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대체 뭐 하느라 궁까지 간 거야!”
엘레나는 서둘러 크리스탈 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스피넬 궁에서 가까운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달리자 멀찍이 있던 크리스탈 궁이 눈앞에 드러났다.
“빨리, 빨리!”
엘레나는 재빨리 궁 안으로 들어가 시녀 한 명을 붙잡았다.
“스큘러스 공은?”
“바, 방금 전까지 계셨는데….”
“아오!”
‘데카루스의 여행기’라도 찍는 거야?
역마살 낀 것도 아니고 왜 이렇게 돌아다녀!
“대체 어딨는 거야….”
그렇게 엘레나는 곳곳에 있는 시종들에게 그의 행방을 캐물었다.
스무고개라도 하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때,
“카루스!”
호숫가 옆에서 그를 찾았다.
“카루스!”
그는 제 이름이 들리자 살짝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표정에 조금 안심이 되긴 했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엘레나.”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팔짝팔짝 뛰어다닌 탓에 호흡이 거칠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데카루스는 그런 그녀를 천천히 품에 안았다.
“카루스?”
아까 눈에 불이 나고 있다길래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포옹이라니.
엘레나는 의심쩍은 얼굴을 감추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재밌었어?”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살짝 미소 지은 얼굴에선 시릴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뛰느라 땀 난 몸이 갑자기 식어버릴 정도로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 이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제인에게 들었어. 폐하께서 명단을 주셨다고.”
평소에 잘 웃지 않던 사람이 웃으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서리가 가득 낀 것처럼 시린 눈빛에 지나가는 강아지도 꼬랑지를 내릴 것만 같았다.
“그, 그래. 폐하께서 명단을 주셔서 난 어쩔 수 없이 나갔다 온 거야.”
“아, 그래?”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좋겠다.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차분한 그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기분 안 나빠…?”
그녀의 질문에 데카루스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분?”
“응. 아까 다니엘 황자가 당신 눈에서 불이 막 나온다고….”
“아, 이름을 부를 만큼 친해진 건가?”
데카루스는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질투를 안 하긴 개뿔!
겉으론 티 내지 않으면서 속으로 온갖 질투를 다 하는 거였다.
“아, 아니. 다니엘 카프로나 황자 말야! 친해진 건 아니고! 그냥 서로 좋은 감정이….”
“좋은 감정?”
그게 아니잖아, 멍청한 엘레나!
이렇게 어휘력이 딸려서 대학 졸업은 어떻게 한 거야!
“그게 아니라. 서로, 서로….”
덕분에 말더듬이가 된 것 같았다.
그는 당황해 팔을 이리저리 휘젓는 엘레나를 보며 조소를 흘렸다.
“어, 언제부터 봤어.”
“막시우스 대공이 왔을 때부터.”
막시우스 대공이라면 그 오드아이 또라이를 말하는 거지.
첫 번째 미소년.
아예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는 소리네.
그것도 말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
“응.”
데카루스는 손을 올려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레 쓸어내리는 손길이 솜처럼 포근했다.
“그런데 당신에게서 다른 남자 냄새가 나.”
“이, 이건.”
당황해 말을 더듬자 그는 이마에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었다.
“카루스, 여긴 시종들이….”
“벌이야, 엘레나.”
그는 눈, 코, 입 그리고 뺨에 차례로 키스했다.
말캉한 입술이 살갗에 닿자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다른 남자 냄새를 묻혀온 벌.”
이윽고 그는 무릎을 꿇고 새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도 닿았겠지.”
“카루스…!”
축축한 혀는 보일 듯 말 듯 그녀의 손등을 핥았다.
멀리서 보면 굉장히 로맨틱한 상황일 테지만 지금 엄청나게 위험하다.
여기서 대체 무슨 짓까지 할지 모르기에.
“그만해. 여기 사람 많다고…!”
“그럼 다른 남자 걸 묻혀오지 말지 그랬어.”
데카루스는 거칠게 반항하는 손을 쥐어 잡고 살갗을 깨물었다.
“아님 그 남자들을 대신 벌할까?”
엘레나는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소리를 참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자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타액으로 축축해진 손등은 꽃잎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리 와.”
그는 축축한 손을 잡고 호숫가로 이끌었다.
일순간 이 남자가 호수에 몸을 집어 던지려나, 하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데카루스는 그녀의 몸을 조심히 들어 커다란 곤돌라 위에 세웠다.
“뭐, 뭐 하려고….”
그리고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꼭 붙잡고 배 위에 섰다.
“앉아.”
갑자기 이걸 타고 뭘 하려는 건지.
의심쩍은 얼굴로 주위를 살피자 그는 피식, 하며 웃었다.
“그냥 배 타는 거야.”
“그러니까 왜 갑자기….”
“글쎄. 당신과의 추억 되새기기랄까.”
추억이라면 저번에 대공저에서 했던 뱃놀이를 말하는 걸까.
엘레나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천천히 껌뻑였다.
“가지.”
“예.”
그의 신호와 함께 사공은 천천히 노를 저었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자 붉게 타오르는 노을은 어느새 온 세상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 내음을 풍기며 잔잔한 호수에 물결을 불러일으켰고, 바람결을 타고 온 꽃잎은 천천히 떨어져 살갗을 간질였다.
촉촉한 그의 눈빛과 나풀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은 꼭 화보처럼 풍경에 딱 들어맞았다.
“예쁘다.”
“응, 예쁘네.”
그는 풍경 대신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민망함에 눈알을 굴리던 엘레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당신이 먼저 결혼하자고 말한 곳이 여기야.”
“…뭐?”
일곱 살 이전 어린 엘레나는 데카루스에게 먼저 청혼했다고 했지.
그런데 하필이면 그 민망한 장소가 여기였다니.
엘레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손을 오물딱조물딱 매만졌다.
“아직도 유효해?”
“무슨….”
“결혼하자는 말. 아직도 유효하냐고.”
순간 불을 지핀 것처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말은 지금 현재의 자신이 아닌 과거의 엘레나가 한 말이었다.
즉, 다른 사람이 한 말이기에 따지자면 유효하지 않았다.
“그, 그건….”
이제 와서 구구절절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야.’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렇다고 그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기도 이상하고.
머릿속에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
“나, 나중에. 알려줄게.”
그는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나중에 언제.”
“어…. 그러니까….”
“난 지금 듣고 싶은데.”
자기 혼자서만 태평한 모습이 아주 괘씸했다.
사람 속이 타는 줄은 모르고.
아니, 알면서 괜히 저러는 것일 테다.
“결혼이 싫어?”
“어? 어? 그건….”
사실 아빠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는 게 맞긴 했다.
결혼은 꼭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마음껏 자유롭고 싶은데 결혼을 하면 그 자유가 사라질 테니까.
“싫어도 괜찮아.”
어쩐 일로 괜찮다고 하는 건지.
엘레나는 멀뚱히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놔주지 않을 거거든.”
역시 괜찮을 리가 없었다.
안 놔줄 거면서 왜 사람을 기대하게 만드는 거야.
엘레나는 입술을 쭉 내밀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바라왔어.”
그는 나른한 눈빛으로 물결치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 이후로 난 무조건 당신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지.”
“…….”
“내 신부니까.”
길게 늘어뜨린 입꼬리는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거든. 한번 약속한 결혼은 절대 깰 수 없다고. 영원토록 신부를 사랑해야 한다고.”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향이었다.
그가 미친 듯이 결혼에 집착한 것도 다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어.
“또 난 내 신부가 도망가는 꼴은 못 보겠거든.”
싸늘한 미소를 흘리는 그는 꼭 뱀파이어 백작 같았다.
순간 그 유혹적인 미소에 홀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내가 아닌 당신이 먼저 선택한 이 결혼을.”
“…….”
“난 놓칠 수가 없어.”
“카루스….”
그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를 꼭 껴안았다.
머리에 맞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무리 도망쳐도 난 끝까지 당신을 잡을 거야.”
“…….”
“그곳이 진탕이든 가시밭길이든.”
“…….”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엘레나.”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피부를 간질였다.
엘레나는 눈을 꼭 감고 온전히 그를 느꼈다.
“우린 이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홍옥처럼 붉은 눈은 서큐버스처럼 매혹적이었다.
“당신을 사랑해.”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실했다.
한층 짙어진 음성이 살며시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 몸이 찢기고 부서진다고 할지라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
“그만큼 이미 물들어버렸거든. 당신에게.”
그는 껌뻑거리는 눈꺼풀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나도 당신이랑 있으면 가슴이 너무 빨리 뛰고, 머릿속은 자꾸 당신을 원해.”
“…….”
“당신이 아프면 나도 죽을 것같이 아프고 당신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미친 듯이 불안해.”
“…….”
“멀리 있으면 당신이 떠올라, 같이 있어도 함께 있고 싶어. 당신과 있는 시간들이 전부 즐거워.”
“카루스….”
엘레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좀 이상한 것 같아.’
‘당신이랑 있으면 가슴이 너무 빨리 뛰고, 머릿속은 자꾸 당신을 원해. 당신이 아프면 나도 죽을 것같이 아프고 당신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미친 듯이 불안해. 멀리 있으면 당신이 떠올라. 같이 있어도 함께 있고 싶어. 당신과 있는 시간들이 전부 즐거워.’
‘내가 당신을 좋아해.’
이건 분명 저번에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을 때 했던 대사들이다.
그걸 어떻게 하나도 까먹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는지.
“그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해, 엘레나.”
그는 무릎을 꿇고 허벅지 위에 다소곳이 올려진 가느다란 손을 잡았다.
“평생 당신을 놓치지 않을 거야.”
일순간 손가락에 차갑고 딱딱한 무언가가 닿았다.
그의 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번엔 내가 당신에게 말할게.”
“카루스….”
어느새 손가락에 정갈히 끼워진 반지가 노을빛에 반짝거렸다.
꽃봉오리처럼 세공된 핑크 다이아몬드는 가느다란 백금 링 위에 예쁘게 박혀 있었다.
“결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