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불행은 언제나처럼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바보처럼 눈치채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
“엘레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
또 그 예감은 꼭 나쁜 일에서만 확실히 들어맞는다.
“당신….”
이 세상에 부모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자길 버린, 자길 죽이려 한 부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건 아마 상상할 수조차 없겠지.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경비병!!!”
새하얀 목에 박힌 투명한 유리 조각을 타고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잔뜩 구겨진 얼굴엔 원망도 증오도 고통도 아닌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피 칠갑이 된 손은 유리 조각을 목구멍 깊숙이 욱여넣었고 빨갛게 핏줄이 선 눈알은 여전히 엘레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여전히 입매를 올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 사이로 잘게 주름이 졌다.
유리창 앞, 손 받침대를 간신히 잡아 몸을 지탱하는 모습이 버거워 보였다.
“당신 대체….”
엘레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뗐다.
그리고 거의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몸을 떨며 유리창을 두드렸다.
반복적으로 들이쉬고 내쉬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뭐 하는 거야…. 대체 뭐 하는 거냐고….”
“이제 보니…. 날 많이 닮았구나….”
그녀는 새빨간 손으로 유리창에 비치는 엘레나의 얼굴을 만졌다.
어느새 피범벅이 된 투명한 창으론 그 작은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하지 마…. 곧 의원이 올 거야….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마.”
“넌 어려서부터…. 날 아주 잘 따랐지…. 엄마, 엄마 하면서….”
“말하지 말라고….”
“왜 죽기 전에 그 모습이 생각나는 걸까…. 그토록 너를 미워했는데….”
그녀는 목 주위를 잡고 얼굴을 찌푸렸다.
손 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온몸을 적셨다.
고통 속에서도 시선의 끝은 여전히 엘레나를 향해있었다.
“하지 마, 제발….”
“아니, 어쩌면 널 죽도록 사랑했을지도….”
굵은 기침을 하자 유리창에는 빨간 피가 흩뿌려졌다.
덜덜 떨리는 손이 곧 마지막임을 알려주는 듯했다.
“잘 컸구나, 내 새끼.”
털썩-
그녀는 마지막 말과 함께 힘없이 쓰러졌다.
붉게 물든 죄수복 위엔 작은 의자가 나뒹굴었다.
“아아아아악!!!”
“엘레나!”
국경선처럼 둘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창 사이로 희비가 갈렸다.
뒤늦게 도착한 의원은 그 자리에서 직접 응급 처치를 했다.
하얀 거즈로 목 주위를 닦아내고 은색 핀셋으로 보이지도 않는 유리 조각을 집었다.
하지만 워낙 깊숙이 박힌 터라 꺼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엘레나는 바닥에 쓰러져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목에서 쇳소리가 날 만큼 꺽꺽 울어 젖혔다.
보다 못한 데카루스는 그녀를 품에 안아 일으켰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어…. 나는. 나는….”
그렇게 황후, 아니 폐황후는 죽었다.
사인은 자살, 40살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길거리엔 그녀를 추모하는 검은 깃발이 달렸다.
그녀를 추종하던 귀족들은 일주일간 검은 옷을 입고 다녔고 아무리 폐황후라도 예우를 지키기 위해선 국장을 해야 한다며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황제파의 강력한 반대로 탄원서는 기각되었고 결국 황궁 내에서 조촐한 장례를 치렀다.
그녀의 시신에 관한 문제도 뜨거운 논쟁 거리로 자리 잡았다.
시신을 황가의 유택에 안치해야 할지 아니면 일반 묘지에 안치해야 할지 논란이 거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녀 역시 황실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황가의 유택에 안치되었다.
“엘레나, 벌써 며칠 째야.”
“…….”
그녀의 장례 후 엘레나는 밥 한 끼조차 먹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한 지 벌써 5일째, 먹은 거라곤 물 한 모금밖에 없었다.
“조금만 먹어. 당신 이러다 정말 죽는다고.”
“…….”
“엘레나.”
“…….”
데카루스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매일같이 황궁에 들렀다.
오죽하면 대공이 거처를 옮겼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성에도 엘레나는 나아질 기미는커녕 더 악화하기만 할 뿐이었다.
“한 입만이라도 먹어.”
“…….”
“제발, 엘레나.”
잠은커녕 말조차도 하지 않는 그녀는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있기만 할 뿐이었다.
푸른 눈동자는 회색빛이 감돌 만큼 탁해졌고 피부는 핏기가 가셔 창백했다.
“이리 와.”
데카루스는 그녀를 억지로 끌어안아 밖으로 나갔다.
따듯한 햇볕을 쐬고 걷다 보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이대로 방 안에만 갇혀있으면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정원에 지금쯤 꽃이 많이 피었을 거야.”
“…….”
그녀의 몸은 깃털보다 더 가벼웠다.
원래도 가벼웠지만 워낙 먹지 않아 살이 빠진 모양이다.
엘레나는 눈이 부신 듯 살짝 눈을 찌푸렸다.
“눈부셔?”
그럴 줄 알고 가져온 챙이 넓은 모자는 꽤 유용했다.
머리에 씌워놓으니 더 이상 눈을 찌푸리지 않는 게 퍽 귀여웠다.
엘레나의 궁에서 정원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하긴 예전에 황후가 그녀를 위해 일부러 가까이에 정원을 만들었었지.
“꽃이 많이 폈어. 대공저보다 더.”
엘레나는 여전히 생기 없는 눈동자로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시체 같은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결국 한 차례 씹어 삼켰다.
“자.”
데카루스는 살며시 벤치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앉아서 조금은 버틸 줄 알았지만 곧 맥없이 쓰러졌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한 채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만 흐른 뒤, 데카루스는 입을 뗐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 눈앞에서 지켜봤어.”
“…….”
“지하 서재에서 목을 매셨거든. 내가 11살 때.”
엘레나는 그의 말에 천천히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아픈 상처인 부모님 얘기를 직접 꺼낼 줄은 몰랐기에.
“그것도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바로 직후에.”
“…….”
“당신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지 잘 알아. 아마 그 누구보다도 더.”
데카루스는 가느다란 팔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당신이 죽을 만큼 아파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
“나처럼 그렇게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미동조차 없던 엘레나는 살며시 고개를 틀어 그를 바라보았다.
미약한 목소리가 허공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어떻게 견뎠어.”
“…….”
“어떻게, 이 끔찍한 아픔을 견딜 수가 있었어….”
엘레나는 몸을 떨며 천천히 흐느꼈다.
가녀린 여체가 비 맞은 참새처럼 파르르 흔들리자 데카루스는 손에 힘을 주었다.
“난 견디지 못했어. 아니, 견딜 수 없었지.”
“…….”
“그 어린 나이에, 주변엔 믿을 사람조차 없는데 어떻게 견딜 수가 있겠어.”
데카루스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두어 번 비볐다.
체념한 듯한 목소리에선 왠지 모를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 당신만큼은 절대 무너뜨리지 않을 거야.”
그는 가녀린 손을 꼭 잡아 쥐며 볼록 튀어나온 이마에 키스했다.
엘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이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절대, 당신만큼은.”
엘레나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살랑 부는 오뉴월 바람에 붉은 장미 한 송이가 그의 무릎에 떨어졌다.
수십 개의 꽃잎이 제자리를 지키려는 듯 오밀조밀 서로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장미를 주워 창백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봐봐.”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귓가엔 웬 꽃송이가 꽂혔다.
“예쁘다.”
귓가에 내려앉은 붉은 장미는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에 혈색을 주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그녀가 귀여웠는지 옅게 미소를 띠며 분홍빛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뭐야, 이게….”
엘레나는 손을 들어 그가 꽂아준 장미를 살포시 만졌다.
솜털처럼 보드라운 꽃잎이 손가락에 닿았다.
“당신 같아서.”
저도 모르게 터진 희미한 잔웃음에 데카루스는 살짝 미소 지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차분히 정리해준 그의 손에선 온기가 느껴졌다.
코를 간질이는 꽃가루 탓에 재채기를 하자 그는 사뿐히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 이제 갈까?”
* * *
“저녁은 꼭 챙겨 먹어. 내일 검사할 거야.”
엘레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렇게 해야 그가 돌아갈 것 같았기에.
“어서 가. 더 늦기 전에.”
“알았어.”
그 역시 말로는 그렇다고 했지만 걱정이 돼서 통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비쩍 마른 토끼 같은 그녀가 쓰러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었다.
“곧 식사 올 거야. 제인에게 말해두었으니까.”
“응.”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볼록 튀어나온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그러곤 머리를 두어 번 세게 쓰다듬더니 문밖으로 사라졌다.
“휴….”
그가 나가자마자 엘레나는 다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눈을 감을 때마다 황후의 모습이 생각났다.
피를 토하며 투명한 유리 조각을 목에 박아대는 모습.
꿈에서조차 그 장면이 반복되어 잠도 잘 수 없었다.
게다가 눈을 떠도 허상처럼 황후가 보이니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라져, 제발.”
엘레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웅크렸다.
한시라도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베로니카….”
그녀를 엄마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녀가 죽길 바랐고 평생 고통 속에서 살길 바랐다.
하지만 이젠 그랬던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그녀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천륜이란 건 뭐길래 사람을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
겨우 핏줄 하나 이어져 있다는 이유로,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울고 웃게 만드는 이 ‘엄마’라는 짧은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더 이상 소리 내어 울 힘조차 없었다.
그저 이대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럼 이 모든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까.
소리 소문 없이, 흔적조차 없이 심장에 새겨진 상처가 나아지지 않을까.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