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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04화 (104/117)

104화.

오늘도 잠을 한숨조차 자지 못했다.

악몽처럼 맴도는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살갗을 파고드는 유리 조각 소리, 고통에 신음하는 소리, 엘레나라며 부르는 목소리.

이 모든 게 고장 난 비디오테이프처럼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게다가 어젯밤은 에이든에 대한 처분이 결정되는 날이었기에 더욱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전하, 기침하셨습니까.”

“…….”

대답이 없자 미동조차 없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 내민 제인은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쭉 내밀었다.

“제인, 들어와.”

“아, 네. 아가씨!”

요 며칠 새 대답조차 없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하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제인은 후다닥 달려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으신데….”

“아니야, 괜찮아.”

“오늘도 못 주무셨어요?”

“응.”

제인은 한숨을 푹 내쉬며 침대 가에 앉았다.

맞닿은 손이 온몸을 따듯하게 물들였다.

“이렇게 못 주무시면 어떡해요. 걱정되게.”

“…….”

“그래도 어제 저녁 식사는 하셨더라고요. 입맛에 좀 맞으셨어요?”

“응.”

엘레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햇빛에 비친 연갈색 머리카락과 연갈색 눈이 참 어여뻤다.

“대공님께서는 곧 오실 거예요. 오늘은 그럼 모처럼 테라스에서 식사하시는 게 어떠세요?”

“그래.”

제인은 신이 난 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장례식 이후로 스스로 밥을 먹겠다고 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생각만 해도 귀찮고 힘든 일이지만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엘레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먹지 못해서 말라비틀어진 몸이 볼품없었다.

물론 얼굴 역시 해골이 되었고 말이다.

“10kg는 빠진 것 같은데. 이게 가능한가.”

전생에선 아무리 굶고 운동을 해도 살이 빠지긴커녕 오히려 식욕만 폭발했는데.

역시 살 빠지는 덴 마음고생만 한 게 없는 건가.

엘레나는 짧게 조소를 흘리곤 옷장 앞에 섰다.

혼자 옷을 갈아입으면 분명 제인이 황태녀의 품격이니 뭐니 잔소리를 할 게 뻔했지만 오늘만큼은 남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수수한 거….”

매번 화려하고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으려니 진절머리가 났다.

그 무거운 옷을 끌고 다니는 것도 일종의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궁에만 박혀있을 테니 거추장스러운 차림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이걸로 할까.”

엘레나는 레이스와 보석이 없는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꺼내어 몸에 대었다.

핏기라곤 하나 없는 얼굴색을 환하게 밝혀주어 나름 시체같이 보이는 건 면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피식 잔웃음을 흘리곤 드레스를 입었다.

몸을 타고 흘러내린 잠옷이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살며시 문을 두드리는 노크가 들려왔다.

똑똑-

“잠깐만.”

아직 옷을 다 입지 않았기에 아무나 들여보낼 수 없었다.

몸을 재빨리 움직이려고 하자 고장 난 로봇처럼 팔다리가 삐거덕거렸다.

허둥지둥하는 꼴이 꽤 우스워 더더욱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데카루스의 목소리였다.

그의 음성을 듣자마자 머리에선 불이 났다.

옷을 입는 데 5분이 넘게 걸릴 줄이야.

이래서 드레스 대신 원피스를 입고 싶다는 것이었다.

“잠깐만.”

허겁지겁 옷을 차려입은 엘레나는 서둘러 방문을 열어주었다.

원래 같으면 밖에 있는 시종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했지만 대공저에서의 습관이 남아있는지 저도 모르게 문고리로 손이 갔다.

“흠.”

데카루스는 고개를 삐딱하게 틀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오늘 입은 옷이 이상한가 싶어 리본을 만지작거리자 그는 갑자기 그녀의 몸을 둘러업고 침대로 향했다.

“왜 이래…!”

그는 대답 없이 하얀 시트 위에 가녀린 몸을 천천히 뉘었다.

그러곤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잠 얼마나 잤어.”

뜨끔한 엘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 한숨도 못 잤다는 걸 말하면 또 억지로 재우려 할지도 모른다.

“한…. 3시간?”

“더 자야겠네.”

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씌우고 몸을 천천히 토닥였다.

아무래도 아기를 재우는 것처럼 그녀를 재우려는 모양이다.

“숨 막혀.”

그러자 그는 숨은 쉴 수 있게 이불을 살짝 내려주었다.

엄청나게 심각한 얼굴을 한 그의 모습이 조금 웃겼다.

“웃을 때가 아니야.”

“당신 얼굴이 웃겨.”

“안 되겠어. 오늘은 좀 많이 걸어야….”

똑똑-

“전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종의 목소리에 엘레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일순간 풍선처럼 몸이 저절로 공중에 붕 떴다.

“뭐야, 이게. 놔.”

“당신 쓰러질까 봐 걱정돼. 가만히 있어.”

“놔, 카루스! 창피해서 이러고 어떻게 다녀!”

갓 잡은 생선처럼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응, 괜찮아.”

“카루스!”

엘레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안긴 채 테라스로 나갔다.

이를 본 시종들은 화들짝 놀라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렸다.

또 간혹 볼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이도 있었다.

게다가 결혼은 언제 하느니 황태손은 언제 태어나느니 하는 이야기가 귀에 다 들렸다.

“내가 진짜 당신 때문에 못 살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거 못 봤어? 창피해서 이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라고.”

“잘생긴 남자가 직접 에스코트해주는 게 부러워서 그런 걸걸?”

“…….”

어처구니가 없는 그의 말에 엘레나는 입을 쩍 벌리며 가만히 멈춰 섰다.

데카루스는 별것 아니라는 듯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렸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위해 친절히 의자를 꺼내주었다.

“앉아.”

“네, 참 고맙네요. 잘생긴 대공 전하께서 은덕을 베풀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엘레나는 굽실거리는 연기를 하며 뭐라도 씹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데카루스는 의자를 끌어 그녀 옆에 안착했다.

“뭐야, 왜 갑자기 자리를….”

그는 아무렇지 않게 테이블 냅킨을 그녀의 허벅지 위에 깔아주었다.

그리고 포크를 들어 새빨갛게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찍어 입 앞에 갖다 댔다.

“자, 먹어.”

그의 행동에 주변에 있던 시녀들은 한 번 더 난리가 났다.

다들 못 본 척하면서 눈알 굴리고 있는 거 다 보입니다, 여러분.

안 들리게 말하려 하지만 여기까지 다 들린다고요!

“내가 알아서 먹을 수 있어.”

엘레나는 눈을 위로 한껏 치켜뜨며 그에 손에 있는 은색 포크를 쥐어 잡았다.

하지만 역시 호락호락하게 당할 데카루스가 아니었다.

그는 무슨 아이와 비행기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공중으로 높이 올렸다.

“먹어.”

“내가 먹는다니….”

입을 벌린 순간 조그마한 방울토마토가 입 안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아, 몽데!(아, 뭔데!)”

“잘 먹네.”

그의 아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애초에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란 인간을 어떻게 이기겠어.

엘레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토마토를 와그작 씹었다.

새콤달콤한 방울토마토가 입 안에서 펑펑 터져 입맛을 돋우었다.

그는 잘 먹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강아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나도 손발 있거든. 당신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자, 먹어.”

이번에 그는 수프를 떠 입 앞에 대기시켰다.

무슨 발레파킹 하는 것도 아니고, 음식 파킹이야?

엘레나는 다시 한번 깊게 들이켠 숨을 내쉬며 입을 벌렸다.

오늘따라 맛이 좋은 단호박 수프가 입 안을 맴돌며 미각을 자극했다.

“이것도.”

거기에 더해 그는 갈색빛이 감도는 갓 구운 빵까지 입 안에 욱여넣었다.

수프와 잘 어울리긴 했지만 입이 가득 차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붕어가 된 엘레나를 흐뭇하게 쳐다보던 데카루스는 빵 한쪽을 집어 자기 입에 넣었다.

따사로운 햇빛과 솔솔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만개한 꽃들.

이 모든 게 적당했다.

또 부끄럽지만 그와 이렇게 황궁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 또한 즐거웠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뇌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절대, 절대로 잊으면 안 되는 것.

“…그나저나, 에이든의 처분은 어떻게 됐어?”

분명 어제저녁에 위원회 회의에 들어갔으니 그에 대한 처벌이 결정 났을 것이다.

그는 당연히 그녀가 모르는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단 한 번도 언질 준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어영부영 넘기려 했겠지만 엘레나에겐 통하지 않았다.

황궁에 온 이후로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정보들이 많았기에.

“말해줘.”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모르는 척하려 했지만 이미 알아챈 엘레나를 속일 순 없었다.

“신경 쓰지 마.”

“카루스.”

“당신이 신경 쓸 일 아니야.”

“당신이 말 안 해줘도 난 알아낼 방법이 있어.”

그녀의 표정은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보다 더 굳건했다.

그 역시 끝까지 숨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말하게 될 줄도 몰랐다.

데카루스는 한숨을 푹 쉬며 차마 꺼내기 힘든 두 글자를 뱉었다.

“사형.”

일순 엘레나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속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다시 말해.”

“엘레나.”

목구멍에선 듣기 싫은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엘레나는 고개를 떨구곤 두 눈을 꼭 감았다.

몸을 떨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모습이 꼭 강풍에 홀로 버티는 나뭇가지 같았다.

“집행 날짜는?”

“내일.”

“…뭐?”

엘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형 집행은 보통 심의 결과 발표 일주일 뒤에 진행된다.

한데 결과 발표 이틀도 채 되지 않아 형 집행이라니.

“내일로 결정 났어. 나도 최대한 늦추려 해 봤지만 소용없더군.”

“막아야 해.”

엘레나는 의자를 밀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얄팍한 의자는 힘없이 쓰러져 바닥을 뒹굴었다.

“이미 황제께서 결정하신 사안이야.”

“아니야. 아니야….”

“엘레나.”

엘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황제께 가서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막아야 한다.

“지금, 지금 가 봐야겠어. 살려달라고 빌면 어떻게든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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