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햇볕이 쨍쨍한 오후.
그리스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기둥과 장식용 꽃들이 여기저기 운반되고 있다.
푸른 잔디 위에 놓인 웨딩 아치와 버진로드엔 디자이너들이 달라붙어 장식을 하고, 시종들은 손님석에 필요한 의자와 테이블을 날랐다.
“자, 기둥은 여기에 놔 주시고요.”
엘레나는 더운지 들고 있던 종이로 연신 부채질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카루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뭐가 또 불만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내 결혼식인데 당연히 이렇게 해야지. 당신도 가만히만 있지 말고 힘 좀 써.”
그녀의 성화에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쉬곤 짐 마차로 향했다.
하긴 대공이 꽃을 나르는 꼴을 보면 웃기긴 할 테다.
엘레나는 남몰래 웃음을 삼키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직접 준비하는 게 더 의미 있잖아?”
데카루스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지도 어언 이 주일.
그동안 혼자 웨딩 준비를 하느라 몇 날 며칠 밤을 새웠다.
웨딩아치와 버진로드의 디자인, 손님석 케이터링, 플라워 장식까지 전부 손수 다 구상했다.
누가 보면 진짜 웨딩 디렉터라도 된 줄 알테다.
제인도 그렇고 데카루스도 그렇고 그냥 전문가가 해주는 대로 맡기라고 했지만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평생에 한 번뿐인 결혼식, 직접 구상하고 디자인해서 완벽한 결혼식을 만들고 싶었다.
“소중한 내 결혼식이니까.”
드레스 또한 예전 결혼식 때 준비했던 직접 디자인한 머메이드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데카루스는 그냥 새로 맞추라고 했지만 추억이 깃든 드레스를 입고 버진로드를 걷고 싶었다.
“전하, 이 바구니는 어떻게….”
“아, 작은 꽃바구니들은 랜턴 뒤에 배치해 주세요. 그리고 랜턴 간격은 넓게 해주시고요.”
“예, 전하.”
시종들도 이런 분위기는 생소한지 의아한 얼굴들이었다.
하긴 황족이 모든 일을 제치고 직접 결혼식을 준비하는 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겠지.
“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결혼식장은 처음 봤어요.”
“이게 다 내 노고의 흔적이 아니겠어.”
언제 왔는지 제인이 옆에 가까이 섰다.
엘레나는 머리카락을 한껏 날리며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대공님께서 꽃을 나르고 계시네요? 어쩌다가 저렇게….”
“내가 가서 힘 좀 쓰라고 했거든.”
“아….”
제인은 의아한 얼굴로 꽃을 든 데카루스를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그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마치 심통 난 불독처럼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내일이 벌써 결혼식이라니. 전하, 저는 이 모든 게 꿈만 같아요.”
“나도, 제인. 믿기지가 않아.”
처음엔 강제로 했던 결혼식을 이제 그와 자발적으로 하다니.
참 웃기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대공님을 많이 사랑하시는 거죠?”
“응,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혹시라도, 후회하세요?”
“아니, 후회는커녕 행복해. 내 인생에서 가장.”
엘레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꼬리를 예쁘게 접었다.
그러자 제인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천천히 매만졌다.
“그 조그맣던 전하께서 언제 이렇게 크셨을까.”
“제인….”
엘레나는 그녀의 품에 와락 안겨 얼굴을 비볐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깃털처럼 부드러웠다.
“어떡하죠. 지금도 눈물이 나는데 내일 주책맞게 엉엉 울기라도 하면….”
“왜 울어, 제인. 좋은 날인데.”
“그러면서 전하는 지금 왜 우는 거예요.”
그들은 서로를 붙잡고 울며 웃었다.
눈물이 마구 흘렀지만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만 우세요. 이따가 전야제 때 눈이 퉁퉁 부어있으면 안 되잖아요.”
“응, 알았어. 제인, 너도 그만 울어.”
“알았어요.”
에스텔에는 결혼식 전야제라는 전통이 있다.
결혼식 전날 밤에 여는 파티라고 할 수 있겠다.
평소 절친한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모아 식사를 하며 미리 결혼을 축하한다.
요새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지만 꼭 해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대공저의 식구들과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
결혼식을 황궁에서 치르기도 하고 고위 귀족과 관리들만 식에 참여할 수 있기에 대공저 사람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동안 많은 추억이 있었던 대공저에서 그들과 전야제를 할 생각이다.
“너무 기대돼!”
“저도요. 대공저에서 파티는 또 처음이란 말이죠?”
그들은 두 손을 꼭 맞붙잡고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오죽하면 짐을 나르던 시종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였다.
“자, 그럼 마무리하고 대공저로 가볼까?”
“좋아요!”
* * *
대공저.
밤하늘을 물들인 찬란한 별빛처럼 샛노란 등불이 정원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테이블마다 올려진 초와 꽃장식 그리고 정원에 울려 퍼지는 악사들의 감미로운 음악 소리와 함께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웨이터들은 핑거푸드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주위를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며 이야기를 하고 춤을 추기도 했다.
대공저의 모든 사람들이 참석한 파티였기에 정원이 조금 비좁은 감이 있었지만 즐거우니 이로 만족했다.
“뭐야, 이삭. 난 네가 이렇게 차려입은 거 처음 봐.”
“왜 웃어. 왜 웃냐고! 그렇게 웃겨?”
“응.”
엘레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손가락질하며 대차게 웃었다.
이 세상에 그를 놀리는 것만큼 재밌는 건 없었다.
“정말 환장의 커플입니다. 두 분은.”
“만델 경!”
“결혼 축하드립니다, 전하.”
“고마워.”
역시 대공저가 제일 편하다.
황궁에선 느낄 수 없는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아늑하다.
“전하, 결혼 축하드려요!”
“어, 어? 고마워….”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다가온 시녀들은 무언가를 잔뜩 건네주곤 날쌘 다람쥐처럼 도망갔다.
얼떨결에 한 아름 선물을 받아버린 엘레나는 멍하니 포장지에 싸인 물건을 바라보았다.
“와, 전하는 복도 많아. 시녀들이 선물도 주고. 부럽다, 부러워.”
“이게 뭐지?”
엘레나는 조심스레 포장지를 뜯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왜 시녀들이 주고 튀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속…옷…?”
그것은 바로 입으나 마나 제 기능을 못 하는 새빨간 야한 속옷이었다.
간신히 가릴 부분만 가릴 수 있는, 정말 천 쪼가리로 만든 엄청난 속옷.
“아악!”
엘레나는 기겁을 하며 포장지 속으로 속옷을 욱여넣었다.
그러자 이삭은 배를 잡고 웃어대며 눈물을 삼켰고 만델 경은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자리를 떴다.
“시녀들이 신경 좀 썼네. 안 그래?”
“이삭, 조용히 해라….”
이를 꽉 물고 죽일 듯이 노려보자 이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허겁지겁 도망갔다.
“휴….”
그렇게 한숨 돌리며 스탠딩 테이블에 놓인 브루스케타를 야금야금 뜯어먹고 있을 무렵, 눈앞에 웬 꽃이 불쑥 나타났다.
“누나, 결혼 축하해.”
“어, 어? 꼬맹이. 너도 있었어?”
“당연하지. 나도 대공저 사람이잖아.”
엘레나는 감사 인사를 표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레이는 조금 늠름해진 것 같았다.
뭐, 여전히 귀여운 꼬맹이지만.
“우리 꼬맹이, 이 누나가 좀 안아 보자.”
“뭐야, 오글거리게.”
괜히 좋으면서 튕기긴.
레이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
잠시 후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누나, 대공저에 많이 놀러 와야 해.”
이 작은 꼬맹이가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마음이 울컥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린 레이.
“알았어, 많이 놀러 올게. 선물도 잔뜩 사 가지고 올게.”
“정말?”
“그럼.”
엘레나는 레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작은 몸을 부서져라 안았다.
하지만 그 순간 꼬맹이의 몸이 붕 떴다.
“어, 어? 대공님?”
콧물을 훌쩍이던 레이는 그를 보더니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여전히 그의 골수 팬인 듯 그의 목덜미를 확 껴안았다.
“임자 있는 사람을 막 안으면 안 되지, 레이.”
이 인간 얼굴을 보니 질투하는 거다.
그것도 자기보다 열 살은 더 어린 꼬맹이에게.
엘레나는 고개를 비딱하게 틀며 미간을 구겼다.
“자자, 그만하고 춤이나 추러 가시죠. 스큘러스 공?”
“그러죠. 황태녀 전하.”
그는 레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더니 그녀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흔쾌히 내민 손을 잡은 엘레나는 그를 정원 중앙으로 끌고 갔다.
“춤 실력 아직도 여전한지 볼까?”
“어디 갈 리가 없잖아.”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곤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반짝이는 별과 달이 축복해주는 고요한 밤에 이토록 아름다운 그와 춤을 추다니.
이보다 황홀한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카루스.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아.”
“벌써 행복하면 안 되지.”
“…….”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해줄 거야, 당신.”
차가운 밤바람이 분홍빛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벚꽃잎 같은 머리카락은 어두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여기서 더 행복하면 나 죽을지도 몰라.”
“그건 안 되는데.”
그는 이마에 짧게 키스하곤 코끝을 살며시 비볐다.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는 눈동자 속엔 행복에 가득 찬 엘레나가 보였다.
“사랑해, 카루스.”
“나도. 사랑해, 엘레나.”
데카루스는 천천히 고개를 틀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기쁜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려 할 무렵.
“어???”
“왜 또.”
“저기, 저기 봐.”
데카루스는 마냥 아쉬웠는지 한숨을 푹 내쉬고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정중히 춤 신청을 하고 있는 이삭과 볼을 붉히며 손을 건네는 제인이 보였다.
“어머, 어머. 어머!”
엘레나는 아침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격하게 데카루스의 어깨를 때렸다.
이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광경이 아닌가.
그 철벽같던 제인이 남자와 춤추는 걸 보다니!
“카루스, 어떡해. 어떡하냐고!”
그는 포기한 듯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환희에 찬 엘레나는 감격한 듯 연신 ‘어떡해’를 외쳐댔다.
“둘은 둘이 알아서 할 테고. 나한테 집중 좀 하지 그래.”
“아, 알았어. 잠깐만.”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다른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어쩔 수 없나.”
그는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부드럽게 입술을 삼켜버렸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당황한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카루스….”
“나한테만 집중해.”
엘레나는 질투하는 그가 귀여운 듯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귀엽긴.”
그렇게 결혼식 전야제는 달콤하게 막을 내렸다.
선선한 바람, 무르익은 분위기,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 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한 이 전야제는 평생토록 잊지 못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