕자 위연과 책사 홍문, 그리고 호위무사 이루다.

반대로 말하면 이 세 사람 외에는 하진이 믿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 절대로 사람을 믿지 않는 것, 그것만이 황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진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모후가 세상을 떠난 후 20년 동안 기어이 살아남았다.

“주이염이 약조를 어겼습니다, 전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홍문의 물음에 하진은 딱히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위연이 흥분한 것에 비하면 하진은 그다지 놀라지도 않는 기색이었고 그 얼굴에서 흥분은 더더욱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매는 더 싸늘하게 가라앉았을 뿐이다.

“형님!”

하진이 담담한 반응을 보이자 더 다급해진 것은 위연이었다.

금방이라도 큰일을 낼 것처럼 분통을 터트리는 위연을 향해 하진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가 있으라는 뜻이다.

“이루만 남고 둘은 나가 있거라.”

“하오나 형님!”

“자, 자. 나가시지요, 전하. 태자 전하께서 나가 있으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만 나가야지요.”

나가라는 말에도 버티고 있을 것처럼 보이는 위연의 목덜미를 잡은 홍문이 그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위연이 나가자 침전 안은 한결 조용해졌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혼자 남게 한 이루에게 하진이 조용히 질문했다.

하진의 눈매는 마치 섬뜩한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무엇을 말입니까?”

“주이염이 내 뒤통수를 친 것에 대해서 묻는 것이다.”

“주 승상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듯하옵니다.”

“일부러 그러지 않았으면?”

“누구라도 황제께서 그런 명을 내리시면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것이 전부 아바마마의 죄라는 것이냐?”

“전하. 다른 혼인 상대를 찾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사옵니다. 주이염의 여식과 엮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옵니다.”

“위험하다라…….”

하진이 무릎 위에 올린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런 식으로 손가락을 움직인다는 것을 이루는 알고 있다.

지금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하진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다는 것 역시 이루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위연처럼 흥분해서 얼굴에 전부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다, 하진은.

화가 날수록 더 차갑게 가라앉고, 절대로 타인에게 진짜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게 지금까지 이루가 봐 온 하진이다.

[내 여자다, 주은호.]

하지만 그때 멀어지던 주이염의 딸을 바라보며 짓던 하진의 눈빛은 진심처럼 느껴졌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루는 그때 그렇게 느꼈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하진이 좋은 인연을 만난 것에 감사하며 축하의 말을 건넨 것이다.

태자. 정치적인 싸움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알지만 이루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다.

자신의 주군이 잠시라도 편안히 쉴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것.

주이염의 딸이 그런 상대가 되어 줄 거라고 잠시나마 믿었던 것이 잘못된 것일까.

무엇보다 이루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이제 하진이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인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진은 제 손에 들어온 것을 빼앗기지 않는 사내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한번 잡은 것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빼앗기지도 않는다.

그런 사내가 제가 가지려던 여인을 순순히 빼앗길까.

하지만 상대는 황제다.

자칫 잘못하면 하진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진이 과연 할 것인가. 주이염의 딸을 위해서 과연 그렇게까지 할 것인가.

“싸움에서 진 개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느냐?”

“전하?”

그때까지 무릎 위를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그리고 하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등에 새파란 핏줄이 불거졌다.

그 새파란 핏줄은 마치 그의 분노를 드러내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번 싸움에서 진 개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법이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때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던 까마귀 떼들이 그 상처 입은 몸뚱이를 뜯어먹기 시작하겠지. 싸움이라는 건 그런 거다.”

“전하.”

“싸움을 걸어온다면 이쪽에서도 피하지 않고 받아 주는 것이 예의 아니겠느냐?”

하진의 말뜻을 알아차린 이루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 하진은 황제와 싸우려는 것일까.

모든 것을 걸고 피하지 않고 싸우겠다는 뜻일까.

그러다가 지면 처참하게 추락할 것이다.

그러나 몸을 바짝 낮추고 기다리고 있으면 머잖아 황제는 노쇠하여 천수를 다하게 된다.

현명한 자라면 그때까지 기다리겠지만 안타깝게도 하진은 현명한 자가 아니라 사나운 맹수다.

기다림보다는 싸우는 쪽을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충분히 오래 기다려 왔고, 충분히 많이 참아 왔기 때문이다.

이제, 야수가 기지개를 켤 때가 왔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눌러 감추고 있던 맹수의 본능을 이제 드러내려 하는 것이라면,

“소인이 곁을 지키겠나이다, 전하.”

목숨을 다해 이 사내를 지키는 것이 자신이 할 몫이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하진, 자신은 그런 사내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의 칼이 될 뿐이다.

“때로는 천륜을 저버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하진이 느릿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아비가 자식을 버리려 하니 자식도 아비를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진의 입술에 머금어진 미소는 차츰 냉소로 변해 갔다.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냉소였다.

감출 생각 없는, 포식자의 미소이기도 했다.

“패륜을 저지르더라도, 나를 용서하시겠지. 아바마마도 패륜의 끝에 그 자리에 오르셨으니 자식이 그것을 닮는다면 오히려 기뻐하실 수도 있고 말이야.”

하진의 마지막 말이 이루의 가슴을 칼로 저미듯이 치고 들어왔다.

“용서하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지만. 왜냐하면 나도 용서할 생각이 없으니까.”

오래 삭여 온 분노가 차갑게 얼어붙은 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얼어붙은 칼이었다.

오래 벼려 온 칼.

천륜도 끊어 버릴 칼, 그것이었다.

금단의 꽃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