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칠석의 날로부터 닷새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언제 그 사내가 불쑥 자신을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놓지 못하고 있던 은호에게 부친이 뜻밖의 말을 꺼내 놓았다.
“네게 혼담이 들어왔단다.”
부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은호가 현기증을 느꼈다.
혼담.
그 사내일까?
[데리러 갈 것이니 이 맛을 기억하고 있거라.]
정말 그 사내일까?
아닐 것이다. 그 사내가 어찌 감히 자신에게 청혼을 해 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사내가 아니라면 누구일까.
“은호야.”
주 승상이 딸을 잠시 동안 물끄러미 쳐다봤다.
부친의 눈동자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부친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은호는 그다지 많이 보지 못했었다.
은호가 알고 있는 부친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당당하고 오만한 성품이었다.
승상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부친에게는 무서울 것도 없고 거칠 것도 없었다.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단다. 네 어미가 너를 낳고 그리 숨을 거둘 때 핏덩이인 너를 내게 부탁했으니, 네 어미를 위해서라도 너는 행복해야만 한다.”
“아버님…….”
“네게 청혼을 하신 분은 보통 분이 아니시다.”
대체 어떤 자가 자신에게 청혼을 했길래 부친이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네가 여인 중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기를 원했지만,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확신은 들지 않는구나.”
“아버님, 왜…….”
“네게 청혼하신 분은 다름이 아니라…….”
주저하던 주 승상이 결심이 선 듯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어르신!”
밖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새파랗게 안색이 질린 청지기가 뛰어 들어왔다.
주 승상의 집에서 20년도 넘게 청지기를 지낸 이 늙은 사내는 평상시에는 좀처럼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 차분하게 움직이고 서두르거나 호들갑을 떠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청지기가 문도 두드리지 않고 주 승상과 은호가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청지기의 표정을 봐서는 큰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지, 지, 지금 폐하께서…….”
“지금 이곳에 말이냐?”
주 승상이 벌떡 일어섰다.
아비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는 것을 은호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얼굴에는 약간의 경계심과 두려움까지 번져 있었다.
부친인 주 승상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나라 제일의 귀족이다.
황제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측근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든 이들이 주저하지 않고
‘주이염 승상’
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부친이 지금 갑작스런 황제의 방문에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예고하지 않은 황제의 방문이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긴장할 리가 없다.
부친의 표정에 은호의 가슴으로 불길함이 스쳤다.
*
“사냥을 가던 길에 잠시 들렀다.”
황제의 음성은 무척이나 노쇠하게 들렸다.
황제의 연세가 꽤 높다는 것은 은호도 알고 있다.
예순 살 그 이상으로 부친에게서 들은 기억이 났다.
부친과 함께 황제의 앞에 엎드린 은호는 감히 얼굴을 들어 황제를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폐하를 모실 준비를 하였을 터인데……. 이런 누추한 곳에 어찌 친히 왕림하셨나이까.”
부친의 목소리는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는 평정심을 되찾고 있었다.
평정심을 되찾은 것인지 아니면 당황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인지는 은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옆에 있는 아이가 그대의 딸인가?”
“네, 폐하. 부족한 것투성이인 딸이옵니다.”
“얼굴을 들어 보아라.”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은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곁에 무릎을 꿇은 부친을 쳐다봤다.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얼굴을 들라는 말에 정말 얼굴을 들어도 되는 것일까.
은호에게 있어서 황제는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다.
감히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버지…….’
눈치를 살피는 은호에게 주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들라는 뜻이었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바들바들 떨던 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분이 황제 폐하…….’
고개를 든 은호가 제 앞에 앉아 있는 노쇠한 사내를 바라보며 왈칵 겁을 먹었다.
황제는 그녀의 예상을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 허연 수염과 머리카락, 그리고 마른 체구.
그러나 그 와중에도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눈빛이었다.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에서 유난히 그 눈매가 무서웠다.
아직 많은 사람을 상대한 적이 없는 은호로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런 그녀가 보기에도 황제의 눈빛은 탐욕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듣던 것처럼 미인이로구나. 아주 고운 얼굴이야.”
고개를 든 은호의 얼굴을 확인한 황제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는 순간 주 승상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이 갑작스런 황제의 행차에 대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주 승상의 입 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는 이미 황제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측하고 있었다.
다만 자신의 예측이 현실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어떤가, 주 승상. 그대의 딸을 내게 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측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주 승상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는 이미 딸의 신랑감을 정해 놓았다.
정식으로 혼담이 오가지 않았을 뿐, 이미 딸의 신랑감으로 내정하고 있던 사내와 말을 끝내 놓았고 시기만 조율하고 있었다.
‘더 서둘렀어야 하는 걸까……. 너무 뜸을 들여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로 지금까지 딸의 혼사를 미뤘던 자신이 어리석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딸의 혼사이기에 더 조심하고 싶었다.
상대가 딸을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는 사내인지, 딸이 그 사내와 혼인해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인지 몇 번이나 생각하고 또 고심한 끝에 혼인을 시키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너무 늦은 걸까.
설마 황제가 선수를 칠 줄은 몰랐다.
만약 지금 황제에게
‘제 딸은 태자 전하와 이미 약조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
그렇다.
은호와 혼인하기로 약조한 사내는 다름 아닌 태자 하진이다.
하진. 황제의 적장자로 장차 황제의 뒤를 이어 초한을 다스릴 사내. 하진을 은호의 배필로 결정한 까닭은 그 사내의 권력이 있어야 자신의 사후에도 은호를 지켜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정적이 많다.
황제의 측근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권력을 누리며 살아왔지만 그건 다른 말로는 그만큼 수많은 정적을 만들어 왔다는 의미고 누군가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은 자신이 딸의 방패가 되어 줄 수 있지만 자신이 죽고 난 후, 누구도 딸을 지켜 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딸을 지켜 줄 강력한 힘을 가진 사내를 배필로 정해 주고 싶었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내, 주이염이 보기에 가장 적합한 상대가 바로 태자 하진이었다.
젊고 강하고, 무엇보다 차기 옥좌의 주인.
이미 물밑으로 태자 하진과 약속은 끝났다.
이건 일종의 거래다.
하진이 지금 태자의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황제의 마음은 변덕스럽다.
언제 황제가 변덕을 부려 하진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킬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황궁 안에는 아직 자신들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는 황제의 무수한 자식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자식을 황제로 만들려는 후궁들이 독기를 부리고 있는 곳이 황궁이다.
옥좌에 오르기 전에는 무엇 하나 확실한 보장이 없다.
가장 유력하지만 아직은 그 발밑이 위태로운 하진에게 그의 조력자가 되어 힘을 실어 주기로 약속하고 대신 딸을 태자비로 맞이해 달라는 일종의 거래를 이미 보름 전에 매듭지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황제가 딸을 후궁으로 달라고 하면, 하진과의 약속은 깨지고 만다.
황제는 벌써 예순다섯의 나이. 아무리 장수한다고 한들 앞으로 고작해야 5년에서 10년이 전부다.
무엇보다 지금의 황제는 너무 나이가 들어 더는 후사를 생산하지 못한다.
황제의 사후 아들을 낳지 못한 후궁의 말로는 비참하다.
사랑하는 딸을 이제 와서 황제의 후궁으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다.
‘이 난관을 어찌…….’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있을 때였다.
“후궁이 아니라 황후로 맞이할 생각이네.”
순간 주이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후.
‘이러면…… 차라리…….’
주이염은 명석한 사내다.
상황 파악이 빠르고 계산도 빠르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지도 못했다.
황후.
후궁과 황후는 그 입지가 하늘과 땅 차이다.
현 황제는 오래전 황후와 사별한 후 지금까지 새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다.
그동안 숱한 후궁들이 비어 있는 황후의 자리를 노렸지만 누구도 그 자리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의 딸이 황후가 된다면?
일단 황후가 되면 황제가 붕어하게 되더라도 그 직위는 보장된다.
새 황제가 등극을 하더라도 황후는 황제의 어미로 황실의 어른으로 대접을 받게 된다.
황제가 유명을 남기지 않고 붕어하게 되는 경우는 황후에게 후계 지명권이 주어지기도 한다.
황궁에서 황제 다음으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는 것이 황후, 자신의 딸이 황후가 된다면, 태자비가 되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을까.
‘어차피 황제가 은호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상 은호는 태자비는 될 수 없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황후가 되는 것이 낫겠지.’
재빠르게 결정을 내린 주이염이 황제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주이염이 머리를 조아리는 것과 동시에 황제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의 앞에 한껏 자세를 낮추는 부친과 귀를 울리는 황제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은호의 눈이 두려움으로 물들어 갔다.
지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 그 자체에 빠진 은호의 눈동자에 깃든 두려움은 불길함이었다.
불안함과 불길함, 그리고 두려움.
그것이 온전히 은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금단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