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일주일 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
“전하.”
“…….”
“전하.”
“…….”
“아가씨!”
“아악!!!”
곤히 자고 있던 엘레나는 발작하듯 놀라 벌떡 일어났다.
꿈에서 분명 맛있는 딸기 케이크를 먹고 있었는데 제인 때문에 다 망쳤다.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고막이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일어나세요. 어전회의에 참석하셔야죠. 벌써 10시가 다 되었어요. 아침도 거르시고. 아주 이곳에 오시고 나서 생활이 망가졌다고요!”
“아, 제인. 잔소리는 그만해. 피곤하단 말이야.”
요새 제인은 입에 모터라도 단 것처럼 잔소리를 한다.
대공저에서 지낼 땐 그저 엄마 같았는데 이젠 꼭 호랑이 선생님 같달까.
“어휴, 어서 일어나세요. 옷을 준비해 드릴게요.”
“나 어제도 일정이 여섯 개였어. 미엘르와 티타임에 대운하 건설 현장 시찰에 후계자 수업에 아주 몸이 부서질 것 같다고.”
“아가씨, 그래도 어전회의는 빠지시면 안 돼요. 대신들께서 전부 모이는 자리잖아요. 네?”
“벌써 지긋지긋해. 너무 힘들어. 벌써 몸무게가 반으로 줄어버린 것 같아.”
“아가씨….”
제인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간신히 일으켰다.
매가리라곤 하나도 없는 모습이 꼭 살아있는 시체 같았다.
“황태녀가 이렇게 힘든 건 줄 몰랐어.”
“폐하께서 편찮으시니 별수 있나요.”
“이 망할 황자들은 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나만 이 고생이냐고!”
“다 반역죄로 잡혀가셨잖아요. 이제 남은 사람은 아가씨밖에 없어요.”
제인은 레이스가 겹겹이 달린 연하늘색 드레스를 꺼내 건네주었다.
“나쁜 놈들….”
“자, 여기 빵이라도 드세요. 그래야 회의할 힘이 나죠.”
입에 작은 바게트를 물고 우물우물 씹자 꼭 소라도 된 것 같았다.
제인은 풀어지지 않도록 드레스 끈을 단단히 묶어 고정했다.
“이 드레스도 답답해. 차라리 원피스를 입을 때가 좋았는데. 편하고.”
“황궁이니 어쩔 수 없죠. 황궁의 법도를 따르는 수밖에.”
제인은 마치 로봇처럼 정석적인 매뉴얼을 읊었다.
꼭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군대 체험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자, 그럼 어서 기운 내서 본궁으로 가요.”
* * *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여느 때처럼 의례적인 인사치레와 함께 어전회의가 시작되었다.
옥좌를 중심으로 나란히 얼굴을 맞댄 대신들은 무릎을 굽힌 채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
황제의 말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대신들이 꼭 인형 같았다.
“자, 그래서 오늘은 또 어떤 일들인가.”
엘레나는 여느 때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회의를 개시했다.
그녀는 겉으로 편하게 웃고 있지만 속으론 악마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이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분명 소설에서 보면 황태녀가 이 정도로 바쁘진 않았는데 말야.
“서바테일 왕국에서 전승 축하 사절단을 보낸다고 합니다. 허나 지금 사절단이 묵을 공간이 여의치가 않습니다. 그리하여 전하, 재건 공사에 조금 더 속도를 올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현재 황궁은 전쟁이 끝나고 부서진 건물들을 재건 중이다.
근데 서바테일에서 꽤 늦게 사절단을 보내네.
“공사 진행 속도를 올리려면 그만큼의 노동력과 자본이 필요한데…. 현재 예산이 어느 정도로 잡혀있지?”
“현재 2,000만 루나로 잡혀있으나 필요하시다면 2,500만 루나까지 제고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부로 막 예산을 올려도 되는 겁니까? 현재 재정부에서 운영하는 사업만 해도 열 개가 넘어가는데 그 예산은 대체 어디서 난 겁니까.”
“당장 급하지 않은 한부모 가정 지원금과 알로체 운하 건설금에서 각각 250만 루나씩 차감할 계획입니다. 그렇게 하면….”
지금 무엇보다도 급한 게 한부모 가정 지원금인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무릇 국가의 기반은 국민이고 국민이 잘살아야 국가도 단단해지는 법이라고 했다.
그럼 당연히 서민들을 잘 먹이는 게 나라가 해야 할 도리인데.
“그것보단 차라리 공사 방향을 바꾸도록 하지. 별궁 먼저 착수에 들어간다면 예산을 늘릴 필요가 없지 않겠나.”
“명 받들겠습니다, 황태녀 전하.”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신들 중 한 명이 말을 이었다.
“레지옹 이스트 공국 그리핀 대공의 서신입니다, 전하. 이번 태풍으로 농작물들이 전부 죽어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다고 하옵니다. 제국의 식량 저장고를 개방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엘레나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했다.
하긴 이번 태풍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어.
대비를 했음에도 피해가 엄청나다고 하던데.
“현재 식량고 상황은 어떠한가, 마렐 경.”
“현재 수용률 94%로 양호한 상태입니다. 레지옹 이스트의 상황에 따라 20, 30%가량 지원 가능합니다.”
“추가적으로 레지옹 이스트에 지원금을 전달하는 것이 어떤가. 농민들은 물론 상인들까지 피해가 막심할 것 같은데. 게다가 물가 상승으로 굶는 이가 많을 테고.”
“영민하신 결정이십니다, 황태녀 전하.”
그렇게 길고 긴 회의는 1시간여 만에 막을 내렸다.
대신들은 끝나자마자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퇴장했다.
반대로 빳빳한 빨래처럼 말라붙은 엘레나의 얼굴은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다.
“아, 기운 빠져. 제인, 다음 일정은?”
“레지옹 이스트 재난 지역 시찰 일정이 있으시네요. 아마 점심은 그쪽에서 드셔야 할 것 같아요.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요.”
이렇게 밥 먹을 시간조차 넉넉지 않을 정도로 바쁘다.
이건 황태녀가 아니라 거의 공무원 아닌가?
아무리 에스텔이 국민을 위한 나라라고 해도 그렇지 황족이 이렇게 바쁜 게 말이 되냐고!
엘레나는 허리를 굽힌 채 한숨을 푹 쉬며 마차를 타러 나섰다.
“제인, 나 이러다 정말 죽는 게 아닐까.”
“어머, 전하. 말이 씨가 된다고요. 그런 소린 하지 마세요.”
제인은 뭐가 그리 좋은지 우아하게 웃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날씨도 좋은데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할까.”
“모두 제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겠어요? 높은 자리일수록 낮은 곳을 더 굽어살피셔야죠.”
“그래, 내 몸 부서져라 일해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면 그걸로 됐지….”
“맞는 말씀이세요. 자, 어서 마차에 올라타세요. 곧 출발할 시간이에요.”
엘레나가 탈 황금빛 마차 앞뒤로는 호위 마차가 한 개씩 붙어있었고 스무 명 정도 되는 위병들이 말을 타고 대기하고 있었다.
또 커다란 짐 마차에는 레지옹 이스트에 필요한 식량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꼭 ‘여기 황태녀가 타고 있다!’라고 홍보하는 것 같아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그럼 갔다 올게, 제인. 나 없을 동안 밥 잘 챙겨 먹고….”
“네, 그럼요. 전하께서도 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제인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황태녀가 뭐라고, 시종들은 모두 마차가 사라지기 직전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힘내자….”
* * *
“황태녀 전하 드십니다!”
한 위병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바닥에 벽돌을 깔아둔 탓인지 돌길만큼 흔들리진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폐허 그 자체였다.
집과 건물들의 지붕과 창문은 모두 뜯겨 나가 있었고 광장의 분수대엔 조각상이 떨어져 볼품없었다.
사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광장은 장례식장처럼 음울했고, 임시 숙소라고 만들어 놓은 천막은 곧 무너질 것처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마중 나온 그리핀 대공과 행정관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황태녀에게 예를 차렸다.
50명쯤은 되는 사람들이 파도타기처럼 무릎을 꿇으니 아주 부담스러웠다.
“상황이 심각하네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저희도 최선을 다해 보았습니다만 워낙 규모가 큰 태풍이라 도저히 손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대공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얼굴을 보아하니 잠을 며칠 못 잔 것처럼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 앉아있었다.
“한번 둘러보죠.”
천막 주변에서는 배고프다며 칭얼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달래느라 정신없어 보였고 다들 며칠은 굶은 듯 얼굴에 수심이 깊었다.
“재난 복구 예산은 어느 정도죠?”
“5,000만 루나입니다. 경제국에서 내년 예산을 최대한 줄이고 줄여서 만든 금액입니다.”
“황궁에서 지원금 8,000만 루나를 준비했어요. 이 정도면 크게 도움이 될 거라 예상합니다. 혹시라도 더 필요하시다면 말씀해주시고요.”
“8,000만 루나라면 재난 복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황태녀 전하.”
엘레나는 말 대신 짧은 미소로 답했다.
그리핀 대공의 얼굴엔 조금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또 요청하신 제국 식량고의 30%를 풀었고요. 이 정도면 당분간 먹는 데 지장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대공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리 오래갈 순 없을 거예요. 레지옹 이스트의 인구가 워낙 많으니까요. 대비책은 생각해 놓으셨나요?”
“예…. 일단 저희 쪽에서 식량 수요에 맞춰 최대한 공급을 늘릴 계획입니다. 재난 대비 예산으로 농수산물과 식자재 수입을 100% 늘리고 농경지 복구를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잡았습니다.”
레지옹 이스트 역시 무역이 발달한 지역이기 때문에 물자 공급이 원활하다.
지원금과 예산이 충분하니 식량 문제는 당장이라도 해결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의식주 중 ‘식’에만 집중하게 되면 분명 주거지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주택 피해 복구는 어떻게 돼가고 있나요?”
“밤낮없이 복구 중입니다만 여전히 복구 속도가 느립니다. 자재 문제도 그렇고 워낙 피해 정도가 심각해서요.”
“그럼 내일 중으로 필요한 자재와 설비를 보내도록 할게요. 장부가 있다면 정리해서 넘겨주시고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황태녀 전하. 이 은덕을 어찌 갚아야 할지….”
“그저 공국민들을 위해 힘써 주세요, 그리핀 공. 그게 공께서 해야 할 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