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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15화 (115/117)

115화.

“카루스….”

“결혼해 줘, 엘레나.”

머리칼을 살랑살랑 스치던 바람도, 잔잔히 퍼지던 호숫물의 향기도, 노를 젓던 사공의 노랫소리도.

그의 말과 함께 모든 것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했기에, 아니 단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었기에 머릿속이 새하얘져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나는….”

보통 드라마에서 보면 눈물을 흘리거나 기뻐서 껴안거나 키스를 하던데.

그럴 정신도 없었다.

너무 놀라서.

데카루스는 금붕어처럼 입만 뻐금거리는 그녀를 보며 잘게 미소 지었다.

“당신, 나 사랑해?”

엘레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그는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에 앉았다.

당황한 엘레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허공에 팔을 휘저으며 목소리를 떨었다.

“나, 나는 아직 대답을 못 했는데….”

“상관없어.”

얼떨결에 그의 품에 폭 안긴 엘레나는 멀뚱히 눈만 껌뻑였다.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뇌가 정지해 생각하는 걸 까먹은 것만 같았다.

연신 입술만 달싹이던 엘레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난….”

데카루스는 새카만 눈썹을 지그시 올리며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리저리 눈알만 굴리는 걸 보니 오늘 안에 대답을 듣기엔 글러 보였다.

그는 살짝 눈웃음치더니 그녀를 향해 긴 팔을 뻗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안기기는커녕 잠시 그를 멈춰 세웠다.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이는 모습이 조금 이상했다.

“왜….”

찰나였다.

그에게 그녀의 입술이 닿은 건.

사실 이렇게까진 안 하려 했지만 어떻게든 대답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덕분에 분위기를 망친 건가 싶어 눈을 살짝 떠 보니 그가 맛이 간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흠칫 놀란 엘레나가 천천히 얼굴을 떼자 그는 빠르게 달려들어 다시 입술을 맞추었다.

양 뺨에 닿은 큰 손은 불타오를 만큼 뜨거웠다.

또 노을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게 대답이라면 난 더 좋은데.”

그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앙증맞은 입술을 삼켜버렸다.

두 입술을 천천히 음미하던 데카루스는 이를 세워 아랫입술을 차근히 깨물었다.

아찔한 감각에 목구멍에선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부드럽게 귀를 어루만지며 뜨거운 호흡을 내뱉었다.

덕분에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 닭살이 돋을 것만 같았다.

“카루스….”

입 안을 거칠게 파고든 혀는 금세 그녀를 점령했다.

가지런한 이와 혀, 입천장은 어느새 그의 타액으로 물들었고 엘레나는 달콤한 입맞춤에 점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순간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 그들이 어디서 키스를 하고 있는 건가.

바로 사방이 뻥 뚫린 배 위에서, 그것도 사공이 앞에 있는 배 위에서.

“아악!”

엘레나는 화들짝 놀라며 순간 그를 밀쳐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다.

이곳은 호수의 중앙이고 빠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 그를 밀쳤지만 결국 밀쳐지는 건 그녀라는 것을.

“카루스!”

엘레나는 지나가던 새도 놀라 떨어질 만큼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은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반동으로 인해 그녀가 뒤로 넘어질 위기에 닥친 것이다.

엘레나는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넣어 숨을 꽉 참았다.

안녕, 이 세상아.

이렇게 하찮게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으로 갈 줄이야.

짧고도 긴 인생이었다.

그렇게 세상과의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한 순간, 머리에 혹이 날 만큼 둔탁한 무언가와 부딪쳤다.

쾅-

“뭐 해.”

“응?”

당황한 엘레나는 눈을 떠 주위를 살펴보았다.

분명 호수에 빠질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이 누워있는 곳은 여전히 배 위였다.

“왜 내가 여기에….”

엘레나의 예상은 틀렸다.

배는 생각 이상으로 넓었고 여기서 술 마시고 춤을 추지만 않는다면 떨어질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지금까지 헛짓을 한 것이다.

“뭐 하냐고.”

고개를 들자마자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민망함에 온몸이 확 달아오른 엘레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 머리를 빗었다.

“하하…. 뭐가?”

그녀의 뻔뻔함에 데카루스는 할 말을 잃었다.

대체 그녀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 바람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그만. 미안!”

엘레나는 피에로처럼 입꼬리를 올리며 활짝 웃었다.

사실은 아주 쥐구멍에 숨어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사공을 불러 뱃머리를 돌렸다.

“왜, 왜. 더 즐기지 않고.”

“더 즐길 상황이야, 지금?”

“왜, 난 너무 좋은데? 바람도 상쾌하고 햇볕도 좋고 금산철벽 아니야.”

“금상첨화겠지.”

“앗, 나의 실수!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당신도 알지? 나 원래 이런 실수 잘 안 하는 거.”

“응. 그리고 아무리 봐도 지금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겠네.”

“뭐!”

엘레나는 주먹을 들어 그를 마구 때렸지만 소용없었다.

주먹을 날리는 족족 데카루스가 다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죽어! 죽어!”

그녀의 객기에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빨리 궁에 데려다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근데…. 저게 뭐야?”

엘레나는 주먹질을 멈추고 거북이처럼 목을 주욱 내밀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정말 저 멀리서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황제 폐하.”

“아빠?”

둘은 동시에 외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갑자기 아빠가 여기서 왜 나와?”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어느새 나루터 가까워진 곤돌라는 천천히 정박했다.

데카루스는 가볍게 뛰어내린 뒤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고마워.”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를 즐길 시간이 없었다.

아빠가 왜 갑자기 여기서 나오는 거냐고.

설마 오늘 예비 국서 연애 시뮬레이션에 뭔가 착오라도 생긴 건가?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황제를 보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나오신 거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고개를 들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황제는 둘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어인 일로 이곳까지….”

“궁에 네가 없길래 여기까지 찾아왔단다. 그런데 스큘러스 공과 함께 있을 줄이야. 예비 국서들은 모두 만난 것이냐.”

역시 국서 문제로 여기까지 찾아오신 거였어.

그런데 어쩌죠.

모두 만나긴 했지만 다 배드 엔딩으로 클리어해 버렸는데요.

엘레나는 눈치를 살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제는 껄껄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구나.”

역시 부모는 부모인가.

대놓고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

“죄송해요. 전 그냥….”

“아니, 됐다. 변명할 필요 없어. 덕분에 네 마음도 확실히 정한 것 같구나.”

“…네?”

엘레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살짝 벌렸다.

“네가 영 스큘러스 공에 대한 확신이 없어 보였거든.”

“그럼 설마, 일부러….”

엘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러니까 데카루스랑 결혼할지 말지 고민하는 걸 보고 일부러 예비 국서 명단을 만들었다는 건가?

황제는 어느 작은 마을의 산타처럼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 아비의 못된 장난을 이해해 줄 수 있겠느냐.”

엘레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 못 한다고 툴툴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어디까지 보셨어요….”

엘레나는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을 붉혔다.

설마 키스하는 장면부터 본 건 아니겠지.

그것부터 보셨다면 아까 차라리 물에 빠지는 게 더 나았어.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단다, 엘레나.”

“그럼 다행이네요….”

아니, 이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셨겠지.

완전 새빨간 거짓말이다.

엘레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자 황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사랑하느냐.”

“…네.”

“스큘러스 공.”

“예, 폐하.”

“엘레나를 사랑하는가.”

“물론입니다.”

그러자 황제는 벅차오른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입을 뗐다.

“선대 스큘러스 공과 부인께서도 이 자리에 있으면 좋으련만.”

“…….”

“엘레나를 잘 부탁하네, 스큘러스 공.”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그래, 그럼 마저 좋은 시간들 보내게. 이 늙은이는 알아서 빠져줄 테니 말야.”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시종들은 바닷길이 열리는 것처럼 차례로 비켜섰다.

“가지.”

“예, 폐하.”

그렇게 황제는 뱀을 부리는 요술사처럼 천천히 사라져 갔다.

“당신도 알고 있었어?”

“뭘.”

“미연시, 가 아니라 아빠가 일부러 예비 국서를 뽑았다는 거.”

“그럴 리가.”

엘레나는 의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그의 얼굴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하긴 알고 있었다면 아까 그렇게 화를 내진 않았겠지.

“가자, 벌써 해가 졌어.”

“그래.”

그는 일어선 그녀를 붙잡고 흙으로 더러워진 드레스를 손으로 털어주었다.

“어차피 갈아입으면 되는데….”

“응.”

하여간 놀부 같은 똥고집은 어쩔 수 없다니까.

결혼하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말은 더럽게 안 들을 것 같은데.

“됐네.”

그가 갑작스레 고개를 들자 깜짝 놀란 엘레나는 얼굴을 붉혔다.

데카루스는 그런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생각 해.”

“아, 아니. 그냥. 뭐, 별거 아니야.”

그는 실눈을 뜨곤 자리에서 멈춰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뭐, 왜, 뭐.”

“무슨 상상을 했길래 갑자기 얼굴이 붉어져.”

“아, 아니. 그냥….”

“그냥?”

말을 흐릴수록 얼굴을 들이미는 데카루스 탓에 결국 눈을 꼭 감고 크게 외쳐버렸다.

“고집은 세서 결혼하면 어떻게 살지, 하고 생각했다. 왜!”

그러자 그는 새초롬하게 눈을 뜨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왜, 왜 그래.”

“벌써 결혼 생각이야?”

“그건 아니고….”

“그럼 뭔데.”

당황한 엘레나가 입술만 깨물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악! 뭐 하는 거야!”

“당신이 입을 안 여니 어쩔 수 없지. 침대에선 열지 않을까 싶어서.”

“뭐? 카루스!”

“원래 신혼은 뜨거워야 하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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