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뭐?”
“아래. 안 도와줄 거냐고.”
순간 엘레나의 얼굴은 터지는 걸 넘어서 폭발했다.
그러니까 지금 바지를 벗겨달라는 소리야?
이 인간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다.
어떻게 맨정신으로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내, 내가 왜! 당신이 알아서 해.”
“말했잖아. 아프다고.”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 인간이 무슨 아프긴 개뿔이 아파….”
엘레나는 구석으로 가 주문을 외듯 구시렁거렸다.
그러자 그는 상의 탈의한 몸으로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해.”
“뭐, 뭐가. 아무튼 당신이 해. 알아서.”
셔츠를 벗게 해줬으면 나머진 알아서 해야지.
무슨 애도 아니고 바지를 벗겨 달래, 바지를!
내가 무슨 어린 아들 돌보는 엄마냐고!
엘레나는 삐거덕대며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그 역시 졸졸 따라와 옆에 눕는 게 아닌가.
“뭐야?”
“뭐가.”
“왜 옷 안 갈아입고 누워.”
“누가 도와주질 않으니 갈아입을 수가 없어서. 이대로 자려고.”
이 세상의 모든 어린이집 교사 분들이 존경스러웠다.
매일같이 이런 말 안 통하는 생명체를 어르고 달래 왔을 텐데.
정신력 하난 끝내주십니다.
“그래, 맘대로 해….”
너덜너덜해진 엘레나는 진작 포기한 듯했다.
이런 작자와 같은 방, 같은 침대를 쓰고 있다니.
아아, 이토록 개탄스러울 수가.
엘레나는 그가 듣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아니, 없어.”
귀도 참 밝아.
대체 어떻게 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휴….”
엘레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엄청난 사투 끝에 휴식이니 피곤할 만하다.
그렇게 차갑게 내려온 밤바람에 솔솔 잠이 들려는 순간,
요망스러운 손이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하지 마.”
“응.”
하지만 그가 말로 해서 될 인간은 아니었다.
그래, 그랬으면 진작에 조련이 가능했겠지.
데카루스는 한 번 더 등 위에 부드럽게 직선을 그었다.
“하지 말라니…!”
순간 짜증이 치밀어 뒤를 돌자 눈앞에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조각같이 깎아 놓은 듯한 얼굴에 화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뭐야.”
“등 돌리는 거 싫어.”
그럼 말로 하면 될 거 아니야, 말로.
왜 남의 등을 긁고 난린데.
“알았어. 이렇게 하고 자면 되지?”
이렇게라도 져줘야지 어떡해.
안 그럼 또 난리 난리를 피울 텐데.
데카루스는 이제야 됐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눈을 감자 그의 손이 얼굴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당신도 눈 감아.”
“응.”
소용없다는 걸 뻔히 알지만 그냥 말이라도 한번 해 봤다.
하다 보면 한 번쯤은 들어줄 날이 올 테니까.
그는 손가락으로 곡선을 그리며 얼굴을 탐험했다.
빙글빙글 돌리다가 어느샌가 콕콕 눌러보기도 하고 지그재그를 그리기도 했다.
“자.”
“응.”
아무렴 그가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졸음이 밀려오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아마 잠자기 대회에 나가면 상을 탈지도 모른다.
그렇게 깊은 블랙홀에 빠져들어 갔다.
몸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에 나른해진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느낌에 서서히 침대 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편히 주무시길, 사랑스러운 황녀님.”
* * *
“전하, 전하.”
“으음….”
“전하, 일어나세요.”
아침부터 줄기차게 깨우는 목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래도 어제는 데카루스가 괴롭히지 않아 잠을 아주 잘 잤다.
“제인?”
눈을 뜨자마자 햇빛에 빛나는 투명한 연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듯해지는 눈빛이 주위를 아른거렸다.
“네, 저예요.”
“제인!”
그녀를 보자마자 엘레나는 개구리처럼 튀어나가 목을 끌어당겼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처럼 꼭 끌어안은 모습이 진귀한 보물이라도 얻은 것 같았다.
“어머, 아침부터 이렇게 안기시면 부끄러워요.”
“그게 중요해? 이렇게 널 보는데!”
“전하께서 이렇게나 기뻐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 순간 기쁨으로 가득했던 엘레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당황한 제인은 말을 더듬으며 슬슬 눈치를 봤다.
“왜, 왜 그러세요. 혹시 어디 불편하신 점이라도?”
“제인, 변했어.”
“네???”
“변했다고.”
엘레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잡았던 팔을 내려놓았다.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진 게 꼭 다 죽어가는 물고기 같았다.
“전하, 고칠 점이 있다면 무엇이든….”
“봐, 이제 너도 날 무슨 상사처럼 대하잖아.”
“네…?”
제인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표정과 부풀어 오른 볼이 그녀의 기분을 방증해 주었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다고. 제인은 내게 친구나 다름없었는데 이젠 아니야. 꼭 진짜 하인이라도 부려 먹는 것 같아.”
“저, 전하….”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래. 난 전하라는 호칭도 싫고 괜히 떠받드는 것도 싫어. 다 불편해. 나만 보면 다들 지레 겁부터 먹는단 말야.”
제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푹 한숨을 쉬더니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이리 오세요.”
엘레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도 그녀에게 폭 하고 안겼다.
부드럽고 따듯한 품이 비뚤어진 마음을 천천히 달래주었다.
제인은 조심스레 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아가씨께서 그렇게 원하신다면 단둘이 있을 땐 이렇게 아가씨를 대할게요. 그럼 됐죠?”
“응, 응. 좋아! 네가 그렇게 불러주니까 진짜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엘레나는 머리를 세게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은 꼭 강아지 같은 그녀를 보고 더 세게 끌어안았다.
“여전히 아이 같으시다니까.”
“이렇게 큰 아이가 어딨어. 나도 어른이라고.”
“알았어요.”
제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렇게 있으니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 아가씨, 앞으로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만 있어야 해요.”
“당연하지, 제인. 나 앞으로도 너랑 이렇게 평생 행복할 건데?”
“그래요, 우리.”
이 행복이 끝나지 않고 영원하길.
이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되길.
그렇게 두 손을 꽉 맞잡고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8황자 전하께서 사라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뭐? 사라져?”
“아, 아직 못 들으셨구나. 네, 어제 아침에 사라지셨다고….”
“…….”
“아가씨?”
“가봐야겠어.”
“네? 아가씨! 아가씨!”
엘레나는 애절한 외침을 뒤로한 채 카디건을 대충 걸치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모두들 고개를 조아리며 전하, 전하 해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숨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엘레나는 뛰고 또 뛰었다.
“제국의 별 황태녀 전하를….”
“됐고. 지금 에이든, 아니 8황자 전하 어딨어.”
“…예? 그건 저희도….”
“비켜.”
엘레나는 허겁지겁 그가 있던 지하 감옥으로 갔다.
역시나 에이든은 없고 검게 지워진 혈흔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얘가 대체 어딜 간 거야….”
한참을 서성이던 엘레나는 이내 철창을 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끝까지 나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배신감? 분노? 실망?
아니,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그가 배신해서도 아니고, 그가 화나게 해서도 아니다.
그저 이렇게 또 자기 멋대로 사라져 버린 그가 미웠다.
“대체, 대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
철창 아래로 미끄러진 손은 어느새 바닥을 향했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끼던 엘레나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설마.”
엘레나는 카디건이 떨어진 줄도 모른 채 감옥 밖으로 뛰어나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침이 말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에이든.”
엘레나는 재빨리 계단을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아빠가 있는 곳까지 가기가 힘든지.
분명 빠르게 달리고 있는데 발목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라도 달아놓은 것 같았다.
“이게 무슨….”
계단을 오르자 저 멀리서부터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발밑엔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이 즐비했고 신발엔 끈적한 피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엘레나는 열려있는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찰박찰박, 발을 움직일 때마다 흥건한 피가 튀었다.
제발, 제발 그가 아니길 바랐다.
이런 끔찍한 짓을 한 사람이 제발 에이든이 아니길.
하지만 비극은 길고 희극은 짧다고 하던가.
“에이든….”
이렇게 또다시 비극이 시작될 줄이야.
눈앞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쥐고 아빠의 목을 겨누는 그의 모습을.
“레나?”
“너 대체….”
에이든은 칼을 던지고 재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품에 꽉 껴안았다.
“너, 너 뭐 하는 거야….”
“보고 싶었어.”
“뭐 하는 거냐고….”
“너 없을 때 몰래 하려고 했는데. 미안.”
엘레나는 천천히 몸을 떼어내어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 피로 얼룩진 얼굴에선 웃음꽃이 피어났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에이든은 순식간에 단도를 꺼내 황제를 향해 던졌다.
“에이든!!!”
하지만 이런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단도는 간신히 빗나가 황제의 얼굴을 살짝 스쳐 지나갔다.
엘레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잡아끌었다.
“이번엔 정확히 조준할 거야. 비켜.”
“아니, 못 해. 너 그만해.”
엘레나는 그를 밀쳐 황제 앞을 막아섰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꼭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 같았다.
“엘레나, 이만하면 됐다. 이 아비는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어. 그러니 걱정 말고….”
“아빠는 가만히 계세요.”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엘레나는 벽에 꽂힌 단도를 빼 들어 손목에 갖다 댔다.
“너 대체 뭐 하려는 거야.”
“이제 그만해.”
“레나. 그거 당장 내려놔.”
푹.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피부에선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엘레나!”
“네가 그만하지 않으면 내가 죽을 거야.”
에이든은 작은 짐승을 어르고 달래듯 천천히 다가왔다.
놀라 크게 뜬 두 눈에선 극한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내려놔, 레나. 제발. 그거 내려 놔….”
하지만 그가 애원할수록 단도는 더 깊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참을 수 없는 신음이 목구멍 밖으로 흘러나왔다.
“엘레나!!!”
“오지 마. 오면 바로 쑤셔버릴 거니까.”