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결혼식 당일.
“아아아아악!”
“아가씨, 아가씨!”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하루.
엘레나는 방 안을 팔짝팔짝 뛰어다녔고 제인은 그녀를 잡느라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게 다 어제 음주 가무를 즐긴 탓이다.
아마 자정까지인가, 어서 가야 한다는 시종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전야제를 즐겼지.
이건 계속 술을 부어대는 이삭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욕! 세욕부터 하셔야 해요!”
“아아악! 또 늦었어, 또!”
아침부터 엘레나를 깨웠지만 일어날 생각은커녕 잠꼬대나 실컷 하는 바람에 제인의 얼굴엔 다크서클이 두 겹 늘었다.
“시간이 없어요. 곧 화장과 머리 해 주실 분이 오실 거라고요! 그 전에 어서 목욕부터!”
벌써 해는 중천에 떠 방 안이 눈부실 정도로 환했고, 밖을 보니 객석에 하객들도 몇 명 앉아있었다.
엘레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뒤 무슨 정신인지 모를 상태로 향유를 발랐다.
원래 결혼식 전 신부는 1시간 동안 정성스레 목욕하며 몸을 깨끗이 한다던데 지금은 그럴 새가 없었다.
“전하, 분장사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아니! 아직! 한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해!”
“예, 전하.”
“제인, 드레스! 드레스!”
엘레나는 제인이 준비한 드레스에 숨을 꾹 참으며 허겁지겁 팔다리를 끼워 넣었다.
덕분에 드레스에서 우둑 소리가 났지만 구멍 난 곳은 없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왜 머메이드로 디자인했지? 대체?”
머메이드 특성상 꽉 끼는 드레스라인 탓에 입는 데 좀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그걸 우악스럽게 입어댔으니 찢어지는 소리가 날 수밖에!
“멍청한 엘레나. 멍청해!”
엘레나는 머리를 때려가며 울상을 지었다.
그 상태로 거울을 보니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웬 바보 하나가 서 있었다.
“아가씨, 거울 볼 시간도 없어요. 이제 1시간 남았어요. 어서 분장사를…!”
“알았어.”
엘레나는 맛이 간 목소리를 두어 번 가다듬은 뒤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술 냄새가 올라오는 게 토할 것만 같았다.
“들여보내.”
끼익-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응, 안녕. 델리, 델라. 일단 인사치레는 그만두고 어서 시작해 줘.”
엘레나의 사자 머리를 보고 놀란 그들은 이제야 분위기 파악을 했는지 가져온 짐들을 즐비하게 늘어놓았다.
덕분에 방 안은 쉴 새 없이 떠드는 그들의 목소리로 시장통이 되었고 정신이 혼미해진 엘레나는 해롱거리며 고개를 흔들거렸다.
“어머, 전하. 주무시면 안 돼요. 눈에 힘을 빡 주고 계셔야죠!”
“전하, 머리를 계속 숙이시면 안 된답니다. 목에 힘을 빡 주셔야 해요!”
도대체 어디를 얼 만큼 더 힘을 줘야 할지.
엘레나는 그들의 지시에 따라 꾸벅꾸벅 감기는 눈에 힘을 주고 까딱까딱 넘어가는 목을 단단히 고정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법의 손길 덕에 1시간여 만에 헤어 메이크업이 끝났고, 여느 때처럼 델리, 델라는 귀가 아프게 소리를 질러댔다.
“전하, 이 세상 아름다움이 아니십니다. 지옥에서 온 사탄조차 눈물을 흘리고 갈 정도입니다.”
“흐리던 먹구름도 가실 만큼 빛이 나는 미모입니다, 전하. 이건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군요!”
그들은 물개 박수를 쳐가며 연신 감탄 세례를 쏟아냈다.
엘레나는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가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델리, 델라 실력이 점점 더 느는 것 같은데?”
“어머, 과찬이십니다.”
“이게 모두 전하께서 원래 아름다우신 덕이랍니다.”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새하얀 드레스엔 수백 개의 미세한 다이아몬드가 박혀 움직일 때마다 빛을 발했다. 사르륵 흘러내리는 레이스 겉감은 드레스에 한층 더 우아한 분위기를 더했다.
또 네크라인이 앞뒤로 훅 파였지만 전혀 야하지 않았다.
누드 톤의 레이스를 덧대어 오히려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인어 꼬리처럼 쭉 퍼진 디자인은 걸을 때마다 살랑거려 여리여리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워낙 얼굴이 하얘서인지 포인트만 준 메이크업은 원래 그녀의 얼굴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연분홍색 색조로 살짝 홍조를 준 볼은 사르르 흘러내린 분홍빛 잔머리와 잘 어우러졌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헤어는 머리카락을 살짝 땋아 로우번으로 묶어 단정하면서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느낌을 연출했다.
“좋아, 이제 식장으로 가보실까?”
* * *
화창한 날씨에 맞게 하양, 연노랑, 연분홍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웨딩아치 앞으로 알맞게 쭉 뻗은 새하얀 버진로드.
그리고 그 주위로 놓인 빈티지 램프와 아기자기한 꽃바구니들.
또 정갈하게 정리된 우드 톤의 하객석.
어느새 북적거리는 야외 식장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사들이 모여있었다.
각 공국의 대공들은 물론 각 나라의 황족들, 귀족, 관리들이 서로 인사를 하며 의례적인 덕담을 나누었다.
“세상에나.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
“황태녀의 결혼식이니까요. 한 번이라도 더 눈에 띄기 위해 온 거죠.”
하긴 이런 자리는 흔치 않기에 권력에 욕심 있는 자들은 중요한 약속을 파투 내서라도 참석할 테다.
발을 넓히고 자신의 입지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지만 황태녀의 결혼식은 만인의 결혼식과 다름없으니까.
“에휴….”
그렇게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무렵,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레나!”
“미엘?”
“너무 아름다우신 거 아니에요? 저 지금 엘레나한테 반한 것만 같아요.”
미엘르는 한 손으로 우아하게 입을 가려가며 칭찬을 퍼부었다.
연예인 팬 사인회라도 나온 듯 눈을 반짝이는 탓에 조금은 부담스럽긴 했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미엘도 참. 농담은.”
“농담이 아닌걸요? 진짜 반할 것 같아요. 한발만 더 빨랐으면 제가 확….”
“미엘르. 그런 농담은 내 쪽에서 사양이야.”
평소와는 달리 새하얀 결혼 예복을 입고 나타난 데카루스는 꼭 결혼식 화보라도 찍는 모델처럼 근사했다.
새하얀 셔츠에 검은색 나비 넥타이를 한 모습이 꽤 귀엽기도 하고 말이다.
“어머, 카루스 아니야. 황태녀 전하 잘 모셔. 안 그럼 내가 확 뺏어갈 테니까.”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물어뜯을 듯이 싸우는 그들 사이에서 엘레나는 그저 억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듯 다니엘이 빛을 뿜으며 다가왔다.
“황자 전하.”
“어머, 동생. 찾고 있었는데 어디 갔었던 거야?”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무척이나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다니엘이 예를 차리며 고개를 숙이자 데카루스는 당장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눈을 흘겼다.
아니야, 카루스.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엘레나는 여전히 의례용 미소를 지으며 데카루스의 손을 꼭 잡았다.
“스큘러스 공은 오랜만입니다.”
“간만입니다. 황자 전하.”
“스큘러스 공이 이런 모습이라니. 정말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님.”
“그렇지? 사랑꾼이 다 되었어.”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긴 미엘르와 다니엘은 온갖 칭찬만 늘어놓더니 그대로 하객석으로 사라졌다.
“카루스, 표정 좀 풀어. 하객들 다 도망가겠어.”
“…….”
“어휴.”
여전히 말이라곤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그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전하,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벌써?”
어느새 식장에 모두 모인 하객들은 제자리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입장 소식에 심장이 두근거려 먹지도 않은 아침이 얹힐 것만 같았다.
“긴장하지 마.”
“응.”
엘레나는 길게 심호흡을 한 뒤 목을 빳빳이 세웠다.
그리고 데카루스의 에스코트에 따라 버진로드의 끝에 서 차례를 기다렸다.
황제의 축사가 끝나자 꽃으로 둘러싸인 단상에 선 대신관이 목을 큼큼 가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신부와 신랑. 입장하시겠습니다.”
“가자.”
데카루스는 새하얀 레이스 혼주 장갑을 낀 엘레나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었다.
하객들의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전문 악사들의 연주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평생토록 자신이 이 길을 걸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저 삶을 살아오기에 바빴던 시절, 결혼은커녕 연애도 사치라고 생각했었는데.
“카루스, 나 지금 행복한 거 맞지.”
“응, 당신 행복해 보여.”
데카루스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
이토록 가슴 뛰게 사랑할 줄 알았을까.
그의 생이 나의 생이고, 나의 생이 그의 생일 만큼 정신없이 빠져버릴 줄 알았을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아.”
“걱정 마. 꿈이든 현실이든 모든 순간 내가 당신 옆에 있을 테니까.”
엘레나는 벅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순간.
이 순간만큼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있을까.
“신부와 신랑은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주시길 바랍니다.”
대신관의 긴긴 주례사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곳엔 그와 그녀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은 끝까지 서로를 향했다.
평생 잡은 손을 놓치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신부 엘레나 폰 에스티나는 신랑을 평생토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네, 맹세합니다.”
“신랑 데카루스 드 스큘러스는 신부를 평생토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사랑의 의미로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하십시오.”
데카루스는 새하얀 면사포를 걷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아빠가 보는 자리에서 키스를 해야 한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일생의 단 한 번뿐인 순간이니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엘레나는 발그레 볼을 붉히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진득하게 달라붙은 입술이 조심스레 그녀를 짓눌렀다.
사람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를 들으며 엘레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붉은 루비를 담은 그의 눈동자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예쁜 입술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목소리가 귓가를 사근거렸다.
“사랑해, 나의 신부. 엘레나.”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