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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09화 (109/117)

109화.

그렇게 레지옹 이스트의 재난 지역 시찰이 끝났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완전히 녹초가 된 엘레나는 마차에 쓰러지듯 앉았다.

“아, 피곤해 죽겠네.”

그래도 그리핀 대공이 생각보다 일 처리를 잘해주어서 쉽게 끝났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구멍 난 곳이 많았다.

침수 지역 관리라든지 농작물 피해 보상이라든지 이재민을 위한 세금 감면이라든지.

아직 이런 재난 피해에 대한 법이 정착되지 않아서 그런지 허술한 점이 허다했다.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어.”

엘레나는 지친 몸을 누이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돌아가면 또 제왕학 과외를 받아야겠지.

분명 가서 졸 것 같은데 그럼 또 자냐고 혼이 날 테지.

“카루스가 보고 싶다….”

그를 못 본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돼 간다.

마지막으로 본 게 미엘르와 유리온실에서 차를 마셨던 때니까.

“응큼해 가지곤….”

갑자기 온실에서 그와 입을 맞추던 장면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엘레나는 손으로 두 뺨을 매만졌다.

뭔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를 따라 자신도 응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전하.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시종의 등장에 엘레나는 후다닥 자리에 앉았다.

과외 선생님께서 황태녀는 항상 몸가짐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고 아무 일도 없던 척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다음 일정은?”

“아, 원래 오늘 프루아 공국의 막시우스 대공과의 접견이 있었습니다. 근데 현재 프루아의 극심한 기후 악화로 어제부터 길이 막혀 도저히 황궁까지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취소? 취소됐어?”

엘레나는 한쪽 눈을 감고 생일 케이크 앞에서 소원이라도 비는 아이처럼 두 손을 꽉 모아 쥐었다.

“네, 아쉽게도….”

“와! 너무 아쉽지만 안 되겠네. 지금 당장 대공저로 가야겠어!”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님 그리고 이 세상에 계시는 모든 신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불쌍한 어린 양을 이토록 어여삐 여기시니 감사한 마음을 이루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엘레나는 환희에 가득 차 연신 성호를 그었다.

“전하, 대공 전하를 황궁으로 부르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렇게 황태녀의 체신이 외부에 자주 노출되면….”

“지금 아님 볼 시간이 없단 말야. 응? 제발 한 번만.”

툭하면 회의, 툭하면 만찬, 툭하면 다과회에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시종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늦더라도 5시까진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황제 폐하와의 만찬이….”

“알았어! 어쨌든 간에 일단 대공저로 가자!”

그녀의 말에 마차는 말머리를 돌려 대공저로 향했다.

흙이 묻은 드레스를 갈아입고 싶었지만 황궁을 들렀다 가면 왠지 늦을 것만 같았다.

또 데카루스를 오래 보지도 못할 테고.

“내가 가면 깜짝 놀라겠지?”

엘레나는 큰 고심에 빠졌다.

그를 어떻게 해야 놀라게 할 수 있을까.

분명 지금 시간이면 회의가 끝나고 집무실에 있을 테다.

“몰래 들어가면 분명히 들킬 텐데.”

같이 잘 때도 물을 마시러 일어나면 깰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니까.

“아무렴 어때. 카루스를 보는데.”

그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묵은 피로가 싹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몸에 활기가 돋고 눈이 맑을 수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도, 지저귀는 새들의 노랫소리도, 저 멀리 계곡에서 흐르는 힘찬 물의 움직임도.

“전부 완벽해.”

마치 퇴근하고 치킨을 사 가지고 들어가는 가장의 마음이랄까.

집에서 아기 새처럼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한달음에 뛰어가고 싶은 그런 기분이다.

“헤헤헤….”

그렇게 음산한 미소를 흘리며 대공저에 도착하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 익숙한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2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리웠던 이곳.

“대공저다!”

엘레나는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문 열 준비를 했다.

마치 버스가 멈추지도 않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빨리, 빨리.”

몸이 바뀌어도 역시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엘레나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에스코트도 없이 문을 활짝 열고 정문으로 뛰어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위병들은 익숙한 얼굴에 신기루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비볐다.

“저, 전하?”

“안녕, 오랜만이야. 문 열어줘.”

“예, 예!”

거대한 철문이 열리자 엘레나는 토끼처럼 깡충 뛰어 대공저로 향했다.

그녀가 나타나자마자 대공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잔디를 깎던 정원사도, 수건 더미를 들고 지나가던 시녀들도 전부 고개를 조아리며 황태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안녕, 안녕!”

마치 인기 스타라도 된 듯 손을 흔드는 모습에 새로 온 시종들은 기겁을 했다.

“황태녀 전하께서 원래 성격이 저러셔? 고고하고 우아하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몰라, 나도 모르겠으니까 일단 머리나 숙여.”

그렇게 말해도 다 들린답니다, 여러분.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냥 크게 외치시죠!

엘레나는 눈치 따위 보지 않고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랐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가 자꾸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2층에 다다라 저 멀리 집무실이 보이자 엘레나는 속도를 줄이고 살금살금 걸었다.

“조심, 조심.”

집무실 앞을 지키는 위병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허둥지둥거렸고 엘레나는 손가락을 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끼익-

열린 문틈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자 서류에 뒤덮인 데카루스가 보였다.

꽤나 집중했는지 문이 열린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역시 누구든 일에 집중할 때가 가장 멋있는 것 같단 말야.

이렇게 몰래 보니까 스토커 같긴 한데 너무 좋다.

엘레나는 그를 놀라게 할 요량으로 도둑고양이처럼 팔을 움츠리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간 순간 큰 소리로 그를 놀불렀다.

“카루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확실히 작전이 성공한 것 같았다.

얼굴에 완전히 드러나진 않았지만 미세한 근육 변화가 눈에 띄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천천히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엘레나는 뒷짐을 지고 가슴을 높이 들며 새침하게 말을 이었다.

“막시우스 공과 접견이 있었는데 못 온다네? 그래서 당신 보러 왔어.”

엘레나는 방실방실 웃으며 그의 옆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다람쥐처럼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 기대하는 표정이 꼭 선물이라도 받으려는 어린아이 같았다.

사실 마음속으론 그가 당장이라도 일어나 안아줬으면 했지만 그의 반응은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살짝 굳어진 예쁜 얼굴에 조금 당황한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루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얼굴을 쓸어 올렸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와.”

차가운 목소리에 엘레나는 잠시 표정을 굳혔다.

눈치를 살피던 엘레나는 무언가 잘못했나 싶어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황태녀 체면이 있지, 엘레나. 이렇게 막 함부로 오면 안 돼.”

데카루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다소곳이 모인 손을 끌었다.

그의 시선에는 반가움 대신 근심과 걱정이 서려 있었다.

“체면이 무슨 상관이야. 밥 먹여 줄 것도 아니고.”

“아무튼 다음부터 그러지 마. 서신을 보내면 내가 직접 갈게.”

“서신은 답답하잖아. 오래 걸리고. 그러다가 내가 또 일정이 생기면? 그럼 못 보잖아.”

“그래도 참아야 하는 게 황태녀야. 당신에겐 내가 아니라 나랏일이 우선이라고. 자꾸 이러면 곤란해, 엘레나.”

“…….”

일순간 말문이 막혀 그저 그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곤란하다니.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온 게?

그것도 아니면 귀찮기라도 한 걸까?

“왜 그래.”

데카루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했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왔다.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어 보았지만 엘레나는 영 반응이 없었다.

“엘레나.”

“알았어, 갈게.”

“왔는데 어딜 가. 당신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준비하라고 할게. 이리 와서 앉아.”

“아니야. 안 그래도 돼.”

엘레나는 맞잡은 손을 뿌리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억지로 지은 미소가 티 난 걸까.

데카루스는 고개를 틀며 새초롬하게 눈을 떴다.

“무슨 일 있었어?”

그러자 엘레나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냥 나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

“엘레나.”

돌아서려는 그녀의 몸에 일순간 단단한 족쇄가 걸렸다.

셔츠 밖으로도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몸이 얇은 드레스에 맞닿았다.

“놔, 이거.”

저를 옥죄는 팔을 떼어내 벗어나려 해 봤지만 가당치도 않았다.

“대체 왜 그래.”

“피곤해서 그렇다고. 비켜. 나 집에 가고 싶어.”

“엘레나.”

아무리 놔 달라고 해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프게 조여올 뿐.

긴 싸움에 몸은 점점 더 지쳐가기만 했다.

“제발, 카루스. 나 피곤해.”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아니, 당신 오늘 이상해. 이리 와. 앉아.”

데카루스는 그녀의 손에 깍지를 꽉 끼고 소파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녀는 코뿔소처럼 버티고 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놓으라고.”

“…….”

“데카루스.”

애칭을 빼고 이름을 부르자 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는지 맞잡은 손을 내려놓았다.

“엘레나, 나 봐.”

“…….”

“엘레나.”

“당신에게 난 대체 뭐야?”

떨지 않으려 애썼지만 바보처럼 떨리는 목소리를 멈출 수 없었다.

엘레나는 입술을 한 번 꼭 깨물더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호수처럼 큰 눈망울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뭐?”

“황태녀 전하야? 아님 엘레나야?”

“무슨 소릴 하는….”

“왜, 아예 무릎이라도 꿇고 전하라고 부르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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