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06화 (106/117)

106화.

“다 울었어?”

“응….”

“이리 와.”

그가 팔을 벌리자 엘레나는 다람쥐처럼 폴짝 뛰어 안겼다.

등을 천천히 두드리는 손길에 남았던 울음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에이든은 앞으로 어떻게 살까….”

“굳센 아이니 잘 살 거야. 너무 걱정 마.”

“응….”

걱정하지 말래도 걱정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경제관념도 없는 멍청이가 혼자서 어떻게 살아갈지.

혹시 사기라도 당해서 가진 돈을 다 잃는 건 아닌지.

“하긴 그럴 리는 없나.”

“무슨 소리야.”

“에이든이 사기당할 리 없잖아. 사기 치면 모를까.”

“…….”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니까.”

엘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살인까지 저지른 그가 이 세상에 무서울 게 뭐가 있겠는가.

이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또 사고나 치지 않길 바라야지.

“근데, 황태녀에게 사면권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엘레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제인. 제인이 알려줬어.”

* * *

식사를 마친 뒤 방에서 혼자 펑펑 울고 있을 무렵이었다.

복도까지 우는 소리가 들렸는지 제인은 놀라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 아가씨. 왜 울고 계신 거예요.”

그녀는 떨고 있는 작은 몸을 꼭 안아주었다.

마치 엄마의 품처럼 포근한 감각에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제인, 제인….”

“대체 무슨 일이시길래….”

“내일이 8황자의 사형식이야.”

순간 제인은 입을 잘못 놀린 듯싶어 화들짝 놀랐다.

지금 그녀가 슬퍼할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걸 다시 상기시키다니.

“네…. 들었어요….”

“난 걔 그렇게 못 보내. 그가 죽는 걸 어떻게 눈앞에서만 지켜볼 수가 있어.”

“아가씨….”

제인은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비에 젖은 참새처럼 떠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제인, 나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제인 역시 마음 같아선 그 살인마를 당장에라도 지옥 불구덩이 속에 넣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모시는 전하께서 이렇게 슬퍼하니 이 방법이라도 쓸 수밖에.

“아가씨, 방법이 하나 있어요.”

“…뭐?”

엘레나는 놀라서 곧바로 몸을 뗐다.

눈물로 젖은 푸른 눈은 일순간 이채를 띠었다.

“그게 뭐야. 어서, 어서 말해줘.”

제인은 침을 한번 꼴깍 삼키더니 기백이 넘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면권을 사용하세요.”

“사면…권….?”

엘레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 황족에겐 누구나 한 번씩 사면권이 있어요. 평생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죠.”

“…….”

“예전에 황후 폐하께서 집행식 때 사면권을 사용하는 걸 봤어요. 물론 반발은 거셌지만 그래도 황족이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죠.”

“사면권….”

엘레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세 글자를 읊조렸다.

이 방법이라면 에이든을 살릴 수 있다는 거지.

“네, 아가씨. 평생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그래도 8황자님을 지키고 싶으시잖아요.”

제인은 어깨를 붙들어 잡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진심이 담긴 눈빛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응, 맞아….”

“그럼 결정하세요, 아가씨. 이건 오롯이 아가씨의 선택에 달렸어요.”

* * *

“제인이….”

“응, 제인이 없었더라면 나는 내게 사면권이라는 게 있는 줄 모른 채 에이든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겠지.”

“그래.”

잠시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침묵의 늪에서 엘레나는 천천히 입을 뗐다.

“당신도, 알고 있었지.”

“…….”

에이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것일 테지.

“당신을 탓하지 않아. 당신이 그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엘레나.”

“이제 됐어. 에이든이 죽지 않았으니 된 거야.”

그 역시 미안한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은 섭섭하긴 하지만 실망스럽진 않았다.

누구든 똑같은 상황이면 그런 선택을 했을 테니까.

엘레나는 슬픔이 섞인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 더 이상 슬퍼하지 않을 거야.”

“…….”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고 에이든은 에이든대로 살아가겠지.”

“…….”

“그러니 이제 울지 않아, 카루스….”

엘레나는 남아있는 눈물을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한참을 울어댄 탓에 몸이 불규칙적으로 떨렸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분히 말했다.

“강해질 거야. 더 이상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도록.”

“그래.”

데카루스는 볼록 튀어나온 이마 위에 천천히 입술을 포갰다.

촉촉한 살덩이가 닿자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퍼졌다.

엘레나는 그의 입술에 살짝 입맞춤한 뒤 힘차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점심 먹고 싶어. 아침 못 먹어서 배고파.”

“그래.”

* * *

“날씨가 좋네.”

“그러게.”

눈이 부실 정도로 따사로운 햇살에 엘레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본 데카루스는 가져온 챙이 넓은 모자를 씌워주며 햇빛을 가려주었다.

“뭐야, 이런 건 언제 챙겨왔어.”

데카루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없이 걸었다.

조금 신이 난 엘레나는 그에게 안기듯 팔짱을 와락 꼈다.

“이따가 산책도 가자, 카루스. 오랜만에 걷고 싶어.”

“응.”

오늘도 시종들에게 테라스에 식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분주히 움직이더니 음식이 담긴 3단 카트를 끌고 왔다.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전하.”

“응, 고마워.”

테이블에는 황실에서 만든 화이트 와인과 아뮤즈 부쉬인 가리비 관자 요리.

그리고 견과류, 베이컨, 치즈가 올라간 로메인 샐러드, 식전 빵과 버터, 오리 스테이크가 준비되었다.

엘레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눈을 반짝였다.

“완전 맛있겠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시종이 따라주는 와인으로 식욕을 돋우고 빵에 버터를 발라 와구와구 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카루스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음, 맛있어. 여기가 대공저보다 밥이 더 잘 나와.”

“대공저 요리사를 바꿀까.”

“아, 아니. 그런 소리가 아니야. 그냥 여기 음식이 더 맛있다고.”

진지한 그의 말에 당황한 엘레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 때문에 멀쩡한 요리사를 해고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간 저 성격은 알아줘야 해.

앞으로 대공저랑 비교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이러다가 누구 한 명 목 날아가겠어.

“자 이거 먹어 봐, 카루스.”

엘레나는 포크로 잘 익은 관자를 찍으며 그의 입 앞에 갖다 댔다.

그러자 그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뒤로 뺐다.

주위에선 또 시녀들이 호들갑 떠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바로 복수라는 거다!

“내가 먹을게.”

“아니야. 먹어 봐. 맛있다고.”

“엘레나.”

“먹어 보라니까!”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작은 입에 쏙 들어간 관자를 오물오물 먹는 게 나름 귀여웠다.

“어때? 맛있지? 내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지?”

“그래.”

그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반응했다.

영혼 없는 그의 반응에 조금 뾰로통해진 엘레나는 다시 한번 도전했다.

“자, 이것도 먹어 봐.”

“엘레나, 그만.”

“당신이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어.”

“하….”

그는 한껏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입을 벌렸다.

입 안에 쏙 들어간 야채 샐러드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줄이야.

엘레나는 속으로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활짝 웃었다.

“잘 먹네!”

“어머, 카루스?”

그때 어디선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일순간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웬 엄청난 미인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 미엘르. 당신이 여긴 어떻게.”

서로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조금은 친한 사인가 보다.

게다가 여자는 ‘카루스’라며 그의 애칭을 불렀다.

엘레나는 괜히 안 보는 척 흘낏흘낏 눈알을 굴렸다.

진한 금발에 굵은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 그리고 진한 푸른색 눈.

게다가 쭉쭉 뻗은 키에 들어갈 덴 다 들어가고 나올 덴 다 나온 몸매까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웬만한 미녀는 다 압살할 만큼 엄청난 미인이었다.

“전승 축하 사절단으로 왔답니다. 대공께서 여기 이렇게 계실 줄은 몰랐네요. 그것도 이렇게 아리따운 여성분과 함께….”

“황태녀 전하십니다.”

“아, 황태녀 전하를 뵙습니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전하. 저는 카나리아의 황녀 미엘르 카프로나라고 합니다.”

엘레나는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반겼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적대감이 느껴졌다.

“아,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카프로나 황녀.”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그녀는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허리를 숙였다.

한 번도 이 여자를 본 적이 없는데, 일곱 살 이전에 봤던 사람일까.

엘레나는 경계심을 감추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 고마워요.”

그러자 미엘르라는 여자는 그에게 팔짱을 끼며 환하게 웃었다.

데카루스는 남이 손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게다가 여자가 팔짱을 끼는데도 가만히 있다니.

왠지 모르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나저나 우리 오랜만인데 이따가 차 한 잔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아, 선약이 있어서.”

데카루스의 말에 순간 그녀는 엘레나를 응시하며 눈을 크게 떴다.

“선약이요? 아, 황태녀 전하와의 선약? 그럼 전하께서도 함께 참여하시죠. 어떠신가요?”

“이미 한 약속을 취소할 순….”

“아, 괜찮아요. 그래요. 그러죠.”

“엘레나.”

엘레나는 최대한 높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여유를 풍겼다.

저 수상한 여자에게 왠지 지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또 뭐 하는 여자인지, 그와는 무슨 사이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럼 유리온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여자는 티끌 없는 미소를 풍기며 저 멀리 사라졌다.

순간 마음속에 차오르는 이상한 기분에 엘레나는 대번 물었다.

“누구야?”

“미엘르.”

그건 아까 들어서 알고 있거든!

하여간 이 남자 말이 안 통하는 건 알아줘야 해.

엘레나는 테이블을 꽉 잡고 물어뜯을 듯이 그를 노려봤다.

“아니. 어떤 여자냐고.”

그러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포크를 들었다.

“예전에 아버지 때문에 어쩌다 알게 된 사이야.”

“사귀었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