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미쳤어, 낮인데.”
침대에 널브러진 채 누워있는 엘레나는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잘못하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정말 큰일이다.
고고한 황태녀가 바깥에서, 그것도 낮부터 애정 행각을 하다니.
“여기 방음 잘 되는 거 맞지?”
“응.”
엘레나는 거북이처럼 고개를 빼꼼 내밀고 문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볼에 뽀뽀 세례를 하며 다시 베개에 그녀를 눕혔다.
“뭐야, 진짜.”
“나랑 있을 땐 나한테만 집중해.”
엘레나는 배시시 웃으며 그를 마음껏 껴안았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나누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전생에 일에 치여 살 때는 이런 기분 못 느꼈었는데.
그래서 다른 것일까.
“당신이 있어서 행복해.”
“나도.”
“정말?”
“응.”
이 행복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도 그와 평생 함께한다면.
그렇다면 더 행복할 수 있을까.
“당신은 내가 꼬부랑 할머니가 돼도 사랑할 거야?”
“응. 당연하지.”
“좋아. 그 말 기억할 거야.”
그렇게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뒹굴던 우리는 또 헤어질 시간을 맞이했다.
“카루스….”
“보고 싶을 거야.”
둘은 마차 앞에서 영화라도 찍듯 서로를 꽉 껴안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수군거릴 정도면 말 다 했다.
“보는 눈이 많아. 어서 가.”
“응….”
아쉬웠지만 그놈의 황태녀 체면인지 뭔지를 지켜야 하니까.
엘레나는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마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끝까지 그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황태녀 전하. 이제 정말 가보셔야 합니다.”
옆에 서 있던 위병은 조금 진절머리가 난 표정으로 정중히 말했다.
“카루스, 안녕….”
“잘 가.”
데카루스는 뺨에 짧게 키스를 한 뒤 천천히 손을 놓았다.
누가 보면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는 줄 알 테다.
엘레나는 아련한 얼굴을 창문에 대고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
잘 가라며 손 인사를 했지만 아쉬움은 가시질 않았다.
“안녕, 안녕….”
그렇게 마차는 힘차게 굴러갔다.
덜컹거리는 돌바닥 탓인지 그의 얼굴도 흔들려 보였다.
데카루스는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녀를 응시했다.
속에서 울컥하는 응어리가 터져 나왔지만 이내 꿀꺽 삼켜버렸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이것보단 덜 슬플 거야.”
엘레나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숲을 구경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좋아한다고 자각한 이후로 마음이 더 깊어진 느낌이다.
못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보고 싶고 밤에는 환청이 들릴 지경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원….”
창밖을 보던 엘레나는 조금 피곤한지 눈을 붙였다.
다시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쓸쓸하다.
그래도 제인이라도 있는 게 다행인 걸까.
다른 대신들은 시녀를 세 명 더 뽑으라고 아우성이다.
하지만 제인 말고 다른 시녀는 싫은걸.
그 대신 제인이 조금 고통받긴 하지만 말이다.
“에라이, 잠이나 자자.”
그렇게 마차는 구불구불한 숲길을 지나 황궁으로 달렸다.
가끔은 돌에 부딪쳐 크게 덜컹거릴 때도 있지만 마차 속 푹신한 쿠션이 그녀의 몸을 지탱해주었다.
나무의 초록 내음은 그녀의 뺨과 코끝을 사뿐히 밟고 지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5시가 되기 10분 전에 간신히 궁에 도착했다.
“전하, 왜 이제야….”
제인은 헐레벌떡 달려와 고개를 넙죽 숙였다.
아마 지금 이곳이 밖이 아니었다면 잔소리를 지겹도록 늘어놨을 테다.
가령, ‘아가씨! 벌써 4시 50분인데 왜 이제야 오셨어요!’라고 하겠지.
아무래도 불리한 상황일 땐 매일 밖에서 보는 게 좋겠다.
“전하, 어서 별궁으로 가시죠.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별궁? 본궁이 아니고?”
“예, 오늘은 특별히 별궁에 식사를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슬금슬금 떠오른다.
별궁에 식사를 준비했다고 하면 저번에 황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던 그곳 같은데.
꼭 작은 식물원같이 생긴 별궁.
“전하,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무슨 일이라도.”
“아니, 아니야. 가자, 제인.”
하지만 그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언덕 위에 있는 하얀 궁은 이전에 황후와 갔던 곳이었다.
분명 따듯한 날씨였는데 몸이 차갑게 떨렸다.
자꾸 황후가 피 칠갑한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끼익-
거대한 문이 열리자마자 긴 식탁 끝에 앉아있는 황제가 보였다.
엘레나는 바로 무릎을 꿇고 최대한의 예를 갖추었다.
“황태녀 엘레나 폰 에스티나가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엘레나.”
황제는 버선발로 달려와 그녀를 천천히 일으켰다.
황금이라도 본 듯한 미소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들었다.
“자, 자. 어서 이리 오렴. 우리 딸.”
그는 여전히 잔기침을 하며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날이 갈수록 몸이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는 작은 머리를 한번 쓰다듬더니 이내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자리로 돌아갔다.
“건강하셔야 합니다, 폐하.”
“엘레나, 네가 아빠라고 불러준다면 왠지 더 건강해질 것 같구나.”
“네, 아빠.”
배시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자 그새 황제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역시 황제는 딸바보인 게 틀림없다.
“요새 나날이 네 칭찬이 들려온단다, 엘레나.”
“칭찬이요?”
“그래, 귀 두 개가 부족할 정도란다. 또 나도 어전회의 때의 너를 보면 감탄스러울 때가 있어. 어찌 보면 나보다 더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거니 한단다.”
갑자기 밀려오는 칭찬 폭탄에 머릿속이 새카매졌다.
얼굴을 벌게지고 기분은 좋은데 그냥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까.
“가, 감사합니다.”
“당연한 걸 말하는 것뿐이란다, 엘레나.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황제는 껄껄 웃으며 와인 한 병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왔다.
“아빠, 제가….”
“아니, 우리 딸과 처음 하는 술인데 당연히 이 아비가 따라야지. 이토록 영광스러운 순간인데.”
와인 잔에 조르르 차오르는 보라색 포도주는 그 빛깔을 뽐내며 느리게 차올랐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못하는 엘레나를 보곤 어깨를 살며시 짓눌렀다.
“이 아비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말거라.”
“네….”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는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럼 마시도록 할까.”
“좋아요!”
잔을 든 순간 황후가 수면제를 탔던 와인이 생각났다.
그때만 생각하면 숨이 가빠오곤 하는데 지금은 그럴 새가 없었다.
아빠와 처음 하는 술인데 싫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엘레나는 잔에 입을 대고 천천히 와인을 음미했다.
속으로는 괜찮을 거라며 주문을 외면서 말이다.
“맛있네요.”
“그렇지. 황실에서 가장 좋은 걸 들고 왔으니.”
그때의 상황이 오버랩되었다.
‘와인이 굉장히 맛이 좋네요.’
‘당연하지. 약을 탔으니 맛이 좋을 수밖에.’
일순 숨이 턱 막혔지만 입에 머금은 포도주를 꿀꺽 삼켰다.
그때와는 달리 어지럽거나 졸리지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이 상황이 퍽 웃겼다.
“입맛을 돋우었으니 식사를 들자꾸나.”
“네, 좋아요. 너무 맛있을 것 같아요.”
역시 황제와의 만찬이라 그런지 신기한 음식들이 많았다.
오징어 먹물을 이용한 파스타와 감자 퓌레, 말린 아티초크 구이를 올린 문어요리.
그리고 잘 구워진 연어 스테이크와 치즈와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인 소고기 요리까지.
호텔 요리 뺨치는 고급 식자재와 음식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즐비했다.
“자, 그럼.”
황제는 어렵게 숟가락을 들며 양송이 아채 수프를 떴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 탓에 당장이라도 숟가락을 놓칠 것만 같았다.
그는 딸에게는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숙여 얼른 입을 갖다 댔다.
쨍그랑-
하지만 입술과 부딪친 숟가락은 그릇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엘레나는 나뒹구는 금수저를 보더니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괜찮으세….”
“괜찮다, 엘레나. 앉도록 해. 이 아비는 무탈하니.”
아니, 무탈은커녕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낯빛이 어두웠다.
그를 지켜보던 시종은 얼른 다른 숟가락을 집어 황제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포물선을 그리며 자리에서 쓰러졌다.
털썩-
“아, 아빠!”
엘레나는 헐레벌떡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드레스에 음식이 묻고 말고는 상관없었다.
일단 아빠를 빠르게 궁으로 모셔야 했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자 밖에 있던 위병들이 빠르게 들어왔다.
“폐하!!!”
일순 난장판이 된 별궁은 곧 비명으로 가득 찼다.
“어서 폐하를 모셔!!!”
“예, 전하!”
엘레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야가 흐릿하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아빠에게 가야 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어서, 어서 폐하의 궁으로.”
그렇게 간신히 시종들의 부축을 받아 아빠가 머무는 본궁으로 향했다.
가는 걸음걸음마다 어찌나 숨이 차던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전하, 차라리 궁으로 되돌아가심이….”
“아니, 폐하를 뵙고 갈래.”
그렇게 고집을 부려 그에게 도착한 엘레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의 숨은 곧 꺼질 불씨처럼 미약하게나마 남아있었다.
“정신 차리세요, 아빠…. 돌아가시면 안 돼요….”
또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되찾은 가족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잃을 순 없었다.
엘레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묻었다.
손목 너머로 느껴지는 맥박은 아직 그가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엘레나….”
“아빠?”
“왜 울고 있니. 우리 예쁜 딸.”
“아빠, 아빠. 죽지 마세요. 죽으면 안 돼요. 어떻게 만났는데….”
황제는 오른손을 들어 말간 뺨을 쓸어내렸다.
따듯한 온기가 살갗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이 아비가 어떻게 죽어. 아직 네가 혼인하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그럼 저 결혼 안 할래요. 아빠랑 오래오래 평생 같이 살 거란 말이에요.”
눈가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손가락을 들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간신히 입 밖으로 내뱉는 목소리가 안타까웠다.
“이 아비는 네가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단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네 모습을 보고 싶어. 그게 이 아비의 마지막 소원이란다, 엘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