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허억.”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번뜩 눈을 떴다.
푸른 동산과 신 그리고 사과나무는 온데간데없이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엘레나?”
“데카…루스….”
새하얀 손가락을 뻗어 그의 얼굴에 갖다 댔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살며시 손을 쥐어 잡았다.
“엘레나, 엘레나.”
“카루스….”
하염없이 흔들리는 새빨간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속눈썹 사이로 떨어지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카루스.”
데카루스는 손을 부여잡고 눈을 꼭 감았다.
“대체 어딜 갔다 이제 온 거야.”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였다.
짙은 목소리 사이엔 원망과 그리움이 뒤섞였다.
“당신이 죽은 줄만 알았어. 그래서, 그래서….”
“…….”
“당신마저 잃을까 봐. 난….”
엘레나는 천천히 일어나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작은 떨림이 몸속 깊숙이까지 전달되었다.
“내가 왜 죽어. 평생 당신이랑 같이 있을 건데.”
“…….”
“이제 큰일 났어. 내가 절대 당신 놔주지 않을 거거든.”
데카루스는 여린 몸을 있는 힘껏 세게 껴안았다.
그에게선 빛바랜 사진첩처럼 오랜 그리움이 느껴졌다.
“당신도 절대 내 곁에서 도망 못 가.”
그는 엘레나의 어깨에 천천히 머리를 비볐다.
실타래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살갗을 간질였다.
“사랑해, 카루스.”
살짝 떨어진 몸 사이로 익숙한 기류가 감돌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서로를 마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애처로운 눈빛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구나.
그의 입술이 포근히 맞닿았다.
구름처럼 부드러운 입술은 천천히 움직이며 둘만의 사랑을 속삭였다.
따듯한 기운이 입 안 전체에 파고들었다.
이 시간이 오래도록 끝나지 않길 바랐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사람과 함께 영원히.
쾅-
“대공 전하!!!”
하지만 시간은 그 짧은 재회조차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거칠게 열린 문을 쥐어 잡던 행정관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들어왔다.
“대체 또 무슨 일이야.”
“아니, 그, 하던 거 마저….”
하지만 그도 눈치라는 건 있었는지 문을 천천히 닫으며 고개를 내뺐다.
“됐어. 말해.”
데카루스는 눈을 시퍼렇게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목을 두어 번 가다듬고 기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전국에 있는 일로트1)들이 전부 황태녀 전하를 위해 민간용병으로 자원했습니다. 무려 10만 명입니다. 10만 명!”
“일로…트…?”
“예, 전하!”
“리안드로….”
델리트 지역의 일로트 문제를 해결하러 갔을 때 만난 사내.
그 덕에 전국에 부당하게 착취당하던 일로트들을 해방시켰던 적이 있었지.
“설마 그 일 덕에….”
“예, 맞습니다. 황태녀 전하. 이건 전부 황태녀 전하 덕입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행정관은 허리를 연신 굽히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얼떨떨한 기분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자 데카루스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그래.”
“그럼 이 전쟁도 이제….”
“그래, 이대로라면 황제파의 승리야.”
“하….”
지긋지긋했던 전쟁이 드디어 막을 내리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엘레나는 벅찬 듯 가슴을 부여잡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30분 뒤 회의를 소집한다. 전부 다 모이라고 전해.”
“예, 전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행정관은 고개를 푹 숙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떠들썩했던 방 안은 어느새 적막으로 가득 찼다.
“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야?”
“일주일.”
“뭐?”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 당신.”
분명 굉장히 짧았던 시간이었는데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니.
손톱이 많이 자란 걸 보니 정말 시간이 오래 지났구나.
붕대가 둘둘 감겨있는 손목은 한눈에 봐도 많이 야위어 보였다.
하긴 밥을 먹지 않은 지 일주일이나 됐으니 자연히 살이 빠질 수밖에.
“식사를 준비하라고 할까?”
“아니, 이따가. 지금은 당신 보고 싶어.”
그는 눈 꼬리를 살짝 접으며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미소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근데 그렇게 슬펐어?”
“뭐가.”
“울었잖아, 당신. 우는 거 처음 봐서.”
그러자 그의 얼굴은 일순간 사색이 되었다.
무슨 말이라도 잘못했나 싶어 빤히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홱 돌렸다.
“왜 그래. 갑자기.”
팔을 죽죽 당겨 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수상해 살며시 고개를 기울여 보니 새하얗던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뭐야.”
“뭐가.”
“설마 당신 부끄러워하는 거야?”
참나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보네.
이 인간이 부끄러워할 줄도 알다니.
감정이 없는 로봇인 줄 알았는데 창피한 걸 느끼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무슨. 나 봐 봐. 맞잖아. 아이고, 우리 카루스 창피했쪄요?”
이런 희귀한 장면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볼 장면이었기에 지금이라도 많이 놀려둬야 한다.
안 그럼 나중에 분명 또 후회할 게 뻔해.
“그만해.”
“아, 그랬구나. 창피했구나. 우는 건 창피한 게 아닌데. 이를 어쩜 좋담.”
“그만하라니까.”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어, 카루스. 이건 생리적인 현상이잖….”
그 순간 그의 입술이 조잘거리던 입을 확 막아버렸다.
옴짝달싹할 수 없게 꽉 막힌 입술 탓에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만.”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빨갰다.
터진 화산에서 용암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뭐 이런 모습도 나름 귀여운데 본인은 싫겠지.
카메라라도 있으면 사진이라도 찍어뒀을 텐데.
“아쉬워라.”
“뭐가. 한 번 더 해줘?”
“아니, 뭐. 아니야. 당신 이제 회의 가봐야지. 늦겠다.”
* * *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지겹도록 기나긴 전쟁은 결국 일로트들의 출병으로 황제파가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저항하던 황후파는 백기를 들었다.
사상자는 총 5만 명, 그중 사망자가 3만 명으로 끝난 전쟁은 역대 발발한 내전 중 가장 규모가 큰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두 종파의 노력 덕에 전쟁의 외부 유출을 막아 민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주변지대는 전쟁이 끝난 뒤 보수공사에 들어갔다.
또 전쟁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일로트들에겐 막대한 포상금이 지급되었다.
종전 후 각 지역마다 황제파의 승전을 축하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벌어졌으며 용병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승리의 기쁨을 즐겼다.
“그럼 그 이후론요? 그 이후론 어떻게 됐는데요?”
“그 이후론 황제파가 황궁을 탈환하고 황후와 8황자는 황궁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 그리고 나 역시 황궁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아무래도 황제께서 몸이 쇠약하시다 보니 내가 정무를 돕게 됐거든.”
“멋져요!”
“멋지긴, 큼큼.”
“그럼 대공님과는 언제 결혼해요?”
“뭐?”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요망한 꼬맹이들!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어디서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저 조그마한 머리를 한 대 콩 때려줄까.
“맞아, 맞아. 예전에 엄마가 꼭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언니도 결혼해야죠!”
아이들의 아우성에 당황한 엘레나는 칠판 옆에 숨었다.
애들이 왜 이렇게 무서운지, 이러다 어른도 잡아먹게 생겼다.
“그, 그건. 나도 아직 몰라…. 아니, 난 결혼은 생각해 본 적도.”
“곧 할 거야.”
“뭐야! 당신이 여기 왜 있어.”
어디서 나타난 건지 갑자기 출몰한 데카루스 덕에 간 떨어질 뻔했다.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봤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태연자약했다.
“부부 사이에 당연한 거 아니야?”
“부부라니! 애들 앞에서 이게 무슨!”
엘레나는 널찍한 등을 팍팍 때리며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은 듯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왜, 애들도 알 건 다 알아.”
그의 말에 아이들의 환호성이 어린이집을 가득 채웠다.
“자, 얘들아. 조용히. 조용히 하자.”
“뽀뽀해! 뽀뽀해!”
설마 애들이 뽀뽀하란다고 뽀뽀하는 사람이 진짜 있을까.
하지만 역시나 이 머저리 같은 인간은 팔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미쳤어. 당신. 하지 마. 하지 마!”
엘레나가 손가락을 들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자 그 역시 천천히 다가왔다.
“기대에 부응해줘야 하지 않겠어.”
“당신….”
정말 있다.
뽀뽀하라고 진짜 뽀뽀하는 사람이.
덕분에 어린이집은 전쟁통이 되었고 아이들은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와아아!”
엘레나는 거칠게 손목을 잡고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당신, 미쳤어? 무슨 애들 앞에서!”
“왜, 애들이 좋아하던데.”
말이 안 통하는 건 여전했다.
그게 뭐 별거냐는 듯 말하는 저 입술을 아주 꿰매버리고 싶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무슨….”
“자, 이제 어린이집 시찰은 끝났으니 황궁으로 돌아가야지. 시간이 빡빡해.”
아참, 이제 에스텔 제국에도 어린이집이라는 게 생겼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많은 한부모 가정을 위해 한국의 어린이집 제도를 약간 변형해서 만들었다.
대학교에 학부를 만들고 임용시험과 매 분기 어린이집 감사 그리고 매년 이뤄지는 교사 능력 검증 시험까지.
일단은 공립형으로 각 공국은 하나씩 필수적으로 분원을 설치해야 한다.
아직 사립형으로 전환하기엔 데이터가 적어 위험 부담이 크다.
그래서 일단 향후 2, 3년간 정황을 지켜본 뒤 사립형 어린이집 건립을 허가할 계획이다.
“힘들어. 피곤해. 못 해 먹겠어. 몸이 네 개라도 모자라.”
“그래도 당신이 좋아서 하는 일 아니야?”
“응, 뭐 그렇지….”
물론 황태녀니까 사람을 시켜 대신 시찰을 보낼 수도 있을 테다.
하지만 어린이집만큼은 다른 사람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꼼꼼히 직접 확인하고 둘러봐야 폭력이나 학대 같은 문제를 잡아낼 수 있을 테니까.
“잘하고 있는 건질 모르겠네…. 일만 이것저것 벌여놓은 것 같아.”
“잘하고 있어.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서 가장 빛나, 당신.”
“정말?”
“응.”
“그래, 그럼 됐어. 당신이 인정해주니까 기분 좋다.”
데카루스는 피식 웃더니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머리카락과 맞닿은 손길에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오늘 면회 날인가?”
1) 일로트 : 노예 계층을 일컫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