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뭐?”
데카루스는 어처구니없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놀란 표정은 아닌 걸 보니 사귀진 않았나 보다.
하지만 엘레나의 추궁은 끝이 없었다.
“애칭도 부르고 팔짱까지 낄 정도면 엄청 친한 것 같은데.”
엘레나는 음식을 먹는 척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조금 토라진 목소리에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럼 뭐야?”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야.”
하지만 그녀의 레이더망은 놓치는 게 없었다.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엘레나는 입술을 오므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왜.”
“수상해.”
“뭐가.”
“자꾸 숨기는 것 같아.”
“아무것도.”
입술을 뜯던 엘레나는 포크를 들어 소시지를 쾅 찍었다.
“그건 이따가 보면 알겠지.”
* * *
황궁, 유리온실.
“어머, 오셨네요.”
미엘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두 사람을 반겼다.
살며시 올라간 입꼬리가 얼마나 예쁘던지 승무원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네, 좀 늦었죠. 죄송해요.”
“아니요. 이렇게 아리따운 황태녀 전하를 뵐 생각에 너무나 두근거렸는걸요.”
“아….”
그녀의 표정을 보니 단순히 입에 발린 칭찬은 아니었다.
일단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거리를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앉아.”
데카루스는 손수 의자를 끌어 엘레나를 먼저 앉혔다.
그 모습을 본 미엘르는 한 손을 들어 우아하게 입을 막았다.
“카루스가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그녀는 조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우리 둘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카루스와는 잘 아는 사이신가 봐요.”
“네, 그럼요. 저희는 원래 약혼….”
“미엘르.”
데카루스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미엘르는 당황한 듯 입을 살짝 벌리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어머, 제가 실수한 건가요?”
“…약혼이요?”
“아니, 아무것도….”
엘레나는 자꾸만 방해하는 데카루스의 입을 꽉 틀어막고 눈매를 예쁘게 접었다.
“계속 말해 주실래요?”
“아, 괜찮을까요? 지금 카루스 눈에서 불이 나오고 있는데….”
“말해 주세요.”
데카루스의 눈치를 보던 미엘르는 목을 두어 번 가다듬더니 이내 말을 뗐다.
“약혼했던 사이거든요. 우리.”
그에게 약혼녀가 있었단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여자한텐 관심은 쥐뿔도 없었다고 하길래 지금까지 사귄 여자가 없는 줄 알았지.
그런데 이제 와서 약혼녀라니.
엘레나는 데카루스를 흘낏 쳐다보곤 다시 미엘르에게 집중했다.
“아, 근데 그렇게 진지한 사이는 아니었답니다. 오해 마세요.”
미엘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눈치챘는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사래 쳤다.
그녀를 의심하고 싶진 않았지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무언가 찝찝했다.
엘레나는 선생님께 배운 의례용 미소를 띠며 너그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참 궁금하군요, 미엘르 양. 조금 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게…. 아마 10년은 더 된 이야기죠. 에스텔의 황실 무도회에 한번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 카루스를 만났어요.”
미엘르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턱을 짚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자 햇살이 비치는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이 사르륵 흘러내렸다.
“열 살인가, 열한 살인가. 어린 나이임에도 그 강단 있는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죠. 게다가 잘생겼잖아요. 그 누구든 반할 수밖에 없는 미모였으니까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첫사랑이라는 건가.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호응했다.
“그때부터 아바마마께 졸랐어요. 스큘러스가의 영식과 약혼하고 싶다고. 또 그때가 카나리아와 에스텔의 사이가 아주 좋았던 때거든요.”
“아….”
“그래서 아바마마도 흔쾌히 동의하셨죠. 그리고 꽤 빠르게 약혼 일정이 잡혔어요. 또 제가 직접 에스텔에 간다고 했을 정도로 많이 좋아했었죠.”
미엘르는 예전 생각에 즐거운 듯 여전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카루스는 절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
“아무리 좋은 선물을 보내고 예쁘게 치장을 해도 절 봐 주지 않더라고요.”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인데 눈길 한 번조차 주지 않았다니.
별나기도 하지.
“카루스의 눈은 오로지 황태녀 전하만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저요?”
“네, 그래서 그때 생각했어요. 아,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구나. 아무리 눈에 띄려 노력해도 황태녀 전하를 뛰어넘을 순 없겠구나.”
“…….”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했어요. 지금은 뭐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사는 중이랍니다.”
미엘르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꼭 만화에서나 보는 것처럼 사랑에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귓가에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물론 잘생긴 건 카루스가 더 잘생겼지만요.”
그녀의 말에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짧게 웃음을 내뱉었다.
“지금은 아무 감정도 없는, 그저 친구 사이랄까요. 워낙 카루스가 말도 없고 까칠해서 친구가 되기에도 오래 걸렸지만요.”
미엘르는 테이블에 손을 올려 꽃받침을 한 채 둘을 응시했다.
“잘 어울리세요. 두 분.”
“아, 고마워요….”
엘레나는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생각보다 더 착한 사람인 것 같다.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것도 같고.
“그나저나 카나리아에서 선물로 티를 가져왔는데 한번 드셔보실래요?”
“아, 칸나티요?”
“어머, 알고 계신가요?”
“네, 매일 마시던 티예요. 워낙 향이 좋고 맛이 일품이라 자주 찾았었죠. 지금도 물론이고요.”
미엘르는 두 손가락을 맞부딪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황태녀 전하를 위해서라도 더 챙겨올 걸 그랬어요. 어쩌죠. 다음에 배편으로라도 보내드릴게요.”
“아니에요. 말로만이라도 너무 감사한걸요.”
엘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이에 미엘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엘레나를 선망하듯 바라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너무 빤히 바라보는 탓에 얼굴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꼭 팬 사인회에서 연예인을 보는 듯한 눈빛에 그녀를 내칠 수도 없었다.
“너무…. 귀여우세요….”
“…네?”
미엘르는 화들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순간 자기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왔는지 자각한 모양이다.
빨갛게 볼을 붉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아니. 아니에요.”
당황한 엘레나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눈알을 굴리자 그녀는 마치 몹쓸 짓이라도 한 사람처럼 풀이 죽어 대답했다.
“황태녀께서 다람쥐처럼 너무 귀여우셔서 그만…. 저도 모르게. 제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아, 아니. 용서라뇨. 전 아무렇지도 않았답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사래를 치자 미엘르는 감동받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정말요…?”
“네, 정말이죠.”
긍정의 대답에 그녀는 잠시 무언가 고민하는 듯해 보였다.
짧은 시간에 표정이 확확 뒤바뀌는 모습이 꼭 연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긴긴 고민 끝에 미엘르는 기백에 찬 얼굴로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럼 제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미엘르.”
데카루스는 사실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슬쩍슬쩍 엘레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친구가 되는 걸 왜 막냐고들 하겠지만 다 이유가 있다.
미엘르는 한번 사람을 사귀면 그 사람이 지칠 때까지 쫓아다니는 지독한 사랑꾼이다.
어렸을 적 한번 당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엘레나까지 그 고생을 시킬 순 없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또 무례를….”
“아, 아니에요. 우리 친구 해요. 마침 저도 친구가 없었던 터라 심심했거든요.”
그러자 안절부절못하던 미엘르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폈다.
환희에 찬 얼굴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도 울고 갈 만큼 어여뻤다.
“그럼, 저. 혹시. 미엘이라고…. 불러주실래요?”
“네, 미엘. 좋아요. 전 그냥 엘레나라고 불러줘요.”
데카루스는 멀찍이 신난 두 여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엘레나가 좋아하는 거라면 다 해주고 싶었지만 이번 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곧 미엘르가 떠나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눈에 불을 켜고 막았을 것이다.
“그럼 이만 여기서 일어나지. 황태녀 전하께서 많이 피곤하실 텐데요.”
이건 질문이 아닌 일종의 반협박이었다.
그의 눈빛을 보아하니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자는 암묵적인 신호다.
“그럼 그럴까요? 미엘, 오늘 즐거웠어요. 나중에 또 만나요.”
엘레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반협박을 들어주기로 했다.
안 그럼 또 이따가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해댈 게 분명했기 때문에.
“너무 아쉽지만. 좋아요. 내일 또 찾아봬도 되죠?”
“그럼요. 미엘이라면 언제든지요.”
입에 발린 소리였지만 미엘르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그녀의 옆에 섰다.
“그럼 엘레나, 내일 봐요. 저는 별궁 쪽으로 가볼게요.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저도요. 내일 봐요. 미엘.”
그렇게 미엘은 콧노래를 부르며 온실의 후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에서는 만화처럼 작은 음표 여러 개가 튀어나왔다.
“가자, 카루스.”
“그래.”
데카루스는 손에 깍지를 꽉 끼더니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그나저나 그럼 날 몇 년 동안 좋아한 거야?”
엘레나는 손가락을 쫙 펴고 숫자를 세며 하나하나씩 접어 갔다.
데카루스는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거 세서 뭐 하게.”
“궁금하잖아.”
대체 당연할 걸 왜 물어보는 거람.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온실 유리를 타고 들어온 햇빛에 붉은 눈이 보석처럼 빛났다.
“나 봐.”
“보고 있잖….”
일순간 물컹한 무언가가 그녀의 입술을 가로챘다.
놀란 엘레나는 혹시라도 시종들이 보고 있진 않나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아무래도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시종들 때문에 신경증이 걸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미쳤어! 누가 보기라도 하면!”
“여기선 안 보여.”
그는 거침없이 한 번 더 입술을 맞췄다.
이 인간은 부끄러움이란 것도 없나 보다.
엘레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고 온실 밖으로 이끌었다.
아무래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금 손을 잡아채는 그의 손길에 몸이 뒤로 기울었다.
“카루스…!”
“난 야외 키스가 더 좋은데.”
“…….”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