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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새장엔 열쇠가 없다-100화 (100/117)

100화.

“내게서 더 이상 소중한 사람들을 빼앗아 가지 마.”

칼날이 손목 깊숙이 들어올수록 핏줄기는 더 굵어졌다.

새하얀 팔에서 흐르는 핏물은 비처럼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레나, 제발….”

“난 네가 괴물이 되어가는 꼴을 지켜볼 수만은 없어, 에이든.”

엘레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그럼에도 내가 이러는 이유는, 아직도 네가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이야.”

“엘레나….”

“그러니 네 죄를 씻어내고 그 대가를 받아.”

그 순간 대기하던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긴 채 에이든을 둘러쌌다.

저번과 똑같은 대치 상황에 그는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항복하시죠, 8황자 전하. 더는 당신이 물러날 곳은 없습니다.”

“…….”

“끌고 가.”

위병들이 사라지자마자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끌려가는 그 순간에도 에이든의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를 보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엘레나!”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에이든.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너를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햇살같이 맑은 네 미소를 곁에 두고 볼 수 있었을까.

솜사탕처럼 다정한 널 오래도록 지켜볼 수 있었을까.

“엘레나, 정신 차려!”

하지만 그러기엔 우린 조금 늦었나 봐.

넌 나를 아프게 한 벌을, 난 너를 아프게 한 벌을.

신이 주신 이 지독한 운명을 받아들여야겠지.

다음 생엔 꽃과 나비처럼 아름다운 인연으로 만나길.

그렇게 간절히 바랄 거야.

“엘레나!!!”

* * *

“전하의 상태는.”

“다행히 동맥은 살짝 빗겨 나갔습니다. 그리고 과다출혈을 간신히 막아 급한 불은 껐습니다만….”

“말해.”

“혼수상태십니다. 이대로라면 언제 깨어나실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의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차디찬 손을 맞잡은 데카루스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랬어.”

“…….”

“그렇게까지 해서 대체 뭘 지키고 싶었던 거야.”

창백하게 굳어진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말끔했다.

살아있는 시체처럼 핏기조차 없었다.

당장이라도 웃으며 반겨줄 것만 같은데.

당장이라도 달려와 품에 안길 것만 같은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일어나, 제발.”

* * *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 솜사탕처럼 깨끗한 새하얀 구름, 따사롭게 비추는 밝은 햇살.

녹음이 우거진 동산엔 곧게 뻗은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토록 완벽한 공간에 나 혼자뿐이라니.

“심심해.”

나무에 기대어 앉아 저 멀리, 이 세상의 끝을 바라보았다.

온통 초록빛으로 물든 이곳은 낙원일까.

완벽하게 갈라진 하늘과 땅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광활한 우주? 먼지보다 작은 벌레? 그것도 아님, 날 삼키려는 거대한 이빨?

내가 누구인지, 무얼 하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통 알 수가 없다.

“에잇!”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플 뿐 도움 되는 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멍청한 돌을 집어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미약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누구세요? 거기 누가 있는 거예요?”

낯선 인기척에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마침 심심했던 차에 같이 놀 사람이 생겨 기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자 저 멀리서 새하얀 무언가가 천천히 다가왔다.

“너구나, 돌을 던진 아이가.”

그는 눈도, 코도, 입도 없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저 새하얀 빛처럼 보였다.

그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 그 자체였다.

“누구세요?”

지레 겁을 먹고 몸을 웅크리자 존재는 크게 웃었다.

“맞추면 네게 상을 주마.”

“못 맞추면요?”

“그래도 상을 주마.”

“에이, 그게 뭐야. 재미없게.”

존재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밝고 따스한 빛이 전신에 스며들었다.

“따듯해….”

“네게도 있단다, 그 따듯함이.”

“네? 전 아무 것도….”

“손을 펼쳐보렴.”

그의 말대로 손을 펼치자 새하얀 빛이 두 손바닥에 피어났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신기한 듯 바라보자 존재는 웃으며 말했다.

“주먹을 쥐어.”

작은 빛을 감싸듯 살며시 주먹을 쥐자 온몸에 온기가 퍼졌다.

“마법인가요?”

“네 작은 숨결이란다.”

“숨결?”

“그래, 이 세상 모든 인간에겐 숨결이 있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힘. 어두운 새벽을 깨우는 여명과도 같은 것이란다.”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는 말은 왠지 다 옳은 말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네게 보여주마.”

그는 손바닥 위로 바람을 불어 작은 구름을 만들었다.

그 구름 사이로는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작은 아이가 보였다.

‘응애! 응애!’

“힘들게 가진 아이였지. 이 아이의 부모는 간절했거든.”

그가 손짓을 하자 페이지가 넘어가듯 장면이 바뀌었다.

“이건….”

연분홍빛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

눈처럼 하얀 피부에 큰 눈망울이 분명히 그녀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행복해 보이느냐.”

존재는 마음이라도 꿰뚫어 본 듯 이야기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 번 더 손짓했다.

‘사라져, 내 앞에서 당장. 사라져!’

‘어마마마, 어마마마…. 절 버리지 마세요….’

일순간 알 수 없는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시작을 알리던 눈물방울은 어느새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마음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

심장에 바느질을 하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아파요. 여기가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아요. 제발, 그만….”

손바닥을 펼쳐 아이처럼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존재는 말없이 다시 장면을 넘겼다.

‘에이든, 네가 옆에 있어서 난 정말 좋아.’

‘내가 너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까지 쭉 지켜볼 거야.’

그를 보자마자 거칠었던 숨이 평온해졌다.

마치 따듯한 집에 돌아온 것처럼 아늑한 기분.

차가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타닥타닥 타는 벽난로를 쬐는 기분이었다.

“에이든….”

이름 세 글자를 입에 담았다.

작은 씨앗에 싹이 트듯 가슴속에 꽃이 피어났다.

“네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인가 보구나.”

존재는 빛나는 손을 다시 움직였다.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어. 너무나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당신을.’

‘내가 당신을 좋아해.’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는 손에 쥘 수도 품을 수도 없었다.

그를 만지고 안고 이 복받치는 감정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느냐.”

가슴에 손을 올리고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곤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요. 너무 많이.”

존재는 팔을 들어 세차게 구름을 휘저었다.

‘그러니 기억해, 엘레나. 기억하라고! 내가 네 어미란 말이다!!!’

순간 헉, 하고 숨이 멈췄다.

일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또다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슬픔에 말로 이룰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다.

“마음이 아픈 것이냐.”

너무나도 아파 말을 이어 갈 수조차 없었다.

그러자 존재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손을 저었다.

‘너, 설마…. 데카루스를 칼로 찌른 것도 네가 한 거니…?’

‘난 네가 괴물이 되어가는 꼴을 지켜볼 수만은 없어, 에이든.’

‘그럼에도 내가 이러는 이유는, 아직도 네가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이야.’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눈물이 마를 새도 없이 다시 한번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가슴을 부여잡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거센 파도가 단단한 바위를 강타한다.

바위가 쪼개질 만큼 아픈 파도에 무너져 내린다.

“왜 울고 있느냐.”

“아파요, 마음이 너무 아파요.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아요.”

“…….”

“하지만 이제 볼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한스러워요.”

존재는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따스한 기운이 온전히 퍼져나갔다.

“네 세계는 온통 가시밭길이구나. 꽃이라곤 보이지 않는 잔인한 숲.”

“네, 너무 힘들었어요.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하지만 너무나도 그리워요.”

“고난과 역경만이 가득한 삶이야. 행복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래도 그들과 함께해서 감히 행복했어요. 제겐 어울리지 않는 것임을 잘 알지만 조금이나마 행복했어요.”

“눈물로 점철된 인생이지. 빈 바다를 가득 채울 만큼.”

“네, 맞아요….”

존재는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 고운 빛 가루가 떨어졌다.

“아이야, 내 소중한 아이야. 그래도 돌아가고 싶으냐.”

“네, 신님. 돌아가고 싶어요.”

“내 존재를 깨달았구나.”

고개를 끄덕이자 신은 그 이유가 궁금한 듯 빤히 쳐다보았다.

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겐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거예요.”

신은 고개를 젖히고 한참 동안이나 크게 웃었다.

무언가 이상한 듯 빤히 바라보자 그는 말없이 다가와 앞에 섰다.

그러곤 나무에 손을 뻗어 새빨간 사과를 따 손에 쥐여 주었다.

굵고 단단한 사과는 군침이 돌 정도로 탐스러워 보였다.

“네게 주는 선물이란다. 아주 달콤하고 맛있을 거야.”

신은 먹어 보라며 손짓했다.

입을 크게 벌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자 새콤달콤한 과즙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맛있어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에 제일….”

신은 뿌듯한 듯 팔짱을 끼고 한 번 더 껄껄 웃었다.

“하지만 신님. 전 아직도 제 이름을 모르겠어요. 제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는 따스한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눈을 감고 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봐.”

“…….”

“진정으로 네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 그의 숨결을 따라가렴.”

그의 말대로 눈을 꼭 감고 마음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넘어 저 깊고 어두운 마음 한편에서 들려오는 작은 숨결.

“엘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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