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12화 (112/117)

112화.

“그래, 이혼도 하는 시대에 결혼이 별거야!”

게다가 아빠의 마지막 소원이라니 들어드릴 수밖에.

하지만.

“왜 국서 명단이 있는 건데?”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분명 아빠는 데카루스를 마음에 들어 한 것 같은데, 대체 왜 예비 국서 리스트를 주신 거지?

그것도 초상화까지 붙여서?

‘엘레나, 꼭. 꼭 이 명단에 있는 모든 남자들을 만나 보아야 한다. 물론 스큘러스 공도 좋지만 한 남자만 만나 보고선 모를 일이야. 자고로 남자는 많이 만나 봐야 하는 법. 그러니 꼭 기억하렴.’

이런 말까지 덧붙여 가면서 손에 명단을 꽉 쥐여 주셨다.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겠네.”

아마 데카루스가 이걸 알면 난리가 나겠지?

이 죄 없는 남자들을 찾아가서 협박이라도 한다면!

엘레나는 종이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안 돼. 이건 절대 비밀이야. 몰래 만나고 몰래 튀자. 그래. 그래야만 해!”

“전하, 침소에 드실 시간입니다.”

“아, 응. 들어와.”

끼익-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인은 손에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들어왔다.

아무래도 요새 잠을 통 못 자니 뭐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이것저것 도전해 보는 중이다.

“오늘은 뭐야?”

“수면에 도움이 되는 향초예요. 이걸로 효과 본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냉큼 사 들고 왔죠!”

엘레나는 눈을 반짝이며 새하얀 향초를 들어 보였다.

라벤더 향이 나는 게 정말 잠을 잘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마워. 역시 나 생각해주는 건 제인뿐이야.”

“뭘요,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죠.”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실실대던 엘레나는 토끼처럼 그녀의 품에 폭삭 안겼다.

“제인, 근데 큰일 났어.”

“네? 무슨 일이요?”

“이것 봐.”

엘레나는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있던 국서 명단을 건넸다.

그러자 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이게 다 뭐예요…?”

“예비 국서 명단이야.”

“네? 대공님은요?”

“황제께서 자고로 결혼을 하기 전에 여러 남자를 만나 봐야 한대.”

“네???”

제인은 혀라도 세게 씹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러곤 다시 명단으로 시선을 옮겨 빠르게 종이를 훑었다.

“막시우스 대공, 서바테일 황태자, 카나리아 황자…?”

제인은 이름을 읊으며 한 번 더 확인 사살했다.

“나 진짜 돌아버리겠어. 데카루스가 알기라도 하면….”

“이분들 무사히 집으로 못 돌아가실 텐데….”

“내 말이….”

엘레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명단을 줄줄이 늘어놓은 채 초상화를 보며 얼굴을 탐색하기 바빴다.

“근데, 아가씨. 잘생기긴 엄청나게 잘생겼는데요. 특히 이 카나리아 황자는 대박….”

“됐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아가씨, 정말이라니까요? 어서요!”

호기심이 든 엘레나는 눈알을 굴려 흘낏 초상화를 봤다.

그러자 대번 놀란 엘레나는 종이에 얼굴을 가까이 맞댔다.

“와, 진짜네. 무슨 조각상 같아. 아니 그냥 조각상을 그린 거 아니야?”

“언제 만나세요? 저도 좀 보러 가게요.”

“제인, 이거 심각한 일이라고!”

“어차피 결혼은 대공님과 할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엘레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직도 그와 결혼한다는 생각만 하면 부끄러워진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가씨, 대공님과 결혼하기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조, 조, 조, 좋아하긴! 제인, 그런 거 아니야!”

엘레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팔을 휘두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당황스러워 말이 제대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당장 내일인데 가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해. 나 이런 거 한 번도 해 본 적 없단 말야.”

전생에서 소개팅은커녕 과팅도 못 해 봤는데 이제 와서 예비 국서와 소개팅이라니.

이게 무슨 미소년 연애 시뮬레이션도 아니고.

“그래도 아가씨, 이미 약속된 거 무를 순 없잖아요. 그러니 마음 편히 만나고 오세요.”

“그래, 알았어….”

엘레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제인의 어깨에 기대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어쩐지 잠이 솔솔 오는 것만 같았다.

“제인, 이제 나 잘게.”

“그래요. 어서 주무세요.”

제인은 입으로 바람을 불어 후, 하고 향초를 껐다.

덕분에 온 방 안에 라벤더 향이 진득하게 녹아들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덮자 제인은 방을 밝히던 초를 하나씩 끄며 문 앞에 섰다.

“그럼 편히 주무세요.”

* * *

“드레스는 어떤 게 좋을까요? 이거? 아님 저거?”

“제인, 그냥 대충 하고 나갈래. 어차피 잘 보일 사람도 아니고.”

“그래도 황태녀의 체면의 있지. 대충 하고 나갈 순 없어요. 가서 코를 납작하게 눌러줘야죠!”

제인은 소개팅이 아닌 무투 대회라도 나가는 줄 아나 보다.

대체 죄 없는 사람들의 코를 왜 납작하게 눌러줘야 하냐고!

“제인, 이건 그저 다과회일 뿐이야. 그냥 대화만 하고 나온다고.”

“자자, 어서 입으세요. 최대한 머리 색과 어울리는 화사한 드레스를 골라봤어요.”

흰색에 가까운 베이비 핑크색의 드레스는 꼭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공주 인형 옷처럼 레이스가 나풀나풀했다.

시원하게 파인 U자형 네크라인과 프릴이 들어간 민소매 덕에 드레스는 더욱 더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또 가슴 부분에 박힌 작은 진주들은 움직일 때마다 아른아른 빛이 났다.

“너무 예쁘신데요? 정말 동화에 나오는 공주님 같으셔요. 우리 아가씨께선 어떻게 이렇게 매일 예쁘실까.”

마음속으로는 ‘제인, 그건 너한테나 어울리는 말 같은데.’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담았다.

아무래도 지금 제인의 행복 수치가 수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저 말까지 하면 정말 방 안이 난리가 날 것 같기 때문이다.

“자, 자. 어서 응접실로 가요. 막시우스 공께서 기다리고 계시겠어요.”

제인의 성화에 엘레나는 어쩔 수 없이 응접실로 끌려갔다.

꼭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재벌 집 아들과의 원치 않는 소개팅을 하러 가는 것처럼 엘레나에겐 이 상황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황태녀 전하 드십니다!”

끼익-

문이 열리자마자 고개를 숙인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온 제인은 얼굴이 보이지 않아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다.

잘생기기로 소문난 프루아 공국의 막시우스 공은 모든 여자들의 로망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게.”

얼마나 잘생겼으면 소문이 난 걸까.

문득 호기심이 앞섰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뒤에선 제인의 작은 탄식이 들려왔다.

눈의 나라 북부 프루아 공국에서 나고 자라 그런지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하얬다.

오죽하면 백설기 피부 같은 데카루스보다 더 하얄까.

“프루아 공국의 대공 라네즈 막시우스입니다.”

새하얀 눈을 닮은 은발 머리에 왼쪽은 보라색, 오른쪽은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오드아이.

싸늘함이 느껴지는 냉랭한 얼굴이지만 아직 소년미가 가득해 조금은 귀여운 구석도 있었다.

“그래요, 막시우스 공. 멀리서부터 오느라 힘들진 않으셨나요.”

엘레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소파 위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깍듯하게 인사를 하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정식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꼭 군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예, 전하. 그저 전하를 뵐 생각에 잠을 자지 못한 것 빼곤 없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주변 시녀들은 나지막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 소개팅이 아니라 무슨 팬 미팅이라도 나와 있는 것 같았다.

막시우스 공은 당황한 엘레나를 보며 입매를 길게 늘였다.

“저번 접견 때 뵙지 못해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그때 꽤 신경 써서 전하를 뵈러 가던 참이었거든요.”

그는 여우 꼬리처럼 눈꼬리를 접으며 살랑거렸다.

아무래도 그는 오늘 작정을 하고 나온 것 같다.

선수인지 아니면 원래 성격인지는 계속 보면 알겠지만.

“저도 무척이나 아쉬웠어요. 공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가령, 프루아의 눈사태 예방 계획이라든가 순록 개체 수 보존과 같은 유익한 이야기 말이죠.”

잠시나마 기대한 듯한 표정이 이내 싸늘하게 굳었다.

미세한 표정 변화였지만 데카루스를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에 저 정도는 캐치할 수 있었다.

“어머, 표정이 왜 그러신가요? 혹, 제 말이 언짢으신 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하. 그저 전하의 아름다움에 잠시 머뭇거린 것뿐입니다.”

거짓말.

눈사태 예방 계획과 순록 개체 수 보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니까 실망한 거면서.

엘레나는 속으로 조금 통쾌해 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그나저나 오늘 오실 땐 눈이 많이 오지 않던가요? 저번에 눈보라가 쳐 순록들이 많이 다쳤다던데 걱정이 되네요.”

점점 논점을 벗어나는 대화에 그의 얼굴은 점차 싸늘해져만 갔다.

애초에 엘레나는 소개팅에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

그저 어서 빨리 한 남자라도 해치우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갈 생각뿐이었다.

“저보다 순록들에게 더 관심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어머, 순록들은 참 귀엽잖아요. 말도 잘 듣고. 게다가 멋진 뿔까지! 프루아의 자랑이라고 들었어요.”

엘레나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순록의 기원과 순록의 종류, 순록을 길들이는 법들로 대화를 가득 채워 나갔다.

덕분에 막시우스 대공은 툭 치면 말하는 로봇이라도 된 듯 순록에 대해 빠짐없이 얘기해 줘야 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전 다른 분과 또 선약이 있어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만나서 반가웠어요, 막시우스공. 우리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죠?”

“전하!”

엘레나는 끝까지 고고함을 잃지 않고 응접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쾅-

“자, 한 놈 클리어….”

“전하, 유리온실에서 서바테일 황태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이젠 두 번째 미소년을 공략하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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