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황궁, 유리온실.
미엘르와 함께 차를 마신 이후로 오랜만에 가는 유리온실.
문을 열자 체격이 큰 검은 머리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데카루스인 줄 알고 흠칫 놀랐지만 웬걸 몸집이 더 큰 걸 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았다.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 밑엔 칼에 베인 것처럼 죽 그어진 흉터.
중년의 기사단장처럼 다부진 체격은 제복 대신 갑옷이 훨씬 더 잘 어울릴 정도로 늠름했다.
또 살짝 웃을 때마다 그늘지는 눈가엔 색기가 서려 꼭 퇴폐한 조선의 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서바테일 왕국의 펠린 솔다트 황태자 전하, 맞으신가요?”
“예, 맞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살짝 당황한 엘레나는 움찔하며 맞닿은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황태자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 죄송해요.”
“저희 왕국의 문화와는 많이 다른가 보군요. 제가 숙지하지 못한 탓입니다. 저를 벌하시지요.”
“예? 아닙니다. 황태자.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엘레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그를 안내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갸륵한 얼굴로 입매를 길게 늘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상을 주시겠습니까.”
“…예?”
“원하신다면 전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대체 뭐야, 이 남자.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눈깔을 보니까 아예 맛이 간 것 같은데.
“아, 아, 아니. 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어서 자리에….”
“전하께 반했습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라 도저히 전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거 진짜 미소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인가?
지금 현실 세계에 있는 거 맞아?
막시우스 대공보다 백배는 더 심하잖아!
“이, 일단 앉아서 천천히 대화를 나누시죠, 황태자 전하.”
그는 꼭 귀가 접힌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 보였다.
예상과는 달리 이 남자의 클리어 난이도는 지옥 수준 정도 되어 보였다.
“자, 일단 멀리서부터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많이 덥진 않으신지요.”
“날씨 때문에 덥다기보단 전하를 뵈어 덥습니다.”
그의 표정은 한 치의 거짓조차 없이 진지했다.
덕분에 그에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빙빙 돌았다.
“아, 예…. 그럼 옷을 좀 벗으시는 게….”
“저는 꽤 보수적인 편입니다, 전하.”
“예???”
화들짝 놀란 엘레나는 들고 있던 티스푼을 떨어뜨렸다.
여기서 보수적이라는 단어가 왜 나와.
대체 옷을 벗으라는 소릴 뭐라고 알아들은 거야?
“저, 저는 그런 얘기가….”
그러자 황태자는 입매로 호선을 그리며 씨익 웃었다.
“당황한 모습도 꽤나 귀여우십니다.”
이 남자 일부러 그러는 거다.
뒤통수가 데카루스랑 닮았다 싶더니 하는 행동도 똑같아.
그가 요망한 고양이라면 이 남자는 요망한 강아지 정도가 되겠다.
“서, 서바테일 왕국의 정세는 요즘 좀 어떻습니까? 동바테일과의 관계는요?”
막시우스 대공처럼 어서 빨리 제풀에 나가떨어지게 만들어야겠어.
아무래도 이 인간이랑 대화하다간 오늘 안에 클리어하지 못할 것 같아.
“나쁘지 않습니다. 마치 전하와 저처럼.”
“그렇다면 요새 여름 태풍 대비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시라던데. 서바테일에서는 민간 피해를 줄이기 위한 대비책을 어떻게 마련하셨는지요.”
“아, 잊고 있었습니다. 전하를 생각하느라.”
엘레나는 기계적인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한테 이 방법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절대 뚫리지 않는 무적의 철벽 스킬로 가자.
“아, 그렇군요. 제 생각을 하셨습니까.”
“예,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 뵌 적은 없으니까요. 전하가 궁금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궁금하셨습니까.”
“예, 전하께선 제가 궁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셨을 거라 기대했는데.”
“아, 그렇군요. 기대하셨습니까.”
로봇처럼 반복되는 대답에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무미건조한 그녀의 표정은 효과를 200% 증가시켰다!
“제게 할 말이 없으십니까.”
“예,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얼굴이 뭐라도 씹은 사람처럼 안 좋은 걸 보니 이번에도 완벽하게 클리어한 것 같다.
엘레나는 마지막으로 의례용 미소를 날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할 말은 다 한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전하! 전하!”
엘레나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유리온실을 뛰쳐나왔다.
조금이라도 더 있다간 숨이 막혀 질식사라도 할 뻔했다.
문 앞에 대기하던 시녀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긴 원래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나오긴 했지.
“다음은?”
“다음 일정은 스피넬 궁의 응접실입니다.”
스피넬 궁이라면 유리온실에서 꽤 가까운 거리다.
늦기 전에 어서 빨리 마지막 놈을 해치워야지.
* * *
스피넬 궁.
스피넬 궁은 외부에서 손님이 오셨을 때 머무는 별궁이다.
이름처럼 화려한 분홍색 보석이 다닥다닥 박힌 이 궁은 마치 보석 사우나 찜질방 같았다.
손님들이 많이 드나드는 접대용 별궁이기에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고자 화려한 디자인을 택한 것이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멈출 뻔했다.
어제 제인과 너무 잘생겼다며 감탄했던 그 남자가 응접실 안에 떡하니 앉아있는 게 아닌가.
미엘르처럼 화려한 금발에 깎아 놓은 듯한 콧날과 턱.
푸른 수정을 박아 놓은 듯 반짝이는 눈동자에 차갑지만 따듯한 인상을 가진 미남자.
꼭 어화둥둥 곱디곱게 성에서만 자랐을 것 같은 왕자님 중 왕자님.
“다니엘 카프로나 황자?”
그가 고개를 돌리자 순간 눈이 멀 뻔했다.
등 뒤에서 비치는 후광은 태양 빛보다 강렬했다!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황자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실 황족 대 황족은 무릎을 꿇을 필요까진 없는데 왜 자꾸 하나같이 무릎을 꿇는 건지.
엘레나는 접대용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일어나요, 황자. 자리에 앉지요.”
그러자 황자는 그 가까운 거리를 에스코트하며 그녀를 먼저 소파에 앉혔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지금까지 본 미소년과 달리 그는 아주 차분하고 제정신인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왕자님다운 왕자님을 보는구나!
엘레나는 시녀가 따라준 찻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멀리서부터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겠습니다, 황자.”
역시나 분위기를 환기하는 덴 이 말처럼 좋은 게 없지.
그의 얼굴을 흘낏 보자 분명 어디서 본 것처럼 낯이 익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아….”
그는 씨익 웃으며 무언가 눈치챈 듯 입을 열었다.
“미엘르 카프로나의 동생입니다.”
“아…!”
역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었어.
저 금발이랑 눈동자 색, 그리고 생김새가 아주 빼다 박아논 것 같구만!
“누님께서 전하의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굉장히 영민하고 아름다우신 분이라고. 또 엄청나게 귀여우시다고.”
미엘르가 가서 얼마나 주접을 떨었는지 알겠다.
저 고고한 황자의 입에서 귀엽다는 소리가 나올 줄이야.
“참 사이좋은 남매인가 봅니다.”
엘레나는 우아하게 입을 가리며 눈매를 초승달처럼 접었다.
오랜만에 나오는 미엘르 얘기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예, 맞습니다. 또 이미 혼약자가 있으시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아….”
엘레나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황자는 개의치 않은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괘념치 마십시오. 오늘 기대하고 나온 건 아니니 말입니다. 혼약자가 있는 사람을 빼앗을 만큼 파렴치한 놈도 아니고요.”
일순간 그에게서 신을 보았다.
이렇게 인자하고, 이렇게 온화한 사람일 줄이야.
미엘르, 너 남동생 하난 잘 두었구나.
아까 보았던 그 두 남자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자리에 나오는 것이 굉장히 불편했거든요.”
“저도 많이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편하군요.”
그는 슈가볼에 담긴 각설탕을 집어 찻잔에 퐁당 빠뜨렸다.
몸짓 하나하나에 담긴 기품이 꼭 우아한 백조를 보는 것만 같았다.
신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황자는 예쁘게 입매를 말아 올렸다.
“뭐가 그리 신기하십니까.”
“황자는 꼭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습니다.”
“황태녀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 같습니다.”
영혼이 담긴 듯 만 듯한 칭찬에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짜식, 넌 한국 오면 사회생활 잘할 거야.
“그나저나 스큘러스 공께서 질투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이렇게 걱정까지 해주다니.
사람이 이토록 완벽할 수가 있나.
“혹, 황자께서도 그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예, 아주 어렸을 때 자주 뵈었습니다. 하도 누님께서 공을 따라다니셔서….”
“아….”
미엘르가 어렸을 때 데카루스를 많이 따라다녔다고 했었지.
불쌍하게 너도 이리저리 많이 끌려다녔구나.
“한데 공의 표정이 많이 좋지 않더군요.”
“네? 그게 무슨….”
“아, 황태녀께선 아직 만나지 못하셨나 봅니다. 아까 궁 밖에서 마주쳤는데 눈에서 불을 뿜고 계시더군요.”
이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망했다.
X됐다.
“그, 그러니까 지금 데카루스가 황궁에….”
“계십니다.”
일순간 엘레나는 석상처럼 굳었다.
왜 데카루스가 지금 황궁에 있는 거지?
지금 한창 바쁠 시기 아닌가?
왜 그가 여기 있는 거냐고!
“걱정되시면 먼저 일어나셔도 됩니다, 전하.”
“저, 저 그럼 먼저….”
엘레나는 헐레벌떡 문을 박차고 궁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심장이 떨리던지 낙과하듯 툭 떨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딨는 거야.”
치맛자락을 잡고 여기저기 둘러봤지만 아무리 찾아도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 스큘러스 대공 보지 못했니?”
“아, 아까 궁으로 들어가시는 걸 보긴 봤는데….”
“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