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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02화 (102/117)

102화.

“아, 그러네. 어쩌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엘레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마차가 돌에 부딪칠 때마다 기댄 어깨 위로 머리가 통통 튀었다.

“이번 주에 바빴잖아. 후계자 수업도 시작했고.”

데카루스는 손가락을 접으며 굳이 눈으로 일정을 확인시켜주었다.

손병호 게임 하는 것도 아니고 손가락이 하나씩 접혀 갈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응…. 그렇지. 아 근데 점점 진짜 내가 황제라도 될 것 같은 기분이야.”

엘레나는 입술을 쭈욱 내밀며 툴툴거렸다.

요새 조금 마음이 온전치 못하다.

갑자기 일어난 모든 일 덕분에 불안증이 생긴 것 같다.

또 순식간에 좋은 일 혹은 나쁜 일이 일어날까 봐.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황제라니.

이건 갑자기 대통령이 되라는 말과 똑같다.

그것도 일반 시민보고 그런 중책을 맡으라니.

병아리보고 사자가 되라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다.

“당신밖에 없잖아.”

“당신이 있잖아.”

“그건 당신이 없을 때 얘기고.”

“그냥 당신이 하면 안 돼?”

“엘레나, 이건 소꿉놀이가 아니야.”

그는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위로라도 받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하여간 공감 능력 없는 건 여전하다니까.

“그래, 됐다. 됐어.”

“또.”

“뭐.”

엘레나는 세모로 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는 한숨을 푹 쉬며 팔을 세게 끌어당겼다.

“좋은 일이잖아. 적통이 황제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부담스러워. 당신은 원래 대공이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난 아니라고.”

“엘레나.”

“왜.”

“지금 당장 되라는 게 아니잖아. 적어도 2, 3년은 걸릴 거야. 대신들이 자질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자질 문제 거론하고 황태녀 박탈! 이런 건 없나?”

데카루스는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렇게 도착한 황궁엔 시종들과 위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또 황태녀 전하를 반기러 우글우글 몰려온 것이겠지.

“지겨워.”

“당신들을 보좌하러 온 사람들이야.”

“그래,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다고.”

힘이 다 빠진 엘레나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시종들은 모두 고개를 푹 숙이며 늘 그렇듯 합창을 했다.

“오셨습니까, 황태녀 전하.”

“그래….”

이렇게 열정적인 사람들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이 모든 무리들이 전부 황태녀를 위한 거라니.

정말 징글징글하다.

“휴….”

“황태녀 전하는 내가 모시고 가겠다. 모두 돌아가도 좋아.”

웬일로 이 인간이 기특한 짓을 한담?

안 그래도 시종들 꼴도 보기 싫었는데 직접 다 물려주다니.

“잘했어, 카루스.”

손을 쭉 뻗어 강아지를 만지는 것처럼 쓰다듬자 그는 손을 탁 잡았다.

“하지 마.”

“왜.”

“밖에선 금지야.”

“참나.”

대공 체면이라도 살리겠다는 건가.

그래, 그 잘난 대공이 밖에서 쓰담쓰담 당하는 장면을 보면 꼴이 우습겠지.

엘레나는 입꼬리를 비죽 늘리며 반듯이 걸었다.

“드레스가 불편해. 원피스가 입고 싶어.”

“좋은 점 찾았네.”

“무슨 소리야.”

“당신이 황제가 되면 그 제도를 바꿀 수가 있어.”

엘레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그거 하나 바꾸자고 황제가 되라는 건가.

“고작 그거 하나?”

“또 하나는 잘생긴 국서를 들이는 것일 테고.”

그의 당당한 말본새에 어이가 없었다.

잘생긴 건 맞지만 자기 입으로 자기가 잘생겼다고 하다니.

이 인간도 얼굴에 깔린 철판만 세면 몇백 개는 될 것이다.

“됐네요. 대공 전하.”

* * *

황궁, 지하 감옥.

“황태녀 전하 그리고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 어서 문을 열어줘.”

“예.”

이번에 황궁 지하 감옥도 보수를 했다.

그 이유는 에이든이 탈출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그를 위한 특수 감옥이 필요했다.

그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왔다.

평생 에이든을 감옥에서 볼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나온다.”

지하 감옥 역시 한국의 면회 제도처럼 따로 면회방을 만들고 간수가 그 옆을 지키는 식으로 보수했다.

대신들은 전부 다 이런 좋은 생각을 대체 어떻게 했냐느니, 정말 영민하시다느니 하는데.

응, 미안한데 이 머리에서 나온 건 아니고 그냥 고대로 갖다가 베낀 거란다.

“레나.”

투명한 유리창 사이로 바싹 마른 에이든의 모습이 보였다.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넌 나는 안 보이나 봐.”

“아, 미안. 형도 있었네.”

그들은 여전히 사이가 안 좋다.

분명 이 기나긴 싸움이 끝나면 사이도 좋아질 줄 알았는데 예전보다 더 안 좋은 것 같다.

“이렇게 네 얼굴 보니까 좋다.”

엘레나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에이든은 씁쓸하게 눈꺼풀을 접으며 코웃음 쳤다.

‘나도 네 얼굴 봐서 좋아.’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를 볼 때마다 양가적인 감정이 마음속을 맴돌았으니까.

분노와 배신감, 허탈함, 애달픔, 안타까움, 슬픔.

말로는 한 번에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회오리쳤다.

“생활은, 좀 어때?”

“괜찮아. 근데 밥이 맛이 없어. 레나, 네가 좀 말 좀 해줘.”

“그래. 말해 볼게. 아픈 데는 없고?”

“응. 그리고 아파도 너만 보면 싹 낫는 것 같아.”

에이든은 예쁜 입꼬리를 쭉 올리며 활짝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거짓 없는 미소에 마음 한편이 조금 따듯해졌다.

“거짓말은 청산유수야.”

“거짓말 아니야. 진짜야.”

“됐네요.”

잠시 침묵이 흐르자 가만히 있던 데카루스가 입을 열었다.

“네 최종 처분은 아직 결정 나지 않았어. 위원회에서 조율 중이긴 한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사형.”

에이든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장내는 조용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겠어?”

“에이든….”

“왜, 반란죄에 반역죄, 거기에 황족시해죄, 살인죄.”

“…….”

“화려하잖아.”

에이든은 이 상황이 즐겁기라도 한 듯 손가락을 꼽았다.

“그런 생각 하지 마. 사형은 아닐 거야. 최소 무기 징역이라도….”

“레나. 변하는 건 없어. 아무리 너라도 이건 바꿀 수 없으니까.”

알고 있다.

아무리 황태녀라도 그의 처분에 손을 댈 수 없다는 거.

그건 황태녀가 아닌 황제의 권한이니까.

“아직 한참 남았어. 내가 뭐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

이런 상황에서조차 태평한 그가 미웠다.

그렇게 많은 죄를 지어놓고 별거 아니라는 듯 무덤덤한 그가 미웠다.

마음속에선 천사와 악마가 서로를 물어뜯었다.

분명 죗값을 치르라고 한 것은 그녀였지만 목숨을 대가로 치르게 하고 싶진 않았다.

“황태녀 전하, 약속된 면회 시간이 끝났습니다.”

“아, 벌써?”

에이든은 아쉬운 듯 유리창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지문이 눈꽃처럼 하얗게 묻어났다.

“그래, 그럼 다음 면회자를 대기시켜줘.”

“누구?”

“…황후.”

그는 눈을 번뜩 뜨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돌아선 에이든의 모습은 조금 초라해 보였다.

어쩌면 잘 가라는 짧은 인사말조차 없이 그를 보낸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

“왜 울어.”

데카루스는 살며시 그녀를 안아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새하얀 셔츠는 어느새 투명하게 젖어버렸고 엘레나는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카루스, 난….”

엘레나는 목이 멘 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난, 저렇게 에이든 못 보내.”

꾸역꾸역 참아왔던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폭발했다.

그의 앞에서 울지 않으려 얼마나 애썼는지 모르겠다.

새하얀 손등은 어느새 손톱자국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에이든이 죽으면 나도 죽어버릴지도 몰라.”

데카루스는 이를 아득 깨물었다.

이건 분명 노아를 향한 분노와 엘레나를 향한 안타까움일 테다.

그 역시 노아를 보면 가슴이 저렸다.

비록 친동생은 아닐지라도 너무나도 아끼던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를 죽였다는 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런 비극을 만든 그를 받아들이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끼익-

그때, 저 멀리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들어오는 황후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다.

늘 고고하게 올린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이었으니까.

“더 이상 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황후는 꽤 귀찮았는지 표정을 왈칵 구겼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삐딱하게 의자에 앉아 눈을 치켜뜬 모습이 익숙했다.

“왜, 하루하루 이 늙은이가 죽어가는 꼴이라도 보고 싶었나.”

“…….”

“그것도 아님 이 어미가 보고 싶었던 것이냐, 엘레나.”

앙칼진 미소를 흘리는 그녀의 얼굴에선 더 이상 독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한 여자만 남아있을 뿐.

“자식의 도리를 다하러 온 것뿐입니다. 착각은 하지 마시죠.”

그러자 그녀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도리, 도리라. 그래, 내 딸. 이 끔찍한 어미를 원망하면서도, 역시 핏줄은 어쩔 수 없는 건가 보구나.”

엘레나는 괴기하게 웃는 그녀를 바라보면서도 무표정을 유지했다.

“자살 소동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하, 역시 황궁은 소문도 빠르지.”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이 어미를 걱정하는 것이냐, 엘레나.”

그녀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감격에 겨운 표정을 연기했다.

엘레나는 손바닥이 패도록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아니. 당신은 자살할 자격도, 권리도 없어. 그러니 당당히 죗값을 치러. 그게 당신이 부모로서 해야 할 마지막 일이니까.”

그녀는 어이가 없었는지 배를 잡고 웃어 젖혔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난 죗값을 치를 만큼 잘못한 기억이 없거든.”

“…….”

“다 너. 너. 너, 엘레나,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잖니. 그러니 죗값을 치러야 할 사람은 너야, 엘레나. 태어난 죄. 이 세상에 나온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니.”

“닥쳐….”

방 안을 울릴 만큼 까랑까랑한 웃음소리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엘레나는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사람이 아니야.”

“그래, 더 분노해. 날 찢어 죽일 만큼 분노하고 미워해. 그래야 보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입꼬리를 길게 찢어가며 웃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불에 타 죽기 전 마녀의 모습 같았다.

“당신 뜻대로 일이 흘러가게 놔두진 않아.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당신을 지옥 불구덩이에 넣어버리고 싶지만. 난, 더, 더! 더!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말 거야.”

쾅-

엘레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뒤를 돌았다.

더 이상 그녀와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할 이야기도 없었다.

“가자, 카루스.”

돌아선 등 뒤에는 귀 아픈 웃음소리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엘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천천히 면회소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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